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방자는 방자가 될 수 없다
2010-07-01
글 : 김태훈 (영화평론가)
김대우 감독의 <음란서생>과 <방자전>을 통해 바라본 이야기와 글쓰기

<방자전>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방자(김주혁)는 통속 소설의 일인자인 색안경(공형진)에게 “저 같은 상놈의 이야기도 소설이 되나요?”라고 질문하며 영화는 그러한 방자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음란서생>에서 양반인 윤서(한석규)가 소설을 썼다면 <방자전>에선 상놈인 방자가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음란서생>과 <방자전>이 같은 맥락에 있으면서도 다른 가장 기본적인 차이다.

소설과 이야기는 다르다. 소설은 고독한 개인의 고독한 집필실에서 만들어진다. 소설은 파편화된 개인이 탄생하는 근대의 한 형상이다. 이야기는 고독하지 않다. 이야기는 공동체에서 만들어지며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상호 소통과 교류 속에서 태어난다. 소설은 어떻게 보면 이야기의 타락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이의 소통에서 오는 경험이 상실되어 버린 사회 속에서 이야기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이야기꾼들은 넓은 세상에서 고독한 방으로 고독한 방에서 프루스트에게 이르면 침대라는 절대 고독의 공간으로 그리고 마지막 공간인 무의식까지 점점 더 자기 안으로 쫓겨간다. 소설이 안을 향한다면 이야기는 밖을 향한다. 이야기는 경험 체계를 간직하고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언어 형식이다.

마노인과 변학도, 좋은 이야기꾼들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항목 중 하나는 반복이다. 반복이 가지는 매혹은 강렬하다. 이야기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사랑방에서의 나른함과 편안함 속에서 듣는 사람은 그러한 권태 속에서 꿈을 꾼다. <음란서생>은 그러한 고독한 개인의 소설이다. 윤서는 당대 최고의 문필가이지만 세상에서 쫓겨나 추월색이라는 가면 뒤로 몸을 숨기며 마지막엔 이마에 낙인까지 찍히며 외딴섬까지 쫓겨난다. 세상 끝에서 홀로 앉아 그는 여전히 소설을 쓴다. <방자전>의 마지막에서 방자는 몽룡과 둘만의 소설을 쓰다가 세상에서 쫓겨나 살아는 있지만 이미 죽어버린 춘향(조여정)을 업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꿈을 꾼다. 그 꿈은 꽃이 핀 마당에 흰 눈을 내리게 하며 그 흰 눈은 거리의 사람들에게 가서 닿는다. 또한 그 꿈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춘향에게 닿고 지금은 얼음 속에 묻혀버렸지만 둘의 사랑을 싹트게 했던 그리고 여전히 춘향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춘향의 신발에 가닿는다. 방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밖을 향해 뻗어나가며 고전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매혹을 주지만 여전히 전작의 맥락 속에서 더 뻗어나가지 못한다. <방자전>의 이야기가 미담, 즉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아름다운이란 가치가 들어가면 권력과 정치가 개입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감독의 화두는 여전히 <방자전>에 녹아든다.

신분과 계급은 <방자전>을 이끄는 추동력이다. 영화는 상놈인 방자가 양반인 색안경에게 말을 놓는 문제부터 시작하며 색안경이 방자에게 말하는 “어떻게 양반의 여자를”로 마무리된다. 또한 권력에 대한 인간 군상의 욕망은 <방자전>에 가득하다. 방자는 몽룡을 꺾고 춘향을 차지하기 위해 마노인에게 기술을 배우며 양반들이 한다는 서서하는 체위를 따라한다. 몽룡은 힘세고 수영 잘하는 방자를 경계하지만 춘향을 차지하자 바로 춘향을 버린다. 그리고 어사가 된 뒤 더 높은 권력을 위한 미담을 만들기 위해 춘향을 다시 이용한다. 춘향은 몽룡을 통한 신분상승이 실패하자 방자를 가까이 하지만 다시 몽룡을 이용한다. <방자전>에서 이러한 계급과 권력은 이야기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며 이야기는 계급과 권력의 매개체가 된다. <음란서생>의 윤서처럼 <방자전>에서 소설을 쓰는 색안경은 양반이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놈인 방자이며 양반인 몽룡은 이야기를 만든다. 하지만 방자는 이야기를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 방자는 억울한 하인의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포기한다. 색안경이 왜 그렇게 하냐고 묻자 방자는 “이루지 못한 것이니 이루게 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는 것은 춘향의 욕망이 아니라 방자의 욕망이다. 방자는 춘향과 사랑했던 이야기를 몽룡의 이름을 빌려서 소설 <춘향전>의 주인공이 되며 신분상승한다. 방자의 욕망에 방자의 이야기는 뻗어나가지 못하고 또 다른 몽룡이 되어 이야기를 만든다.

권력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원한다. 암행어사의 임무 중 하나가 미담을 찾는 일이라는 설정은 흥미롭다. 이는 또한 정치의 심미화, 예술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가장 자연스럽게 대중에게 내면화하기 위해서는 심미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미담을 찾는 과정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예술의 존재를 역설한다. 정치의 예술화, 심미화를 폭로하는 방법은 심미적인 것, 예술의 정치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이 정치적 에너지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부정되는 것이다. 심미적인 것의 허구와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붕괴시키는 것이며 예술을 없애는 것이다. 방자의 이야기는 밖을 향해 뻗어나가지만 방자는 색안경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달라고 한다. <방자전>은 미담 속에 숨겨진 추한 현실을 폭로하지만 다시 미담으로 복귀한다. 방자의 꿈은 힘을 갖지 못하고 춘향과의 로맨스에 묻힌다. <음란서생>이 거칠지만 집요했다면 <방자전>은 전작을 뛰어넘는 시도를 보여주지만 탄력을 못 받고 벽을 넘지 못한다. <방자전>은 오히려 주변의 캐릭터들에 의해 풍성해진다. 마노인(오달수)이나 변학도(송새벽)는 이야기를 만들려거나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는 정보에 그칠 뿐이다. 이야기의 매혹은 설명하지 않는 데에 있다. 우리는 좋은 이야기꾼에게서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내용을 듣는 게 아니라 이야기 잘하는 법을 듣는다. 내용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아우라를 듣는 것이다. 마노인과 변학도는 좋은 이야기꾼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듣는 기쁨을 준다. 듣는 능력이란 인간의 모방 능력을 깨우는 것이며 거기에 이야기의 매력이 있는 것이다. 몽룡과 춘향과 방자가 소설을 쓸 때 마노인과 변학도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한다. 방자의 이야기가 입에서 글로 소설이 되며 신체에서 점점 멀어질 때 마노인과 변학도의 신체는 우리에게 직접 이야기한다. 이야기꾼은 그들이며 그들이 <방자전>에서의 방자이다.

방자가 몽룡이 되고…

<음란서생>에서 윤서가 음란한 서생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방자전>에서도 방자는 방자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작가를 직접 영화에 등장시켜 창작의 행위와 과정을 보여주는 감독의 화두와 고뇌에 맞닿아 있다. 영화 속 작가는 끊임없이 작품에 개입하며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고 오염시키며 분열된다. 글쓰기는 주체가 끊임없이 사라지는 공간의 열림을 만든다. 윤서는 윤서와 추월색으로 분열되며 방자는 몽룡과 방자로 분열된다. 거울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지만 통합될 수 없는 나이기에 낯설고 그렇기에 파괴할 수밖에 없다. 공격과 사랑은 양가적이다. 방자의 이야기 속 방자와 몽룡은 서로를 공격하지만 모방하고 닮아가며 나중에 방자는 몽룡이 된다. 글쓰기는 자신이 받아들인 규칙을 언제나 위반하고 전도하며 죽음과 맞닿는다. 따라서 방자는 방자가 될 수 없다. <방자전>은 <음란서생>에서 던졌던 감독의 화두를 이어받으며 글쓰기의 범주에서 이야기의 범주로 확장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한 소통의 노력은 양반의 소설에서 평민의 이야기로 옮겨가면서 주변 인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고 감독의 상상력과 재치는 그러한 캐릭터와 잘 맞아떨어져 그들을 좋은 이야기꾼으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방자전>은 스토리와 구조적 완성도보다는 캐릭터의 비중이 더 큰 영화가 되었다. <방자전>의 시도가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든 그는 관객에게 듣는 기쁨을 줄 수 있는 좋은 이야기꾼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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