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톡]
[김용택] 사과가 닳도록 찍고 또 찍고
2010-05-12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최성열
<시>에서 시인을 연기한 김용택 시인

“지금까지 여러분은 사과를 진짜로 본 게 아니에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예요.” 이창동 감독의 <시>에서 ‘시’에 대한 정의는 모두 이 사람에게서 나온다. 섬진강을 작품의 주요 배경으로 삼아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 시인이다. 이창동 감독이 소설가로 활동하던 시절, 같은 문인으로서 인연을 이어가던 김용택 시인은 이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시>의 출연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다. 본인은 실수가 많았다며 조심스럽지만, 주인공 양미자(윤정희)에게 시를 강의하는 ‘김 시인’의 모습은 연기가 아니라 진실로 보인다. 그것은 김 시인의 대사 대부분이 삶으로부터 건져내고 터득한 김용택 시인의 실제 강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전주국제영화제가 한창이던 5월의 첫날, 전주에 머무르고 있는 김용택 시인을 만났다. “영화제가 시작되면 젊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는 게 좋다”던 김 시인은 사진기자가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여줘야 한다”는 시인의 시론을 닮아 있었다.

-전주에 사신다고 들었어요.
=네. 전주에도 집이 있고, 임실 덕치에도 있어요. 요즘엔 주로 여기에서 지내요. 집이 이 카페 근처예요.

-영화의 거리 근처에 사시는군요. 전주영화제가 열릴 때마다 구경 많이 하시겠어요.
=그럼요. 오늘도 짬이 나서 이 근처를 산책했어요. 사람들이 많아 좋네요. 이따금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요.

-<시>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되셨나요.
=지난해인가 지지난해인가, 이창동 감독님이 전화를 했어요. 회사 직원 몇명을 보내서 제 시 강연을 녹화해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알아서 하시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두 시간 강연이었는데, 정말 와서 녹화해가더라고요. 그리고는 2009년 여름에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어요.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시나리오 자체로 완벽한 소설이더라고요. 그런데 그 속에 김용택 시인이란 사람이 나오는 거야. 나는 속으로 감독님이 진짜 장난기 심한 사람이네 생각했어요. 자세히 보니 나의 시 강연 중 몇 구절이 들어 있더라고요. 아, 이러려고 이 양반이 녹화를 떠갔구나 생각을 했죠.

-어떤 구절을 인용하셨던가요.
=요약하자면 ‘사물을 자세히 봐라, 그래야 시가 떠오른다’는 내용과 ‘시라는 게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주변에 있다’는 내용이었죠.

-출연 제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나요.
=시나리오를 보고 언뜻 생각은 했어요. 나보고 혹시 김용택 역을 하라고 할까. 그런데 괴로운 거야. 너무 힘든 거야. 나보고 하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어느 날 만났는데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동안 영화도 많이 보셨는데…. 은막에 데뷔하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양반이 내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오만 계산을 다 했을까 싶기도 했어요. 정말 신중한 사람이거든요.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했고, 거기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감독님을 믿고 출연을 결정했어요.

-영화 출연 제의는 <시>가 처음이었나요.
=네. 첫 출연이었어요. 그래서 한두번 얼굴이나 비치려니 생각했죠. 그래서 만날 물어봤어요. 화면에 나도 나와? 라고요. (웃음) 내가 이렇게 길게 나올 줄이야….

-촬영현장을 경험한 소감은 어떠셨어요.
=엄청나더라고요. 70~80명의 사람들이 착착착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그리고 윤정희 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는 놀랐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의 로망이었거든요. 꿈에나 나타나는 그런 여인이었는데, 그분이 눈앞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더라고요.

-윤정희 선생님과 말씀은 많이 나누셨나요.
=말할 기회는 많이 없었어요. 제가 혼자 대사하는 장면이 많아 영화에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죠. 하지만 선생님이 격려를 굉장히 많이 해주셨어요. 제가 연기할 때 감독님이 오케이, 사인을 내면 윤정희 선생님이 절 껴안고 팔짝팔짝 뛰시는 거예요. 해냈다고. 제가 옆에서 의기소침해할 때 정말 잘했다고 말씀해주시고, 나중에 출연 제안 많이 들어오겠다고 하시며 격려해줬어요.

-연기하시면서는 어떤 점이 힘드셨어요.
=이창동 감독님이 내 글을 알잖아요. 말하자면 형제의 글을 앞에 놓고 강연을 하는 게 되는데. (웃음) 그래서 어려웠죠. 잘 아는 사람의 영화이기 때문에 부담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리고 감독님 영화는 시나리오에 써 있는 문장이나 말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게 해야 해요. 그래서 NG가 굉장히 많이 났는데 특히 사과를 들고 강의하는 장면에서 엄청났어요. 사과를 하도 오래 쥐고 있어서 나중엔 다 닳았더라고요. 그 사과는 기념으로 집에 가져와서 사진도 찍어놨다니까. (웃음)

-실제로도 시 강의를 종종 하신다고 들었어요.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강의하실 텐데, <시>에서처럼 성인 수강생들과의 수업은 어떤가요.
=예를 들어 어린이들은 단순해요. 생각이 길게 나가지 못하니 사물의 움직임을 그대로 보고 짧게 쓰죠. 사랑이란 주제로 시를 쓴다면 아이들의 시는 이래요. 제목 <사랑>. 나는 어머니가 좋다/왜냐하면 그냥 좋다.// 단순하지만 진정성이 있고 진지하죠. 어른들은 극중 양미자씨처럼 문학이라는 특별한 삶의 표현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삶과 별 상관이 없는 상상력을 동원해 글을 지어내요. 꾸며내는 거죠. 삶을 그대로 가져오면 되는데 삶을 꾸미는 거야. 미사여구를 넣어서.

-양미자씨처럼 기억에 남을 만한 성인 수강생이 있을까요.
=실제로도 양미자씨 같은 분들이 기억에 남아요. 그런 분들이 정말 꼭 있어요. 분위기와 맞지 않는 엉뚱한 질문을 해서 저를 곤란하게 한다거나, 심각한 얘기를 하는 거죠. 사실은 그렇게 심각할 필요가 없는데. (웃음) 영화였으니 그 정도만 물어봤지, 실제 상황이었다면 아마 양미자씨보다 더 복잡하게 물어봤을 거예요. 엉뚱하게, 말도 안되게. (웃음)

-완성된 영화는 보셨나요.
=무서워서 제대로 못 봤어요. 제가 나올라 치면 고개를 숙이고 대사만 들었어요. 너무 어색하고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못 보겠더라고. 안사람도 함께 영화를 봤는데, 그이도 너무 긴장해서 영화를 자세히 못 봤더라고. (웃음) 그래도 한 장면은 봤어요. 사과 들고 강의하는 장면. 그 장면은 너무 고생해서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하더라고. (좌중 웃음)

-그럼에도 시인으로서 <시>라는 영화를 어떻게 보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시를 사람들이 더이상 보지 않는 이 시점에 이창동 감독은 <시>를 통해서 자기가 말하고 싶은 걸 모두 말한 것 같아요. 시사회 보고 와서 안사람이랑 집에서 얘기를 했어요. 감독님 영화의 미덕에 대해. 그분의 미덕은 인간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지 않는다는 거예요. 대개의 영화들은 그 사람의 인생을 다 표현해요. 끝을 봐야만 끝나죠. 그런데 이창동 감독은 삶의 끝을 보여주지 않고 절제하고 누름으로써 사람들에게 더 많은 걸 전해주는 거야. 그 눌러진 감동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버리는 거죠. 안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이창동 감독은 사람을 정말로 불편하게 하는 양반이구나. 자기는 절제하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은 정말로 아프게 한다고.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니까요.

-시를 보지 않는 지금의 시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당연히 안 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재미있는 게 너무 많잖아요. 영화를 봐요. 얼마나 재미있나. (웃음) 시적인 감동은 느리고 더디죠. 오래 있다가 오는 거잖아요. 오늘날의 사람들은 감동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요. 보면 바로 감동하고 바로 반응해야 하죠. 시대가 너무 빨리 가버리니까 시인들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요. 나는 지금의 복잡한 현대사회를 분석하고 비판하고 판단할 만한 힘이 우리 인간에겐 없다고 봐요. 그럼에도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정말 대단하지만.

-영화를 좋아하고 즐겨보신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에 좋게 보신 영화가 있는지요.
=최근엔 재밌게 본 영화가 없어요. <아바타>도 사람들은 좋다고 난리지만 나는 보다가 잤어요. 오히려 한국영화가 더 재미있어요. 우리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도 좋지만 봉준호,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요. 이준익 감독님도 영화 만드는 솜씨는 대단하다고 보고요. 옛날 같았으면 그런 사람들이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겠죠 아마? (웃음)

-그럼 봉준호, 박찬욱 감독님이 제안하시면 영화에 출연할 의향이 있으신가요.
=아유, 저에게 그럴 리가 없죠. 못해요 못해. 다만 나는 이런 역을 꼭 한번 카메오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읍내에 똘마니 한 서너명 데리고 있는 조폭. 두 장면 나오고 죽는. (웃음) 고등학생 시절 순창 읍내에서 봤던 비열한 깡패들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박혀 있거든요. 또 하나는 조그마한 구멍 가게 주인. 딱 한 장면 나오는. 러닝셔츠와 오래된 파자마 입고, 문 열고 앉아 있는데 고등학생 놈들이 담배 사러 오는 거야. 그럼 파리채로 때리는 거지. 이 새끼들, 안 가? 이런 장면이요. 그게 나와 맞는 것 같아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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