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추모] 청년기 미국의 초상
2010-06-07
글 : 김성훈
할리우드 성격파 배우, 데니스 호퍼를 떠나 보내며

신인치고는 기대 이상으로 당돌했다. 아니, 겁이 없다는 표현이 더 적당한지도 모르겠다. 제임스 딘의 유작 <자이언트>(1956)의 마지막, 제트 링크(제임스 딘)의 유전 발견으로 실의에 빠진 빅 베네딕트(록 허드슨)는 그의 아들 조단(데니스 호퍼)과 설전을 벌인다. 무려 3시간20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유일하게 조단이 빛나는 순간이다. 당대 최고의 배우 록 허드슨 앞에서 새파란 애송이 데니스 호퍼는 한치의 물러섬없이 아버지의 잘잘못을 따진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는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대배우로 성장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은 이후 그가 연기한 캐릭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했다.

지난 5월29일(현지시각) LA, 데니스 호퍼가 지병인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살. 그는 지난해 10월 암 진단을 받은 뒤 지금까지 항암치료를 받아왔다고 한다. 1936년 미국 캔사스주 다지시에서 태어난 그는 니콜라스 레이 감독의 1955년작 <이유 없는 반항>에서 주인공 제임스 딘을 괴롭히는 갱단 중 한명으로 데뷔했다. 그의 반골 기질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워낙 고집이 세고, 다루기 힘든 성격 때문에 <OK 목장의 결투>(1957)를 비롯한 몇몇 영화에만 겨우 출연할 수 있었다. 감독이 원하는 대로 연기를 하지 않아 “테이크를 80번이나 간” 일화만 봐도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인생의 전환점은 <이지 라이더>(1969)였다. LA에서 마약을 팔아 오토바이를 구입한 두 남자가 뉴올리언스로 여행을 떠나는 내용의 로드무비다. 전작인 <트립>(당시 무명이었던 잭 니콜슨이 각본을 썼다)에서 만난 배우 피터 폰다가 그에게 영화의 연출과 주인공을 제안했다. 1960년대 자유주의 물결에 심취하고 있던 그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감독 데니스 호퍼는 기성 세대에 대한 반항,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고발을 카메라에 담았고, 배우 데니스 호퍼는 온몸을 내던져 ‘진정한 자유’를 연기했다. 결과는? 그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됐다. 당대 현실을 반영한 <이지 라이더>는 그야말로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고, 그는 전성기를 열었다.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1971년에 만든 <라스트 무비>가 실패하면서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존 휴스턴 감독처럼 되고 싶다”던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물론 <미국인 친구>(1977)에서 친구의 병을 이용하려는 사기꾼, <지옥의 묵시록>(1979)에서 말론 브랜도를 추종하는 사진작가, <럼블 피쉬>(1983)에서 알코올에 중독된 아빠 등 배우로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70년대의 대부분을 정신과 병동에서 보냈다”고 할 정도로 약물과 알코올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1986년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블루 벨벳>에서 성도착증 살인범으로 재기하기 전까지.

이후 그는 악당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다. <뒤로 가는 남과 여>(1989), <배반의 도시>(1992)에서 킬러를, <스피드>(1994)에서 테러리스트를, <워터월드>(1995)에서 애꾸눈 악당을 맡아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데니스 호퍼 하면 반항, 저항, 악당 등 주류사회와 거리가 먼, 안티히어로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도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성격파 배우가 우리 곁을 떠났다. 스크린을 압도한 배우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긴 세월 동안 그가 바라본 할리우드와 영화 매체는 어땠을까. 생전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 “캔사스주의 농촌 소년이 출세한 거지. (웃음) 내게 할리우드는 든든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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