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윤성호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 경남아 잘 살고 있지
2010-08-27
글 : 윤성호 (영화감독)
영화 <인셉션> 보고 나서 내 영화의 첫 동행 친구가 떠오르다

(* 이 글에는 창작이 적당히 섞여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어떤 단락을 영화 <인셉션>의 스포일러라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인셉션>을 봤다. 꿈속의 꿈속의 꿈속의 꿈을 넘나드는 영화는, 주인공의 토템- 현실의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지 여부에 따라,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 꿈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있는, 등장인물 고유의 소지품- 인 작은 팽이의 운동을 보여주다 덜컥 끝나버린다. 적당히 술렁거리는 객석의 반응. 혹 쿠키(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 나오는 일종의 보너스 영상)라도 없나 기대하며 앉아 있는데, 눈에 띄는 A/S는 없는 듯하고 (대신 귀에 들리는 A/S는 있는 듯하고) ‘아, 그럼 그대는 꿈이었나 생시였나, 당신의 토템은 계속 회전할까 멈출까’ 궁리를 하는데, 앗, 센스있게도 옆자리에서 팽글팽글 몸을 돌리고 있는 동행(!). 그 제스처를 그럴듯하게 번역하면, 영화는 끝났으니 꿈에서 깨어라,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사람과의 시절도 어쩌면 휘리릭 지나가는 꿈일진대.

단편 <중산층 가정의 대재앙> 속 경남

감히 나도 비슷한 설정의 단편을 만든 적이 있다… 고 주장해본다. 2002년에 만든 단편 <중산층 가정의 대재앙>의 줄거리를 몇년 만에 읊어보자면 ‘촘스키 인터뷰를 들으며 자위행위에 열중하는 아들과 그런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에 관한 꿈을 꾸는 샴쌍둥이 감독이 있는데, 주로 영화를 감독해오던 형이 TV를 보다가 실성하는 바람에 인지적 상대주의에 관한 책만 골라보던 동생이 불가피하게 메가폰을 잡게 된다는 내용의 꿈을 꾸는 산만한 독립영화감독 마이클이 있는데, 그런 내용으로 영화를 만들어봤자 도대체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을 것 같아 괜히 엘레강스한 척 독백만 하고 다닌다는 내용의 꿈을 꾸는 성호 역시, 사회적 고민이 많은 척 소모적인 인터뷰를 하고 다니는 가련한 젊은이. 그렇지만 아직은 현재진행형!’

그럴 일도 없겠지만, 부디 <인셉션>의 반의 반의 반의 반의 스펙터클이나 아이디어라도 기대하며 이 단편을 찾아보진 마시길. 캠코더와 편집기를 막 손에 쥔 늦깎이 영화입문자의 치기어린 ‘설계’였으니까. 중간 중간 ‘킥’을 하는 순간에도 그닥 섬세한 동기화는 없으며, ‘토템’도 반전도 심지어는 스토리도 없는 잡담의 연속이니까. 그런 게 영화냐고? 아, 그 질문도 영화에서 절친과 나눈다. 창작일과 아무 상관없는, 당시 어느 카에어컨 회사에 다니던 친구 류경남이 출연해(이 친구가 준 40만원으로 단편을 찍었다) ‘이건 영화가 아닌 것 같다’며 미리 자책하는 나에게 ‘네가 만드는 것도 영화 맞다’며 복돋우는데 그 와중에 희한한 예술론- 예술은 서민 생활에 실용적인 도움을 줄 수 있기에 가치가 있는 건데 네 비디오 작업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가령 자신같이 평범한 사람이 언젠가 맞을 결혼생활의 위기에라도 도움을 줄지 모르니까 예술이다- 을 펼친다. 돌이켜보건대 이 친구와 내가 나누곤 했던 ‘삼천포 가는’ 식의 일상 대화가, 그리고 그 대화에 대한 화용론적 접근이, 이후 내 거의 모든 작업의 모티브가 된 듯하다. 이 친구가 나한테 ‘인셉션’해놓은 허언에 기대어 여태 일용할 대본을 쓰고 있는 셈.

각설하고, 좋은 오락도 누렸겠다 이 풍진 세상에 감읍하는 기분을 공유할 겸 트위터에, 동행의 귀여운 팽이 흉내를 언급했다. 바로 이어지는 멘션들. 그 센스에 대한 호응이 절반, <인셉션>의 음악 쿠키에 대한 언질이 절반. 재밌는 건, 여성 관객은 영화를 본 뒤의 정서를 나누고 싶어하는 데 비해, 남성 관객일수록 자신이 지닌 지식을 일러주려는 경향이 있다. 그날의 사례 하나 더. 노희경 작가의 어떤 금언- 서민을 위무하는 매체에 종사하고 있다는 자부심, 그리고 그에 따른 신독의 자세- 을 원고를 쓰는 데 참고할 겸 복기해 올렸더니 역시 쏟아지는 멘트. 역시 대개의 여성은 그 문장에 대한 동감 내지는 그로 인해 자신한테 떠오른 경험과 정서를 얘기하는데, 남성은 그 문장이 간과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점, 드라마작가에게 느끼는 아쉬움을 지적하는 경주를 한다.

<인셉션> 속 아리아드네 같은 동행이 필요해

자, 여기서 여성성, 남성성을 생물학이 아닌 젠더의 구분으로 생각하고 읽어주시길. 여성성이 강한 관객일수록 음악이든 영화든 그 자체로 즐기면서 자기 감흥 안에서 범주화하는 반면, 남성성이 강한 관객일수록 호오를 떠나 그걸 품평하거나 훈수 두며 서열을 매길 수 있는 자신을 전시하는 데 좀더 열심이다. 남녀 일반을 싸잡아 도매금으로 분류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개인적으로 영화를 준비하고 만들고 마무리하고 선봬는 과정에서 만난 요런조런 근거들에 의한 판단, 나름의 귀납법. 시나리오를 써서 가까운 사람들한테 모니터를 받을 때도 이성친구들의 경우, 인물의 어떠한 점이 독자인 자신한테 닿거나 못 닿았는지, 마음이 움직였다면 어떤 대목 때문이고 미동이 없었다면 그건 또 어떤 이유에서인지를 말해준다면, 동성의 동료들의 경우, 칭찬을 하든 아쉬움을 표하든 그 서사에 대해 코멘트할 수 있는 자신의 식견을 알리는 데 좀더 신경들을 쓴다. 여자는 호평을 잘하고 남자는 혹평을 잘한다는 구분이 아니다(그렇지도 않다). 여성성, 남성성 중에 우열을 가리자는 얘기도 아니다. 다만 후자보다는 전자들이 좀더 인생을 재밌게 살지 않나 싶다. 전자들은, 흥이든 삐쭉함이든 건강한 전염성이 있다면 후자들은 예찬이든 성토든 독야청청 코스프레의 인공어항인 경우가 많다. 물론 여기서 첫 번째 혐의는 내게 있다. 일단 이 글 자체가 남의 성향에 대한 평가 아닌가.

그리하여 결론이랄 것도 없는 결론. 우리가 진짜 인생을 잠깐 미루고 미욱한 직관으로 설계한, 평가의 미로 속을 헤맨다면, 그것은 부덕의 소치가 아닌, 그저 숙명이고 경로일 수도 있겠다. 다만 킥(각성을 돕는 매체)을 예비하고 토템(객관을 위한 매개)을 지참하는 슬기는 필요할 텐데 그보다 더 큰 은혜는 그런 나를 안쓰러워하며 함께하는 동행의 존재. 가령, 영화에서는 아리아드네(앨런 페이지). 그렇게 나를 복돋웠던 첫 번째 동행이 잊고 있던 친구 류경남. 머리로 설계한 내 헛소리에 더 난감한 헛소리로 화답하던, 하나 적어도 자신을 과시하는 빈말은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기 마음과 경험에서 나온 헛소리를 정말 열심히 해주던- “네 영화도 영화야, 그러니까 영화는 사람을 고양시키는 건데, 내가 얼마 전에 공원에 갔다가 개들이 교미하는 걸 봤거든, 그걸 보면서, 아, 나중에 아들이 생기면, 근데 방에서 자위만 하면, 이렇게 공원에 데리고 와서 개들의 교미를 보여주면서 충고를 해야지 생각을 했어, 네 영화도 그래”, 뭐 이런 식의- 고맙다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친구.

회사를 돌연 관두고 집 근처 닭갈비집에서 일하던 경남이는 1년 뒤 갑자기 중국으로 떠났다가 역시 느닷없이 귀국, 대기업에 입사했다. 다니는 내내 ‘이게 다 뻥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고. 그리고 늘 그렇듯 돌연 퇴사…. 어느덧 수년이 흐르고, 지금은 동창들에게 물어봐도 행방이 묘연하다. 중국에 은둔한단 설도 있지만 혹시나 불길한 소식을 들을까봐 나는 아예 진위를 파악하지 않고 있다. 코브(디카프리오)가 불행한 생시를 마주할까 두려워 꿈속에서도 소중한 사람의 앞통수를 외면하는 것처럼. 내 첫 단편에 멋대로 삽입한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가 참 좋다고 새된 목소리로 흥얼거리곤 했던 경남이. 어느 ‘림보’ 아래에 있든 피아프의 노래가 늘어질 정도로 그것도 한참 늘어질 정도로 느리게 편안하게 진짜처럼 살고 있기를.

일러스트레이션 이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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