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진중권의 아이콘] <인셉션>의 철학
2010-08-27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의식의 담론과 무의식의 담론

이게 다 ‘인셉션’이라는 개념 때문이다. 혹시 지각(perception)이나 통각(apperception)처럼 뭔가 쓸 만한 개념을 얻지 않을까 해서 영화관을 찾았으나, 그 기대는 과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약물을 이용해 남의 꿈에 들어간다는 발상은 <매트릭스>의 뇌 과학적 버전일 뿐이고, 불쑥 스토리의 중간부터 시작하는 미디아스 인 레스(medias in res) 기법은 이미 오래전에 고전이 된 서사전략이다. 특히 팽이가 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 상투적인 나머지 객석의 에어컨이 잉여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지루함을 덜어준 것은 영화의 중층적 구조(꿈속의 꿈속의 꿈). 그것이 그나마 관객에게 서사를 재구성하는 지적 재미를 안겨준다. 몇 가지 세부가 끝내 이해되지 않고 남는다는 점을 빼면, 서사가 밖에서 들었던 것만큼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았다. <메멘토>의 탁월한 서사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서사가 그 외견상의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외려 매우 단순하다고 느낄 것이다. 한마디로, <인셉션>은 꽤 잘 짜인 영화이긴 하지만, 미학적 혹은 철학적으로 그리 인상적인 작품이라 할 수는 없다.

은밀한 영역을 몰래 엿보는 꿈은 살다가 누구나 한번쯤 가져봤을 것이다. 그 은밀한 곳은 법적, 도덕적으로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곳일 수도 있지만, 아예 논리적, 물리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곳일 수도 있다. 가령 똑같이 ‘프라이버시’를 침범한다 해도, 남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법적, 도덕적 금지에 속하나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물리적, 논리적 불가능에 속한다. 둘은 다르다. 나를 영화관으로 이끈 것은 후자, 즉 급진적 의미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는 모티브에 대한 철학적 호기심이었다.

창 없는 단자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인간정신의 특징을 급진적 프라이버시로 규정해왔다. 가령 라이프니츠를 생각해보자. 단자(monad)란 거칠게 말하면 개별자의 의식, 혹은 영혼을 가리킨다. 그는 인간의 영혼, 의식에는 ‘창이 없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열어 그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다른 이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세계의 표상(관념)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과 똑같은지 확인할 길은 없다. 따라서 내가 다른 이들과 동일한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확신할 근거도 없다. 그뿐인가?

좀비들 세상에 혹시 나 혼자만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다(실제로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는 ‘나 혼자만 의식을 갖고 있고 타인은 의식없는 자동인형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진지하게 논리적으로 검토해본 적이 있다). 이 난점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해석은 이른바 ‘예정조화설’, 즉 신이 단자들을 창조할 때 그 각각에 동일한 세계의 표상을 미리 심어놓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애초에 각 단자들 머릿속에 든 표상이 일치하도록 신이 미리 프로그래밍을 해놨다는 얘기다.

‘들여다봄’ 없이도 우리가 세계를 공유하며 타인과 소통하는 것은 순전히 이 때문이다. 각 개인은 창 없는 단자지만,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신의 프로그래밍에 따라 저절로 조율된다(‘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가설은 이 예정조화설의 경제학적 버전이리라). 이 가설의 문제는 최초의 프로그래머, 즉 신을 가정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신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경험론자들은 여기서 회의주의로 달려간다. 같은 언어로 같은 세계에 대해 얘기한다 해도, 우리는 실은 각자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꿈의 디자이너

어지러움은 세계에 대한 이 두 대립되는 관념- 합리주의적 독단론과 경험주의적 회의론- 이 영화 속에 뒤섞여 있는 데서 온다. 꿈은 항상 그 ‘누군가’의 꿈. 그것은 회의주의자들의 세계를 닮았다. 영화의 인물들은 항상 그 ‘누군가’의 꿈에 들어간다(토템은 그들이 누구의 꿈에 있는지 말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그 꿈을 다른 이와 공유한다. 그들은 각자 제 꿈을 꾸나, 그 꿈들은 그 누군가의 꿈속에서 객관적으로 수렴된다. 이는 합리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세계다. 물론 여기서 이 예정조화를 프로그래밍하는 것은 신이 아닌 인간이다.

이 어색함 외에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뒤섞어놓은 것도 영화의 철학적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사실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는 급진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프로이트를 통해 응축과 전이라는 꿈의 원리를 알고 있다. 꿈의 세계는 비논리적이다. 하지만 의식, 혹은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인과관계. 서사는 결국 인과의 사슬이다. <인셉션>에 나오는 꿈의 세계는 너무나 논리적이다. 서사를 무의식의 세계로 연장하려다 보니 꿈의 세계마저 거의 현실과 같은 논리로 구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영화를 어정쩡하게 만든다. 또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팽이까지 돌려가며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려 하나, 그 발상 자체가 이미 영화에서 여러 번 사용된 식상한 모티브다. 게다가 그가 섞어놓으려는 현실과 가상이 하필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아닌가. 이 둘의 차이는 애초에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 현실’, <매트릭스>에 나오는 ‘가상과 현실’의 차이와는 급진적으로 다르다. 한마디로, ‘인생은 꿈’(Life is but a dream)이라는 정도의 낡은 은유 위에 스크립트를 쓰는 것은 철학적으로 너무 안이해 보인다.

'림보'라는 발상은 좋았으나....

보드리야르의 미디어론과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을 뒤섞어놓은 느낌이랄까? 주인공의 트라우마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아내는 보드리야르의 ‘돌발사태’, 즉 매트릭스 속에 불현듯 침입하는 프로그래밍되지 않은 실재를 연상시킨다. 동시에 그녀는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 그 어떤 상징계나 상상계의 질서로도 프로그래밍될 수 없는 대상을 닮았다. 그녀의 등장이 영화의 극적 긴장감을 높여주나, 여기서도 다시 두개의 질적으로 다른 담론, 즉 의식의 담론과 무의식의 담론의 혼합이 어딘지 개념적 불편함을 준다.

야박한지 몰라도 이게 내가 이 영화에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유다. 중층적 구조를 오가며 복잡한 서사를 이어나가는 감독의 영화적 역량 덕분에 두 시간 반의 러닝타임을 그리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지만, 사실 <인셉션>은 비슷한 스토리를 가진 <매트릭스>나 감독 자신의 전작인 <메멘토>에 비해 솔직히 철학적으로 언급할 만한 게 별로 없다. ‘인셉션’(inception)이라는 개념에서 뭔가 철학적 영감을 기대했던 나의 글이 졸지에 영화평 비슷해진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다.

쪽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른 것은 ‘림보’라는 발상이리라. 남의 생각을 빼내고(extraction) 내 생각을 남의 무의식에 집어넣는다(inception)는 유치한 발상에 집착하기보다는 차라리 영원한 꿈의 연옥(limbus)을 탐험하는 영화를 만들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유일하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 바로 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이것보다 더 꿈처럼 보이는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이 나왔을 것이고, 최소한 이 영화가 그저 <매트릭스>의 아류, 그것의 뇌 과학 버전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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