[커버스타]
[전도연] 몸에 딱 붙는 하녀복, 그걸 보고 감 잡았잖아
2010-04-26
글 : 김용언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하녀>의 전도연

궁금하다. 임상수 감독의 신작 <하녀> 속 하녀, 은이는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작은 수수께끼로 남을 여자다. 몸에 딱 붙는 하녀복을 입은 채 지나치게 친절한 집주인 훈(이정재), 세련된 안주인 해라(서우), 모든 걸 지켜보는 늙은 하녀 병식(윤여정)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이 여자는 대체 뭐지, 뭘 바라는 거지, 왜 둥글게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거지. 우리의 상식과 너무나 다르게 반응하고 행동하는 이 여자, 은이는 욕망과 열정과 치정의 관계망을 끝내 찢어발기고 튀어나온다. 그 마지막까지 우리는 그녀를 쉽게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끝내 그 여자의 정체를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신 그녀는 우리를 궁금하게 만들고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이 인물 속으로 걸어들어간 장본인인 전도연의 부담 역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 이후 2년 만의 복귀작에서 그녀는 언제나처럼 민숭민숭하지 않은 선택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은이를 이해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고 살짝 투정 부리다가도 실제로 자신이 겪어야 했을 고민과 당황스러움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진 않았다. “인물 성격도 그렇고 작업하는 과정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생긋 웃어보일 뿐이다. 배우가 한 인물 안에 잠겨 그 삶의 단면을 살아내는 과정은 때때로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기적 같은 놀라움이다. 그러나 종이 위에 씌여진 인물을 되살려내는 대신 배우 자신의 기억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서고, 그녀만이 간직한 비밀로 보존된다. 은이만큼이나, 배우 전도연의 비밀 역시 궁금해진다. 일단은 <하녀>의 개봉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신상 변화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2년 정도 쉬면서 일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진 않았나. (웃음) 예전엔 워커홀릭쪽에 가까웠는데 말이다.
=결혼하고 나니까 일에 대해 더 절실해진 것 같다. 그전에는 언제든, 내가 마음먹으면 일할 수 있다고 철없는 생각을 했었다. 이젠 고려해야 할 점들이 더 많아지면서 역설적으로 일이 내게 얼마만큼 소중하고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더 크고 절실하게 느껴지더라. 하지만 결혼과 출산이라는 개인사 이외에도, 작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배우로서 욕심나는 시나리오 자체가 별로 없었다. <하녀>의 경우, 가뭄에 단비 같은 작품이었다.

-<하녀> 시나리오의 첫인상은 어땠나.
=음, 너무 세고 파격적이고 잘 안 와닿았다. 아까 제작보고회 때 임상수 감독님이 ‘막장드라마’라고 하셨던가?

-명품 막장드라마라는 표현을 쓰셨다. (웃음)
=명품까진 생각도 못하고, 막장드라마 인상이 먼저 느껴졌다. (웃음) 줄거리만 놓고 보면 좀 뻔하기도 하고. 정말이지 임상수 감독님이 아니었으면 <하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하녀> 이전부터 임상수 감독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건가.
=그동안 일하면서 임 감독님 얘기를 여기저기서 조금씩 들었다. 꽤 세고 스타일리시하다고. 직접 영화를 봐도 그 사람만의 색깔이 느껴지더라. 음… 최근 들어 점점 감독의 색깔에 묻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를 자꾸 깎아내고 싶은 거다. 그전까지는 전도연의 장점이나 색깔이 부각되어 영화가 보여졌다면, 앞으로는 내가 가진 걸 자꾸 버리면서 남의 색을 나한테 입히고 싶어졌다. 그랬을 때 떠오른 사람이 막연하게 임상수 감독이었다. 결국 <하녀> 출연을 결정한 다음 다들 너무 궁금해했다. 그 임상수와 그 전도연이 붙어서? 과연 어떤 영화를! 다들 그렇게 흥미로워하니까 나 역시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만드는 영화는 어떨까. 돌이켜보면 유쾌상쾌통쾌라는 말이 맞다. (웃음) 나라면 그렇게 안 할 것 같은데 임상수 감독님이 주는 디렉션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또 지나치게 뜬금없진 않았다. 아, 이럴 수도 있겠다, 저럴 수도 있겠다 하면서 따라가다 보니 무지 재밌어지더라고. (웃음) <하녀>에서 매 장면 하나하나,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숨 돌려가며 찍을 수 있는 장면이 하나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은 가벼웠다. 정신적 스트레스를 안 받으니까, 그 힘듦이 힘듦으로 안 받아들여지더라.

-예를 하나만 들어준다면.
=은이가 이 집에 와서 처음으로 주인집 남자 훈에게 아침식사를 가져다주는 장면이 있다. 훈이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은이가 그 옆에 음식을 내려놓고 몰래 훔쳐보다가 나오는 장면인데, 감독님은 거기서 춤을 추면서 주방으로 돌아가라는 거다. 춤을요? 어떻게? 그러니까 감독님이 막 이상한 춤을 시범으로 보이더라. (웃음) 말이 되냐고 그랬더니 “뭐, 전도연씨 식으로 하세요. 못하겠으면 마시고요”(이 순간 전도연은 임상수 감독 특유의 제스처를 똑같이 따라했다) 그러고 만다. 꼭 해야 한다,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머 웬일이니, 하다가 뒤돌아 생각해보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이 집 일이 은이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고, 의식하는 대상이 생기면 사실 맘이 살짝 들뜰 수도 있는 거니까. 내가 정말 납득할 수 없다면 못하겠다고 했을 텐데, 해보지 뭐 싶더라고.

-혹시 <하녀>를 찍기 전에 김기영 감독의 <하녀> 시리즈를 접했나.
=일부러 보려고 본 건 아니었고, 전혀 볼 생각도 없었다. 리메이크라고 해도, 그냥 전혀 다르고 새로운 영화라고 생각했으니까 캐릭터 연구 때문에 챙겨보려고 하진 않았다. 다만 제주도에 촬영하러 내려갔는데, 마침 그 리조트에 <하녀> DVD가 있는 거야. (웃음) 어머 <하녀>다! 그러면서 봤는데 역시나… 객관적으로 봤던 것 같다. 그때 당시에 이런 영화가? 우와, 센세이셔널하다 그러면서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연기한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굉장히 단단하고 현실적이고 디테일이 풍성했다. 은이는 거의 안 해본 타입의 인물 아니었나.
=은이에게는 지나친 순수함이 있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 지나친 순수함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이 품고 있는 위험과 도발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나 백지 같은 여자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공인데 누군가 그 공을 던지거나 튀기면, 그 힘에 따라 높이도 달라지고 방향도 달라진다. 지나치게 본능적이라, 욕망 앞에서 더없이 정직해진다. 그렇게 정적이면서도 풍부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은이의 가식이 아니라 전부 진심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녀는 극중 누구와도 대립하지 않는다.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고 반응할 뿐이다. 그걸 나중에야 이해했다.

-은이의 과거사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배우가 구축하기에 아주 불충분하고 불친절하기까지 한 캐릭터였을 것 같다.
=<하녀> 속 인물 중에서 가장 전형적이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왜 감독님이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았는지, 나 역시 좀 불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포인트가 달랐던 거다. 나는 계속 인물에 대해 집착했는데, 감독님은 관계와 상황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하녀>는 은이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하녀에 관한 영화다.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모두가 하녀다. 은이와 병식만 하녀가 아니라, 훈이라는 인물과 결혼한 해라도 그렇고, 훈의 장모도 모두 하녀다. 우리 모두 하녀 근성을 갖고 있다.” 나도 그 말에 공감을 하게 됐다. 처음엔 은이가 왜 이혼했을까 등의 히스토리에 집착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다. 은이라는 인물이 보여지는 상황만 가지고도 충분히 입체적일 수 있었다.

-은이는 원작의 하녀와 달리 복수에 매진하는 인물이 아니다. 타인의 악의를 쉽게 알아채지 못하고 순응하다가 끝내 한순간에 폭발한다.
=임상수 감독님은 은이가 유일하게 하녀 근성이 없는 인물이라고 했다. 극중에서 해라나 병식은 자기들의 진심을 다른 무언가로 대체할 수 있었다. 해라는 ‘내가 조금만 참으면 내 자식들은 엄청난 부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병식은 그들이 항상 돈을 주니까 그걸로 부를 축적하고 아들을 검사로 만든다. 내 마음이 짓밟혀도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긴다. 하지만 은이에게는 그런 게 없다. 그걸 못 견디기 때문에 이렇게는 못살아요, 이거는 아니잖아요, 이렇게 된다.

-스틸사진과 예고편을 보니 은이의 유니폼이 눈에 확 띈다. <화양연화>에서 장만옥이 잘 차려입었던 그 조신한 치파오가 하나의 캐릭터처럼 작용했던 게 연상되더라.
=처음에 작품 결정하고 나서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점 때문에 끊임없이 감독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감독님은 다른 말씀만 하시는 거다. 이를테면 비주얼적인 부분. 뭔가 둘이서 장시간 이야기를 나눴는데 뒤돌아서면 내가 듣고 싶어하는 얘기를 하나도 못 들었다. (웃음) 되게 혼란스러웠고 힘들었다. 대충 어떤 감이라도 잡아야 하는데, 너무 딴 나라 얘기 같았다. 그러다가 감독님이 의상 컨셉을 얘기하는 순간 정리가 됐다. 감독님 왈, 몸의 라인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들은 집 안에서도 구두를 신는다. 무조건 패셔너블해야 한다. 은이는 직업이 하녀라는 것 때문에 옷을 구질구질하게 입는 사람이 아니다. 유아교육학과도 나왔고, 어쨌든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꾸밀 줄 아는 사람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임 감독님이 어떤 인물을 만들려고 하는지 감이 잡히더라. 그 의상 컨셉과 하녀복을 본 순간 아, <하녀>가 이런 영화구나, 난 지금까지 감독님과 완전히 다른 코드로 얘기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하녀>는 전적으로 세트 내에서 이뤄지는 이야기다. 세트 안에서의 리얼리티는 배우한테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세트의 규모가 주는 중압감이 대단했다. 모든 게 다 어마어마하고 럭셔리했다. 난 그림이나 가구에 대해서 완전 문외한인데, 얼마 전에 파리에 촬영갔다가 이런 쪽 구매하는 분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분이 <하녀> 예고편을 보고 나서 그 가구는 누구 작품이고 그 의자와 그 그림은 몇년 된 거고 하면서 흥분하시더라. 영화를 촬영할 당시 ‘컷’만 나오면 스탭들이 일제히 가구와 그림 보호하느라 야단이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웃음) 내가 찍었지만 대체 어떤 영화가 나올까. 감히, 잘은 모르지만, 기존 한국영화와는 상당히 다른 영화가 되지 않을까. 아직 못 봤으니 작품성까지는 말을 못하겠지만, 시각적으로는 분명히 한 단계 뛰어넘으리라는 기대감이 있다.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 그녀의 오랜만의 복귀작. 그런 타이틀이 늘어남에 따라 느끼는 부담감도 클 것 같다.
=작품을 선택할 때에는, 그런 부담감을 가지고 고를 만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은 게 현실이다. 오히려 책임감은 현장에서 더 크게 느낀다. 후배들이 점점 어려지니까 나한테 의지하는 부분들도 커진다. ‘전도연이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은 있다. 무엇이든 해야 하고, 엄살 부리고 싶을 때도 있는데 그럴 수가 없다. (웃음)

-예전에 스스로가 비약했다고 느낀 작품으로 <해피엔드>와 <밀양>을 언급했다. 이번 <하녀>의 경우는 어땠을까.
=<하녀>도 그렇고 매번 작품 끝낼 때마다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크든 작든 성장은 분명히 있다. 연기라는 게 어쨌든 내 안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발견하는 작업이니까. <해피엔드>나 <밀양>은 여배우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특히 <해피엔드>는 이미지 부분에 있어 좀더 많은 걸 가지고 가야 하는 시점에 여배우로서 많은 걸 버려야 했고. 그 덕분에 이후부터 좀더 과감해지고 거침없어진 것 같다. <밀양>의 경우 이창동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나도 그렇고, 전도연씨도 이미 ‘메이드 인 전도연’이다. 우리 둘이 만났을 때 서로를 아주 작게라도 넘어서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끝나고 나서야 알겠더라. 전도연이 잘하는 것만 써먹고, 이창동이 할 수 있는 걸 써먹는 게 아니라, 서로 부족하더라도 못하는 부분을 좀더 도전해보자 그런 의미이지 않았을까.

헤어 이혜영 실장(아베다)·메이크업 김지현 실장·스타일리스트 강이슬 실장·의상협찬 보테가베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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