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점프를 하다>는 분명 ‘하나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지만, ‘세명의 배우’로 인해 비로소 완성된 영화다. 영화의 2/3 이상에 얼굴을 비추지만 예고편에서도, 포스터에서도 이름 석자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던 신인 여현수(19). 이병헌과 이은주의 달콤한 멜로를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간 관객은 그의 등장에 영화 속 인우만큼이나 당황하게 된다. 옛 연인이 열일곱 남자고등학생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설정이 영화를 푸는 열쇠이다보니 여현수의 존재는 다른 주인공들에 ‘가려졌다’기보다 ‘감추어졌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싶다. 얼핏 보이는 여현수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둘러앉은 이목구비며 고운 선은 아직 세상을 모르는 소년 같지만, 185cm의 큰키에 스노보드를 비롯한 각종 레포츠로 다져진 몸은 성숙한 사내처럼 단단하다. 하지만 그의 이런 불균형은 영화 속에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현빈이란 역은 전생의 태희를 품을 만큼 섬세함이 요구되는 동시에 ‘매력적인 동성연인’보다는 ‘건강한 고등학생’의 느낌을 주어 혹시 있을 거부감을 줄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억세게 운좋은 놈이죠.” 여현수는 스스로를 그렇게 평했다. 35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방송사 탤런트 공채에 합격했을 때도, 공개오디션을 통해 <번지…>의 임현빈 역을 따냈을 때도, 촬영중에 친 수능시험에서 기대 이상의 점수을 얻어 대학입학 자격을 얻었을 때도, 모두 그 운이란 놈이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거라고. 하지만 <번지…>의 촬영은 운만으로는 진행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처음 찍는 영화라 정신없었던 초반은 그저 “지금 내 모습 그대로” 연기하면 됐지만 얽힌 인연을 풀어나가기 시작하는 후반부터는 영 쉽지 않았다. “감독님도 답답하셨나봐요.” 농구장에서 현빈이 인우에게 독기어린 눈으로 소리지르는 장면을 찍을 때 그간 늘 삼촌같이 연기를 도와주던 김대승 감독이 “지금 너 때문에 이 많은 스탭들이 밤을 새워 일하는 게 안 보이냐”며 불호령을 내린 것. 스탭들은 “저거, <춘향뎐>할 때 임권택 감독님 대사 아니야” 하며 웃음을 머금기도 했지만 여현수에게는 “여기가 한계인가”할 만큼 심각한 순간이었다. “밥도 안 먹고 구석에 혼자 처박혀 있었어요. 뭘 잘못했나. 어떤 감정상태일까를 계속 생각했죠.” 그리고 다시 들어간 촬영. “감독님 말씀에 따르면 그때 제 눈빛이 달라졌다고 하시더라구요.” 실로 오디션을 막 통과했을 때와 비교해보면, 촬영을 끝낸 여현수의 얼굴은 살이 많이 내렸을 뿐 아니라 한편의 영화를 통해 부쩍 성숙해진 느낌이다.
“진짜 까다로운 놈이죠.” 친구를 사귀더라도 우르르 패거리를 이루기 보다는 “맘맞는 한명과 깊게 사귄다”는 여현수는 틈만 나면 스키장으로 달려가고, 집에 있을 땐 케빈 베이컨이 나오는 비디오를 보거나, 얼마 전부터 식구가 된 강아지 ‘번지’와 놀아주는 게 낙이다. “80년대 사랑이 더 좋아보여요. 조금 유치하긴 해도 아늑하잖아요. 요즘엔 만나서 술먹고 노래방 가는 게 다지만, 그땐 낭만적인 뭔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얼마 뒤면 세종대 영화예술학과에 입학할 예비새내기 여현수의 조그마한 소원 하나. 오는 봄엔 인우와 태희가 나누었던 사랑 같은 “진짜 사랑”을 만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