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장동건의 얼굴이 훤하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진상은 이렇다. 그는 지난 9월 이후로 쭈욱 놀고 있다. 집에서 <스타크래프트>도 하고, 하루 두편씩 비디오도 챙겨 보면서, 꿀 같은 휴가를 즐기고 있다. 얼마 만인가 하면, 98년 이후로 처음이다. 에이, 뭔가 물밑 작업이라도 하고 있겠지, 싶었지만, 연신 손사래를 친다. 시나리오 사절이라고. 당장 하고 싶은 작품이 안 떠오르는 걸 보면, 그동안 너무 강행군했고 심신이 지쳐 있는 것 같다고. 푸욱 더 쉬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한다. 일리가 있다.
훤해진 얼굴만이 아니라, 그는 많이 달라져 있다. 수줍은 미소와 우수어린 눈빛으로 범아시아 소녀들을 사로잡던, 예전의 그 장동건이 아니다. 진지하고 조용한 건 여전하지만, 농담도 하고 크게 웃기도 한다.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 몇점이 말끔히 걷힌 것처럼 보인다. 한결 여유도 있어지고, 다부져진 것 같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대뜸 알랭 들롱 얘길 꺼낸다. 알랭 들롱이 그랬대요. 눈빛이 그 사람의 마음을 담는다고. 그러니까 장동건이라는 사람의 내면이 달라졌으니, 눈빛도 당연히 달라진 거라는 얘기구나, 혼자 정리하고 있는데, 전에는 내성적이고 낯가림도 심하고 했는데, 이젠 안 그렇다고, 우수도 점점 사라진다고, 옆에서 부연 설명을 날린다. 그러다 소녀팬들 다 떨어져나가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장동건은 대답 대신 하하하 호방하게 웃어 보인다. 아니, 저 웃음의 의미는 뭐지? 그래도 상관없다는 뜻일까, 그럴 리 없다는 뜻일까.
변화의 기점을 <친구>로 잡아봤더니, 장동건도 얼른 동의한다. 그러니까 그게, 건방떠는 느낌이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의 자신감이거든요. 그런 게 생긴 것 같아요. <친구>를 개봉하던 무렵부터 의 촬영장에서 장동건은 훨훨 날았다. 그 자신도 모르고 있었는데, 상대 배우인 나카무라 도루가 먼저 그러더란다. 동건씨 달라졌다고. 전에는 다른 연기를 보여준다는 데 대한 두려움이 많았는데, 그게 받아들여진다는 걸 체감하고 나니, 무의식중에 자신감이 생겨버린 모양이라고, 그도 받아들이게 됐다. 그래서 이런저런 의견도 많이 내게 됐고, 그러면서 연기에도 힘이 붙더라고. 의 촬영이 늦어지지 않았다면, <친구>의 동수는 다른 누군가가 했을 역할. 탐이 많이 났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스케줄이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촬영이 늦어져서, 두 작품 다 하게 됐다며, 씨익 웃어 보인다. 그렇게 <친구>의 동수가 됐을 때 장동건은 기존의 장동건을 완전히 버리려고 했단다. 그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고마 해라, 많이 무따”가 장안의 화제가 됐던 일이나, 기록적인 관객 동원을 했던 일보다, 그에겐 더 값진 성취.
그러니까 는 장동건이 <친구> 이전에 합류한 작품이다. 선뜻 결정한 건 아니었다. SF 액션이 이 땅에서 그럴듯하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솔직히 했다. 그런데 자꾸 보니 시나리오에 이야기가 살아 있고, 이런 규모, 이런 시스템의 영화를 한번쯤은 경험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더란다. <친구>는 연기 폭 넓혀보자는 개인적인 욕심에서 출연했지만, 이 영화는 사람들이 재밌어 하고 많이 보길 바라는 맘에서 출연하게 됐다고도 했다. 그가 연기한 사카모토는 2009년 일본 땅이 돼버린 서울에서 활약하는 한인 출신 특수수사요원. 장동건이 이 캐릭터는 아주 장동건적으로 소화했다고 말한다. 그게 뭔데요, 했더니, 폼 무지하게 잡는 거죠, 한다. 그러더니 아버지의 부재, 정체성의 혼란, 거대 음모와 대적하는 외로움을, 그의 장기인 ‘그늘’ 연기로 표현했다는 해설을 덧붙인다. 촬영하는 동안 그의 아이디어를 정성껏 수렴하던 이시명 감독과는 호형호제할 만큼 친해졌고, 쫑파티 끝나고 사흘간 앓고 나니까, 다시 현장이 그립고, 하루에 한신만 찍었으면, 싶더란다.
궁금한 게 있었다. 멜로영화의 단골이던 장동건이 왜 갑자기 남자영화 전문배우가 됐을까.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아나키스트> <친구> 그리고 까지. 장동건은 남자들의 세계, 남자영화, 그런 거 되게 좋아하는 것 같다. 의도한 건 아닌데, 그런 모양이라고, 장동건도 애매하게 긍정한다. 그러더니 멜로도 하고 싶긴 한데, 예쁜 팬시 멜로말고, <봄날은 간다>처럼 연애 감정이 살아 있는 영화가 하고 싶다고, 퇴로를 연다. 멜로는요, 나이 들고, 경험도 많이 한 다음에, 그때 해야죠. 그래야 <뉴욕의 가을>의 리처드 기어 같은 ‘간지’가 나오죠. 가만 있자, 리처드 기어가 나이 오십이 넘었으니까, 그렇다면 이건 향후 20년 동안 멜로는 않겠다는 폭탄 선언? 아무튼 지켜볼 일이다. 인터뷰 현장에 놀러온 인디컴의 김재용 실장이 전날 밤 이시명 감독과 와인바에서 회동했다고 하자, 장동건이 약간 섭섭한 표정을 짓는다. 장동건은 금방이라도 어제의 용사들과 다시 뭉칠 태세다. 빨리 인터뷰를 끝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