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그렇죠? 너무 바쁘시죠?
=너무….
그런가요? 너무 힘드신가요?
=너무… 친절한 주인을 만났어요.
대체 얼마나 친절한 주인이기에 그러세요.
=정말 친절하세요. 빚쟁이에 쫓긴 아빠 찾아 서울 왔다 갈 곳 없어 방황하는 저를 하녀로 거둬주셨거든요.
그건 지옥에서 온 식모 이야기 아닙니까?
=어머. 전 식모가 아니에요. 하녀예요. 식모는 밥을 하지만, 저는 밥을 디자인합니다. 오세훈 시장이 서울을 디자인하듯이, 저는 주인집 식구들의 삼시세끼를 디자인하지요. 호호호.
죄송하지만 당분간 ‘오’ 혹은 ‘5’자는 꺼내지 말아주시고요. 하여튼 요즘도 하녀라는 직업이 남아 있긴 하군요.
=그럼요. 하녀는 사라진 적 없어요. 하녀라는 명칭만 없어진 거죠. 일당제 가사도우미는 하녀 아닌가 뭐. 1970년대처럼 주인님. 하녀야. 사모님. 하녀야. 이렇게 불러야 하년가요.
그래도 젊고 고운 분이 하녀일 하기는 좀 안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은이씨는 꿈이 없어요? 왜 버릇없는 부잣집에 들어와 은수저나 닦고 사는 거예요.
=꿈이요? 요즘도 그런 걸 물어보는 사람이 있나. 요새는 초등학생한테도 ‘꿈이 뭐니?’ 이런 건 안 물어봐요. 지금이 무슨 개발도상국 시대도 아니고. 꿈을 가진다고 이루어나지나요.
에이. 그래도 유아교육과도 다니신 적 있고, 경기도에 아파트도 있다는 분이….
=유아교육과 나오면 다 유아교육자 되나요. 경기도 아파트는 은행 대출 빌려서 겨우겨우 산 거예요. 게다가 경기도라고 다 분당이나 수지는 아니에요. 요즘처럼 아파트값 떨어지는 시대에는 그걸로 돈 벌 수도 없죠. 대출금 값느라 허리만 휘어지지.
그래도 뭔가 꿈이 있으니까 아파트도 사고 돈도 모으는 거 아닌가요.
=꿈 되게 좋아하시네요. 대체 그럼 기자님은 꿈이 뭐예요?
전 프랑스에 가서 세르주 갱스부르 같은 샹송 스타가 되어 술과 담배와 마약으로 찌든 황홀한 삶을 누리다가 죽거나, 일본으로 건너가서 엔카 가
수가 되어 떨어지는 벚꽃 아래서 마지막 노래를 부르다가 숨을 거두는 게 꿈입니다.
=그런 말이 <씨네21> 지면에 나오면 쪽팔리지 않으세요?
안 쪽팔립니다. 옆자리의 주성철 기자도 있는데요 뭘. 그나저나 일은 뭐 하실 만하겠군요. 주인도 친절하니.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평소 못 신어보던 힐도 신고요….
나는 하녀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힐 신으라는 그 집 법도도 참 이상하더라. SM인가.
=원래 갑자기 큰돈 만지게 된 한국 졸부 집안 사람들이 다 그렇죠 뭐. 돈으로 유럽의 품격있는 귀족들 따라가려고 열심히 가랑이 찢다 보면 하녀한테 하이힐도 신기고, 된장찌개 대신 스테이크만 먹고, 야밤에 오페라 들으면서 멍때리고, 그러는 법이에요. <삼성을 생각한다> 안 읽어보셨수 기자님은? 게다가 전, 친절한, 너무 친절한 주인집 어른도 좋아요. 그 몸 보셨어요?
그 몸으로 희롱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아유 난 상관없어. 근육이 딱 잡힌 그 몸을 보고 있으면… 있으면….
있으면요?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