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설마 이게 꿈은 아니겠죠?” 새벽 2시. 소년은 자고 있는 부모를 흔들어 깨운다. 그리고 캐스팅소식을 알리는 지난밤의 전화가 꿈인지 생시인지를 묻는다. “꿈이 아니란다. 대니얼, 넌 이제 해리 포터야.” 계단 아래 비탈진 벽장에서 살아가던 천덕꾸러기 소년, 모래로 그린 생일케이크에 소원을 빌던 슬픈 운명의 해리 포터에게 ‘님부스2000’ 같은 최신형 요술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신나는 호그와트 마법학교로의 초대장이 이만큼 기뻤을까? 다섯살 때부터 연기자의 꿈을 접은 적이 없었던 11살 소년 대니얼 래드클리프에게, 셀 수도 없이 많은 소년들이 오디션을 거쳐나가고 쟁쟁한 할리우드 아역배우까지 물망에 올랐던 해리 포터의 동그란 안경테가 자신의 차지가 되었다는 소식은 그만큼 쉽게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1989년 7월31일 런던. 마치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는 듯, <해리 포터>의 원작자 조앤 롤링과 같은날 태어난 대니얼은 부모의 ‘치맛바람’으로 배우가 된 여느 아역배우들과는 달랐다. “난 늘 혼자 연기자를 꿈꾸었고, 친구들은 <올리버 트위스트>의 오디션을 보라고 부추기기도 했어요. 하지만 엄마, 아빠는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말했죠.” 그러나 폴라로이드로 찍은 사진으로 래드클리프가 드라마 <데이비드 커퍼필드>에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부모는 아들의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마법사의 피가 흐르는 조카의 운명을 우편함을 막거나 이사가는 것으로는 막아낼 수 없었던 해리 포터의 이모와 숙부처럼.
그러던 어느날, <스톤즈 인 히즈 포켓스>란 연극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래드클리프 가족의 앞줄에는 우연히도 부모와 알고 지내던 <해리 포터…>의 프로듀서 데이비드 헤이먼과 시나리오작가 스티븐 클로브스가 앉아 있었다. 오디션을 보지 않겠냐는 그들의 제의에 아버지는 “네가 원한다면 스튜디오에 놀러가서 아저씨들하고 점심이나 먹겠니?”하고 물었다. “난 내 친구 알렉스 버그만처럼 <해리 포터>의 광팬은 아니었지만 너무 기뻤어요. 스튜디오로 놀러가 점심을 먹으면서 그들이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세트 짓는 것을 구경했는데 정말 굉장하던걸요.” 그렇게 래드클리프가 3번째 스크린 테스트를 마친 다음날,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목욕중이었는데 아빠가 욕실 안으로 불쑥 들어와서 내가 해리 포터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나는 너무 기뻐서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어요.”
11살에 캐스팅되어 12살에 영화를 찍고 이제 13살이 되기를 기다리는 소년은 이미 런던 킹스 크로스역의 9와 3/4 플랫폼에서 호그와트로 가는 두 번째 기차에 올랐다. 그동안 키가 2인치나 자랐고, 목소리는 조금씩 낮아지는 변성기를 맞이했으며, 두 번째 해리 포터 시리즈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방>에서는 전편 출연료의 30배에 가까운 300만달러의 개런티를 받는 비싼 배우가 되었다. 세계의 어린이들은 해리와 그를 동일시하며 그의 더벅한 바가지머리 스타일을 주문하고, 동그란 안경테를 사달라고 부모를 조른다. 얼마 전 할리우드 여기자협회에서 수여하는 황금사과상 신인남우상을 수상하면서 그가 단순히 ‘아역’배우가 아님을 입증해 보이기도 했다. 물론 래드클리프가 17살, 18살이 되어 6번째, 7번째 해리 포터로 호그와트 익스프레스의 마일리지를 올릴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007 시리즈의 숀 코너리가 그렇듯, 대니얼 래드클리프는 언제까지나 우리의 ‘첫 번째 해리 포터’란 사실엔 변함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