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이제 다시, 화두는 ‘계급’이다
2010-06-03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치정극이었던 <하녀>가 계급과 정치의 풍자극으로 변한 이유는

임상수의 <하녀>는 김기영의 <하녀>의 리메이크작이 아니다. 원안을 대자면 내용 면에서는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이, 스타일 면에서는 <그때 그사람들>이 연상되며, 컨텍스트적으로는 ‘21세기 식모살이’라는 화두를 꺼낸 <지붕 뚫고 하이킥!>과 맞닿아 있다. 세경의 사랑이 참혹한 결말로 ‘꿈의 불가능성’을 입증하였듯, <하녀>의 결말 역시 ‘복수의 불가능성’을 역설한다.

쩍 벌어진 계급사회

임상수의 <하녀>는 치정극이 아니다. 일단 ‘치정’이라 할 만한 파토스가 없다. 아내의 임신으로 잠깐 성적 불만족이 생긴 남자가 하녀 방에 든다. 대개의 성희롱이 그러하듯 접근이 쉽고 뒤탈이 없을 만함 때문에, 그녀를 만졌다. 하지만 그녀는 좋아서 응한다. 이후 몇번의 섹스로 그녀가 ‘은밀한 자부심’을 갖지만, 돈을 주고받는 것으로 감정은 마무리된다. 김기영 작에서 하녀의 감정은 폭발적이다. 시집 보내준다는 조건으로 식모로 들어온 명자는 질투심에 남자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하여 성관계를 갖고, 임신한 뒤 부인의 밥 수발을 받으며, 남자에게 “여보”라 부른다. 부인의 설득으로 낙태를 한 그녀는 주인 아들을 죽이고, 남자와 동반자살한다. 임상수 작에서 이 정도의 감정이 생기기엔 인물들간 수직 거리가 너무 멀다. “당신 같은 분의 애를 배서 죄송한” 노릇인 것이다.

임상수의 <하녀>에서 중심은 치정이나 복수가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벌어진 계급 차이다. 계급 차의 정도가 김기영의 <하녀>가 속한 1960년이 아니라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이 속한 191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약한 자의 슬픔>에서 엘리자베트는 부모형제 없이 K남작의 집에 유숙하는 가정교사다. 그녀는 밤에 방에 든 K남작과 몇 차례 성관계를 가진 뒤 정을 느끼지만, 임신 사실을 말하자 쫓겨나고, 낙향 뒤 재판을 걸지만 패소한다. 그녀는 ‘조선의 선각자’ K남작의 기득권을 침식하지 못하고, 단지 자신이 ‘약한 자’라는 자각을 얻는다. “우리는 상것이고, 저쪽은 양반”이라던 오촌모의 말처럼 반상의 구분이 잔존하고, 남녀의 위계가 분명하던 식민지 조선사회가 2010년 <하녀>에 겹쳐지다니, 웬 시대착오인가 싶겠지만,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 붕괴와 양극화로, 계급분화가 가속된 한국사회의 신분질서가 근 1세기 전으로 후퇴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시의적절한 고발이다.

영화는 ‘계급’이란 주제를 시각적 충격으로 제시한다. 상류층 삶에 대한 일반적 상상, 그 너머가 펼쳐진다. 박물관이 연상되는 웅장한 저택에서, 하녀복을 입고 근무하는 늙은 하녀와 젊은 하녀, 그랜드피아노로 베토벤을 연주하는 복근남의 주인장이라… “우읍스!” 이는 김기영 작은 물론이고, 전문도우미 “미세스 문~”의 근무지보다 확실하게 업그레이드된 설정이다. 김기영 작에서 부(富)는 부인의 10년간의 노동으로 일군 것이었지만, 임상수 작에서 부는 세습된 것이다. 하녀 역시 갓 상경한 처녀가 아니라, 대학도 다녔고 지방에 아파트도 소유한 이혼녀이다. 한 세대 안에서 노동이나 교육에 의해 뒤집힐 수 있는 계급이 아니란 말씀이다. 김기영 작에 없던 세 인물, 즉 늙은 하녀와 장모, 친구 등도 고착화되고 일반화된 계급을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김기영 작의 경제력 없던 남편은 낙태 이후 아내에게 휘둘리지만, 임상수 작에서 남편은 “당신 딸이 낳아야만 내 자식이냐? 감히 누가 내 자식을 죽일 수 있느냐?”며 장모에게 따진다. 인물들간의 관계는 철저하게 부를 중심으로 서열화되며, 세습부의 원천인 남편은 왕이다. 이는 유교 도덕과도 결별한 새로운 ‘경제-가부장제’로, 영화는 패도정치를 그린 궁중사극과 닮은꼴이다.

최고위층의 스캔들과 이에 대한 태도들

‘궁중사극을 재현한 현대극’은 형용모순이 아니다. 현대에도 왕정질서를 따르는 집단이 있지 않은가? 2대에서 3대로 이어지려는 북한의 권력세습이나 삼성의 경영권세습이 그렇고, 박정희의 ‘제왕적’ 통치가 그러했다. <하녀>와 <그때 그사람들>은 같은 이야기다. 일반인이 상상하지 못한 최고위층의 삶을 보여주며, 이들의 진실이 드러나는 스캔들과 이를 둘러싼 이전투구를 그린다. 임상수는 존재의 진실은 아랫도리로 드러나며, 정치는 치정에 의해 속살을 보인다고 믿는 감독이므로, 치정극이었던 <하녀>가 계급과 정치의 풍자극으로 변한 건 당연하다. <하녀>는 <그때 그사람들>과 스타일도 같다. 웅장한 세트와 모던한 미술, 감독의 장기인 한 화면 안에 좌우로, 또는 전·후경으로 인물들을 배치해 2.35:1의 화면비를 제대로 살린 수평적 미장센, 극단적인 부감숏을 활용하여 공간의 깊이감은 물론, 인물을 ‘내려다보는’ 독특한 시점을 확보한 카메라의 위치 등등. 심지어 인공적인 세트 안의 블랙코미디가 시작되기 전,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실제 삶의 모습을 담은 시퀀스가 붙는 형식도 같다.

<하녀>의 인물들은 <그때 그사람들>의 그들처럼 진지하게 행동할수록 풍자된다. 그런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불편함이 있다. <그때 그사람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이유는 감정이입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었다. 관찰자 위치에 여자를 조달하다 엉겁결에 ‘대사’에 가담한 주 과장(한석규)이 있고, 마지막 내레이션은 딸을 바치려 안달하던 엄마(윤여정)의 몫이었다. 관객은 권력의 단물을 탐하던 이들과 동일시해야 하는 곤혹감을 느끼다가, 영화를 의식 밖으로 밀어냈다. 관찰자이자 중간관리자인 주 과장은 늙은 하녀로 (해설자이자 딸을 내세운 엄마는 장모로) 바뀐다. 권력의 개로 이골이 나 있고,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그짓’을 그만둘 수 없다. 사태가 복잡해지자 오도 가도 못하고 유턴을 반복하다 퇴장했던 주 과장처럼 늙은 하녀는 사태가 격해지는 것을 보고 심경의 변화를 겪지만, 그녀에게 복수기회를 주고 떠나는 것 이상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를 통한 저항을 보여주지 않는다. <약한 자의 슬픔>의 ‘약한 자’조차 재판을 걸지만, 늙은 하녀는 아들이 검사이고 증거물을 확보할 수 있음에도 재판을 상상하지 못한다. 젊은 하녀 역시 순수한 피해자로 볼 수 없다. 그녀는 보살핌 노동에서 보람을 느끼는(“저, 이 짓 좋아해요”) 노동자였지만, 섹스 뒤 자부심을 느낄 때나 욕조에 누워 “이 애기 당신 애예요”라고 말할 때 오직 모성본능만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임상수가 도덕적 흠결이 있는 인물을 관찰자, 해설자, 주인공으로 삼는 건 의도된 것이다. 이 추악한 욕망에 연루되지 않은 자가 누구인지 묻는 것이다. 권력을 지니지 않았다 할지라도 순수한 희생자가 아니며, 욕망의 측면에선 모두 동조자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복수는 나쁜 권력자를 향한 방식이 아니라,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그 복수는 카타르시스가 없고, 오히려 불쾌하다. 그런데 불쾌를 떠나, 이러한 입장이 과연 옳은지 사유해야 한다. <하하하>의 성옥의 말처럼, “우리 자신에 대한 경멸이 들어 있는” 건 아닌지, 자본과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부터 탈주하려는 또 다른 욕망에 귀기울이지 않고, 무차별적인 자기 조롱 속에 폐절시키는 건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임상수는 그녀가 돌아와 주인 앞에서 짓는 ‘미친’ 미소나 마조히즘을 ‘탈주하는 욕망의 발현’으로 생각한 모양이지만, 이를 전달하기 위해선 그녀의 내면적 변화나 태아에 대한 애도를 더 부각했어야 했다. 김기영 작에서 계단은 한 단계씩 쌓아올린 계급상승의 상징이자, 하녀와 아들이 머리를 짓찧는 추락의 장소였다. 임상수 작에서 그녀는 샹들리에 늘어진 허공에 목을 맨다. 발에 땅이 닿지 않는 허공에 판타지처럼 구축된 부와 거기에 매달리다 내쳐진 죽음. 그녀는 필생의 악몽이 되고자 하였으나, 마녀처럼 불타는 그녀는 이들의 뇌리에 ‘기스’조차내지 못한다. 첫 장면, 여인의 투신이 아스팔트에 핏자국으로만 남았듯이. 에필로그, 그들은 하녀들에 둘러싸여 영어로 말하며, 신흥왕조의 키치적 삶을 계속 이어간다.

하녀노동의 전지구적 보편화

21세기 노동의 특징으로 정보화와 함께 정동화와 여성화를 꼽는다.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인구가 늘어나고, 공백이 된 가사노동은 임노동화된다. 세계화에 의해 양산된 이주노동자들이 ‘전 지구적 하녀들’로 그 자리를 맡고, 그녀의 아이들은 다시 ‘본국의 하녀들’이 키운다. 돌봄 노동을 여성의 몫으로 돌리는 젠더불평등이 여전한 가운데 가속되는 세계화로 ‘하녀노동’은 과거의 것이 아닌 지구적 보편성을 지닌 현재의 노동형태가 된다. 21세기 한국사회, 노동계급에 대한 복지가 전무한 상태에서 고용은 비정규화되고, 부는 부동산과 교육을 매개로 세습된다. 이제 다시, 화두는 ‘계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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