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슬픈만큼 행복해진다, <8월의 크리스마스>
2001-12-19

난 허진호가 좋다. 그의 영화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그리고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느낌 좋은 향기가 풀풀 난다. 항상 계절에 거스르며 영화를 개봉하는 그가 아니었던가. 는 늦겨울에, <봄날은 간다>는 초가을에 만날 수 있었다. 늘 그의 작품들 속에는 세월을 기다린 듯한 애잔한 그리움, 몇 방울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다만 인간과 계절에 차이가 있다면 인간이 훨씬 변덕스럽다는 것이고 변덕스러운 만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기억’한다는 것이다. 영원한 면역도 치료방법도 없는 환절기 감기, 사랑이 조금이라도 식을라치면 초라한 호흡들은 어김없이 콜록거린다. 그랬던 이유였을까. 지난번 허 감독과의 인터뷰 스케줄도 그의 독감으로 취소가 되었다. 그리고 몇달 뒤 우연의 일치. 나는 수많은 인파가 북적이는 부산에서 우연히 만난 허진호 감독을 스쳐 보내고 3년 반 만에 옛사랑과 재회했다.

죽은 남자의 목소리, 살아 있는 여자의 미소를 통해 보여준 묘한 판타지. 는 삶의 액셀러레이터를 찾아 헤매던 나에게 오히려 삶의 브레이크로 다가와 인생에 대해 고민하게 하였다. 그뒤 나에게 인생의 명암, 희비의 경계에서도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에게 는 가뭇없이 사라져간 사랑이야기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어느새 가 내 삶 속으로 더 다가와 있다는 것이다. 어느새 나는 영화를 좋아하던 한 사람에서 영화 프로그램을 만드는 PD가 되었다. 스케줄만 맞는다면 허진호 감독을 만날 수도 있고 그의 영화를 방송 프로그램에 맞게 편집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정원의 머리가 날리던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던 그 노래,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의 가수 김창완씨와 함께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대가였을까. 를 함께 보고 나오며 눈물을 훔치던 그 소녀는 이제 없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치는 것일까.

나는 외로움을 안다. 어렸을 적, 개 한 마리 빼고는 집에 아무도 없을 때가 많았다. 혼자 문 열고 들어와서 집에 있는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죄다 열어놓고 시원한 마룻바닥에 드러누워 책을 보곤 했다. 개조차 짖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조용한 집. 마치 내가 관(棺) 속에 누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상에 젖기도 했다. 기형도 시인이 어머니를 기다리던 유년의 윗목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는 유년의 마룻바닥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세상의 희로애락을 예감하던 그 마루 끝의 추억.

그리고 오랫동안 잊혀졌던 그 장면을 허진호 영화들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는 오후,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를 들으며 의 정원이 마루 끝에 앉아 염(殮)하듯이 발톱을 깎고 있었다. 그리고 <봄날은 간다>의 상우도 할머니와 함께 그곳에 앉아 있었다. 어쩌면 마루 끝은 세상의 끝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유한성, 언젠가 닥칠지도 모를 이별이라는 절박함은 사랑을 한없이 욕망하게 하고, 덧없이 사라질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막다른 공간일 게다. 허 감독도 어린 시절 마룻바닥 시원한 집에서 살아보았을까. 마루 끝에서 세상의 냄새를 맡아보았을까.

해마다 2월이면 나만의 밀교 의식처럼 를 본다. 늘 슬픈 만큼 행복해진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느끼며 그래도 나에게 남아 있는 나날들에 눈길을 돌린다. 삶이 고단해질 때면 정원을 깨우던 초등학교 조회소리를 기억해보고 느낌 좋은 사람을 보았을 때는 살짝 정원 쪽으로 우산을 기울이던 다림의 미소를 기억해보고 가족이 아쉬워질 때는 아버지를 위해 리모컨 작동법을 하나씩 써내려가던 정원을 기억한다.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것은 언젠가 추억으로 남는다. 기억하고 있다면.

글: 오정호/ EBS <시네마천국>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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