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뒤 친구들과의 수다 한판, 밤새 보는 심야영화, 일요일 오후까지 늘어지게 늦잠 자기…. 내가 영화를 하면서 가장 그리워하는 것들이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겠지만, 내게는 특별한 일이다. 누군가가 못하게 해서가 아니다. 정해진 스케줄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직업에 대해 회의감을 들게 하며, 매일같이 ‘행복해지고 싶다’를 되뇌게 한다.
이번 <악마를 보았다> 촬영 때 역시 내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생일도 현장에서 일하며 지나쳐야 했고, 부모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셨고, 남자친구에게 수없이 섭섭함을 안겨주었고, 친구들의 결혼식 사진에는 늘 나만 없다. 이런 생활의 반복 때문에 이것이 그렇게 바라고 꿈꿔왔던 미술감독이 되는 일이었나 회의에 빠진다. 현장이란 곳이 지긋지긋해지고, 나는 왜 남들과 다른 삶을 선택했으며,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등 매일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사무실과 현장을 반복하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던 5개월의 촬영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젠 정말 한없이 잠도 잘 수 있고 아름다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뿐이다.
드디어 ‘쫑’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정말 끝났다. 짜릿함과 시원함이 가득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섭섭함은 무엇일까. 정말 뒤도 안 돌아보게 시원할 줄 알았는데 만감이 교차하고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항상 영화를 시작할 때면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해 지치지만 끝나고 나면 현장의 생동감을 그리워하고 추억한다. 이러한 것들이 내가 영화를 하게 하는 이유이고 견딜 수 있는 힘인가 보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 현장인데 내게 <악마를 보았다>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지금 서 있는 영화현장이 나에게 주는 진정한 행복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다시 난 현장 속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