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분석 방법을 빌려 말한다면, 상당한 장르적 세련미를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영화 안에서는 장르에 대한 일종의 물신숭배 경향이 보인다. 권영철의 <나쁜 놈이 더 잘 잔다>와 우민호의 <파괴된 사나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도 초청된 장철수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장르를 다루는 방법적 다기성과 의식변화를 요연하게 관찰 수 있는 사례들이다. 이들 영화를 일람하면서 신인 감독들의 장르 경도 현상 안에 어떤 결정적인 동기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장르를 요리하는 감독의 선택이 얼마나 창조적인가 하는 문제는 한 시대 대중영화의 잠재력과 관련해 큰 의미가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대중영화가 장르와의 겨루기를 통해 진전을 거듭해왔음(박찬욱과 봉준호, 류승완, 최동훈, 나홍진)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위의 세 영화는 다채롭게 변화하는 장르영화의 역동성을 현실태와 잠재태의 두 측면으로 살피도록 한다. 장르와의 대결을 꿈꾸는 감독은 그 속성상 장르가 제공하는 쾌락의 한결같음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무심히 탈주하려는 욕망을 한몸에 소지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뉴페이스의 출현은 기왕에 축적된 관습 위에 보태는 새로운 개척, 예상 가능한 기대 수준을 넘어서는 확장된 지평을 점치게 한다. 이같은 울창한 신생의 욕망에 비춰 장르에 대한 물신화라는 최신의 경향을 살필 필요가 있을 듯하다.
페티시즘의 충동
<나쁜 놈이 더 잘 잔다>(이하 <나쁜 놈>)의 권영철은 장르 페티시즘의 충동을 숨길 기색이 없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평판작에서 제목을 빌려온 이 영화는 밑바닥 인생의 지리멸렬과 불운을 출구가 없는 진흙탕 싸움으로 묘사하는 것이나 순행과 역행을 거듭하는 시간구조를 취한 서사 전략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을 참조하고 있다. 주인공 윤성(김흥수)이 피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비척거리는 도입부 자동차 사고 장면은 <저수지의 개들>의 첫 장면에 바치는 오마주이며, 서로 등쳐먹기 위해 혈안이 된 세 친구의 물고 물리는 관계로 이어지는 먹이사슬 역시 타란티노에 대한 과잉 동일시를 보여준다. 되는 대로 사는 극중 삼류 인생들이 거사를 결행하는 중차대한 순간 검정색 슈트로 멋을 내려는 것처럼 장르 규범에 대한 물신적 동일시로 귀결되는 이 의도된 허영기는 스스로를 장르 안에 가두려는 욕망으로 보일 정도다.
장르영화에 전폭적인 애정을 피력하는 권영철 감독은 장르와 협상하거나 대결하기보다 장르 관습에 대한 동일시의 방식을 택한다. 이는 정면으로 그것에 맞섬으로써 영화의 내적 동력을 구하는 여타의 접근법과는 다른 태도로 보이는데, <나쁜 놈>의 화면요소 운용과 미장센에서 확인되는 장르 페티시즘의 흔적으로부터 이를 유추할 수 있다. 한 공간을 여럿으로 쪼개는 화면분할이나 가속편집, 점프컷, 공간의 왜곡을 극대화하는 와이드 앵글 화면은 형식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기보다 스타일상으로 확립된 장르의 클리셰에 가깝다. 애교 수준을 넘어서는 <나쁜 놈>의 장르 숭배 징후는 서사에서 확인된다. 흡사 장르 캐릭터에 대한 물신화라고 해도 좋을 이 영화의 인물 구성이 문제시되는 것은 서사의 밀도와 그것이 반목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어린 두 동생을 건사하면서 캐나다 이민을 준비하는 청년 윤성과 연예인이 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여동생 해경(조안), 교도소에 수감 중인 아버지, 다혈질 포르노 배우 친구 종길(오태경),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제비 친구 영조(서장원), 그리고 에로비디오 프로덕션 사장이자 전직 장물아비인 이감독(최덕문)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이 다채롭고 현란한 캐릭터의 면모는 범죄 누아르의 인물 구성을 따르는데, 저들의 활달한 행동반경에 비해 각 인물들을 이어주는 연결의 끈은 헐겁다. <씨네21> 760호에서 김영진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이는 ‘현실의 기운을 담아낸 것이라기보다 장르영화의 관습을 따르려는’ 의도의 산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는 체계화된 장르 관습을 소비한다는 쾌락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상투화된 장르의 관습이 서사와 조응하지 못하면서 배태된 이물감에 가깝다. <나쁜 놈>의 서사는 마치 견본을 골라 내놓은 진열대처럼 전형적인 좌절과 체념의 인물들을 한데 모아놓고 그들을 연결시키는 이야기를 구상한 느낌마저 준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실존적 파괴 충동에 이끌려 총을 들고 설치는 청년들의 무망함과 자학적인 파멸로 응어리진 이야기는 차곡차곡 쌓이는 감정의 축적없이 표면 위에서 비약한다.
장르 관습에 대한 물신 숭배의 징후로 보이는 이런 특징들은 서사 요소들간의 긴밀한 연결의 문제(<파괴된 사나이>와 대조되는 측면)라기보다 서사 구조의 부재라는 측면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물론 범죄 장르가 닫힌 세계의 서사라는 점에서 이같은 비약과 클리셰는 장르 안에서 어느 정도 용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구성된 세계를 병풍으로 삼아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장르 서사는 전범화된 캐릭터들의 반복 재생산에 일말의 거리낌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대할 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서사 공간의 구멍과 비약이 아니라 이야기를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간의 내적 관계이다.
장르 복제 시대의 영화
그런 의미에서 우민호의 <파괴된 사나이>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개봉 전 이 영화에 내려진 사전 평가들은 가혹한 측면이 없지 않은데, 많은 이들이 지적한 것처럼 <추격자>와 <그놈 목소리> <체인질링> 등 일련의 유괴영화들을 적극적으로 참조한 안이한 짜깁기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파괴된 사나이>는 내러티브 구성요소들이 활달한 상호작용으로 엮이면서 서사를 전진시킨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명약관화한 오리지널리티의 부재, 작위적인 구성, 절망과 전율로 얼룩진 잔혹한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동원된 억지 설정이 빈발하지만 끝까지 이야기를 따라가게 만드는 연출의 완력이 느껴진다. 극단화된 폭력 묘사나 어설픈 기가 가시지 않은 범람하는 감정들, 사건의 실마리에 대한 비논리적 추정, 익숙한 경로를 거슬러 밟아가는 드라마의 진부함 역시 범죄 장르의 닫힌 구조라는 차원에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가지 평가할 만한 지점에도 불구하고 <파괴된 사나이> 역시 창조적인 장르 응용의 사례라고 하기에는 주저된다. <나쁜 놈>에서 뚜렷했던 서사의 돌출과 비약은 여기서도 확인되나 되레 이 영화의 허물은 대중의 무반성적인 기대와 취향에 편승하기 위해 열린 장르가 행할 수 있는 대담한 모험을 회피한다는 데 있다. 서사 논리의 빈곤함보다 문제는 캐릭터나 정황 묘사의 극단성인데, 건실한 목사에서 퇴락한 협잡꾼으로 변하는 주영수(김명민)의 진화라든지 고매한 취향의 클래식 마니아와 살인귀를 오가는 최병철(엄기준)의 성격화는 좀체 동의할 수 있는 구석을 찾을 수 없다. 내러티브 전개에 필요한 요소만 간추려 요약 제시하는 방법론을 취택한 이 영화의 서사 전략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캐릭터 설정은 가볍지 않은 흠결로 보인다.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8년 동안 주영수에게 험악했을 삶의 행장기에 대한 묘사는 거리낌없이 생략된다. 마치 부조리한 운명에 사로잡힌 인간의 가련함을 시험하는 신의 시선을 밑그림으로 간 것처럼 흘러가는 초반부 진행이 중반 이후 붕 떠버리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한 인간의 파란 많은 생애를 집약적으로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이것은 해결되지 않는 잉여로 남을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파괴된 사나이>가 가장 깊이 참조하고 있는 나홍진의 <추격자>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잉여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긴박한 추격전의 와중에 끼어드는 서울 시장의 에피소드나 살인마 지영민(하정우)의 광기를 벽지에 그린 그로테스크한 그림과 결부시키는 대목 등이 그러하다. <추격자>에서 이런 결함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이유는 의미있는 장면 연출과 사건의 요약적인 제시를 박진감있게 교차해나가면서 능률과 속도를 획득하는 비상한 조절 능력 때문이다. 문체의 속도감이라는 측면에서 <파괴된 사나이>도 세심히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만 하루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어두운 현실에 대한 비애와 무망함을 끌어내는 <추격자>의 정서적 환기력에 필적하지는 못한다.
자기 고백의 나르시시즘
위의 두 영화에 비해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하 <김복남>)은 조금 다른 층위에 놓여 있다. <김복남>은 계획된 장르 위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기보다 텍스트에 대한 자의식이 장르 위에 부려진 이야기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외딴섬 무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피비린내 나는 살인극을 다룬 <김복남>은 제도화된 원시사회의 폭력성에서 오는 공포와 타인의 불행에 냉담한 인간의 이기가 야기한 불안을 교묘하게 이어붙여 영화의 뼈대를 완성하고 있다. 핏빛으로 뒤덮인 광란과 살육의 세계에 대한 축도를 작은 섬마을 안에 그려내면서, <김복남>은 야생의 공기가 장악한 고립된 섬에서 벌어지는 섬뜩한 생존게임을 경유해 한국 공포영화에 고유한 원한의 복수극으로 이행하고 있다. 모두에게 핍박받던 무지렁이 시골 아낙이 원녀로 둔갑하는 중반 이후 영화는 고어적 재현의 퍼레이드로 표정을 바꾼다. 그 살풍경한 이미지의 충격 탓에 하드고어 공포영화의 도상적 쾌감에 도취된 장르 연출가의 모험으로 보이지만 <김복남>은 장르에 대한 숭배보다 냉혹한 세계의 논리에 의해 말소된 인간성이라는 테마에 도달하기 위해 원시적 폭력을 선명하게 전시하는 쪽에 해당한다.
매끈한 장르 연출가의 솜씨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이 영화 역시 서사의 비약과 표현 수위에 있어서의 과잉이 두드러진다. 한 인간에 대한 동물적 충동에 가까운 이 영화의 가학적 표현들에 선뜻 동의하기는 힘들다. 짐승과 진배없이 묘사되는 섬의 남자들이나 답답하리만치 굴종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하는 복남(서영희)의 무구함은 종종 할 말을 잊게 만든다. 순박한 희생자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끝에 서슬 퍼런 원한의 화신으로 둔갑하는 복남의 캐릭터 변화도 따라서 비약적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장면마다 극단적인 몽타주를 즐겨 사용하는 장철수는 현란하고 속도감 넘치는 편집으로 이미지의 밀도를 포화상태로 밀어붙이거나, 종종 불안정한 앵글과 극단적인 명암의 대비를 통해 표현주의적인 긴장을 조성하는 데 성공한다. 무엇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김복남>의 성취는 서사의 폭발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끈기있게 장르 관습의 작동을 유보시킨다는 점이다. 서서히 달궈지는 군불처럼 은근히 감정의 온도를 높여가면서 마침내 비등점에 이르러 품 안에 감춰진 비수를 꺼내는 방식이다. 지나친 자의식의 발로 때문인지 공감의 폭을 좁히는 묘사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새로운 장르적 언술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이쪽이 더 흥미롭다.
기성 장르에 대한 과잉 동일시 위에 부려진 장르 페티시즘의 경향은 긍정적인 측면보다 부정적인 측면이 많다. 지난 10년간 상당한 폭으로 변모해온 장르영화의 진전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다. 장르영화는 왜 즐길 만한가? 라는 질문에 대한 근원적인 대답을 유보한 채 장르 자체가 나르시시즘의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풍요한 취향의 깊이를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얕은 적응력이 빚어낸 이같은 현상은 장르의 쾌락을 담보하지 못한다. 카피든 페티시즘이든 오마주든 장르 시스템 안에서 모방과 복제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다. 근심스러운 것은 장르의 관습이 재생되는 동안 그 반성적 에너지는 점차 소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명료한 장르의 규범이 존재한다면 그 위에 새로운 양식을 덧입히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 모방으로 진입한 장르 감독들의 고백적 어조는 일정한 노쇠의 기미마저 보이고 있다. 이때 영화감독은 새로운 형식을 탐색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목소리에 매혹된 자처럼 보인다. 장르라는 양식도 그 규범의 퇴영과 함께 회의의 대상이 된다. 지금 장르에 경도된 대부분의 젊은 감독들은 이 회의의 방법론을 찾지 못했거나 장르의 진가를 자신의 것으로 접수하지 못한 채 소화불량에 걸린 속류의 인상을 남긴다. 장르영화가 새로운 서사와 미학이 잉태되는 창조적 캔버스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완성된 장르 규칙의 완벽한 재현이거나 이에 대한 역착상으로 말미암아 장르와의 정면 대결에 성공했을 때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자세를 취한다면 장르는 창조적 놀이터가 아니라 헤어나오기 힘든 감옥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