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진중권의 아이콘] 악마의 철학
2010-09-03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악마를 보았다>와 <다크 나이트>

‘선’과 ‘악’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행위를 평가하는 술어에 불과하다. 하지만 고대와 중세의 인간들은 형용사에 속하는 이 술어를 ‘천사’ 혹은 ‘악마’와 같은 명사로 실체화했다. 형이상학적 실체로서 악마의 피날레를 장식한 것은 아마 근대 초기의 마녀사냥이었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진지하게 악마의 실존을 믿었고, 악마의 자식들을 찾아내어 절멸시키려 했다. 사탄을 쫓아내려는 그 행위 자체가 결과적으론 사탄의 역사(役事)였다는 역설. 이는 선과 악의 경계가 얼마나 불안한지 보여준다.

이것이 신학적 악마라면, 이른바 ‘가치의 전도’가 횡행하던 낭만주의 시대에는 새로운 유형의 악마, 즉 미학적 버전의 악마가 등장한다. 낭만주의 특유의 ‘아이러니’ 감성은 악마 속에서 천사를 보고, 천사 속에서 악마를 본다. 위선(천사표 악마)에 대한 혐오는 위악(악마표 천사)에 대한 선호로 이어진다. 낭만주의자들이 악마는 예술적 천재다, 천재는 기존의 규칙을 모두 파괴하기에 세인의 눈에는 마치 악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위선으로 전락한 낡은 도덕을 파괴함으로써 더 높은 차원의 도덕을 예비한다.

범죄와 예술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기존의 규칙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범죄에는 예술성이 있고, 위대한 예술에는 범죄성이 있다. 꽤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 말은 때로는 위험할 수 있다. 가령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유미주의 원리의 극단적 경우를 생각해보라. 로마 시내에 방화를 하고 리라를 켜며 시를 읊었다는 네로 황제, 옆집에 불 질러놓고 소나타를 연주한다는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 그리고 전쟁의 참상에서 새로운 미학적 원리에 대한 영감을 얻어야 한다는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

조커의 철학

<다크 나이트>의 조커의 캐릭터가 인상적인 것은 중세와 근대의 악마를 한 몸에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조커는 신학적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는 순수 악을 추구한다. 저 혼자 악행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글자 그대로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만든다. 인질들을 납치범으로 분장시켜 진압부대를 무고한 이들의 살인에 동참시키거나, 두 그룹의 인질들을 살아남기 위해 서로 상대를 죽여야 하는 극한적 선택으로 몰아넣는다. 그야말로 인간으로서 사탄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동시에 조커는 미학적 악마의 특성을 갖고 있다. 조커의 범행에는 뚜렷한 실용적 동기가 없다. 그는 금전을 얻거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범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이 무관심성은 예술작품의 특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가 하는 행위의 사악함이 아니다. 그 사악함의 무대를 디자인하는 그의 연출력이다. 때문에 배트맨은 조커의 사악함과 맞서 싸우기 전에 먼저 한계를 모르는 그의 상상력과 싸워야 한다. 배트맨의 정의는 궁극적으로 승리하나, 적어도 상상력의 싸움에서만은 늘 조커에게 패배한다.

조커와 배트맨의 대결은 구약성서 욥기에서부터 내려오는 신학적 관념, 즉 ‘신과 악마의 내기’를 닮았다. 동시에 그것은 예술적 놀이이기도 하다. 바둑이나 장기가 재미있으려면 훌륭한 적수가 필요하듯이, 배트맨이 없었다면 조커는 아마 그 못된 놀이를 그만두거나, 계속 하더라도 매우 지루해 했을 것이다. 신학적 악마의 적은 ‘정의’이나, 미학적 악마의 적은 ‘권태’(ennui), 즉 참을 수 없는 삶의 지루함이다. 거기에 히스 레저의 뛰어난 연기가 합쳐져, 조커의 형상에서 관객은 모종의 숭고함을 느끼게 된다.

악마성과 잔혹성

<악마를 보았다>고 해서 극장에 갔는데, 정작 악마를 보지 못했다. 영화의 곳곳에서 <다크 나이트>를 참조한 흔적이 감지된다. 가령 영원히 웃으라고 입을 찢어버리는 장면이나, 범인의 가족에게 그의 처형을 맡기는 장면, 특히 경철이 수현과 일종의 게임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설정 등은 어쩔 수 없이 <다크 나이트>를 연상시킨다. 아니, 그 이전에 <악마를 보았다>는 제목 자체가 조커와 비슷한, 혹은 그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순수 악, 절대 악을 보여주겠다는 감독의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악마성은 단순한 잔혹성 ‘이상’의 것이나, 영화에서 그 ‘이상’을 보기란 힘들다. 물론 경철의 악마성이 느껴지는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살려달라고 비는 척하다가 다시 욕하는 모드로 돌아오는 장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철이 수현의 알량한 코드를 ‘비웃고 있다’는 점이다.) 경철의 악마성이 가장 잘 산 부분은 여자의 머리를 둔기로 내리쳐 피를 튀기는 장면이 아니라, 그가 마지막 할 일을 해치우고 자수하는 장면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이것이 사지를 절단하는 것보다 더 잔혹한 것이다.

경철을 닮아가는 수현의 악마성은 표적을 잃은 느낌이다. 조커의 수법처럼 애먼 이들에게 처형을 맡기는 그의 복수는 관객에게 허탈함을 준다. 어차피 경철은 집에서 내놓은 자식, 그에게 가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차라리 경철이 자수하는 장면으로 영화를 끝냄으로써 절대악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을 보여주는 게 나을 뻔했다. 태연히 자기에게 사형을 선고해달라고 말하는 흉악범의 실존적 냉소 앞에서 ‘법’의 칼은 무력해진다. 이렇게 정의 자체를 해체시키는 것. 절대악은 그런 것이다.

악마를 잡는 법

‘하드코어’(hard core)와 ‘하드고어’(hard gore)의 언어적 유사성은 실은 장르의 유사성을 함축한다. 움베르토 에코에 따르면, ‘하나의 에피소드에서 다른 에피소드로 이행하는 시간이 쓸데없이 오래 걸리는 것’이 포르노다. 굳이 성기를 드러내야 포르노가 아니라, 플롯의 진행에 필요한 이상의 시각적 과잉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포르노라는 얘기다. 감독 자신도 이 영화를 ‘고어 스릴러’로 이해하는 모양이다. 이 영화가 악마성의 철학적 탐구보다 잔혹함의 시각적 현시에 주력하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감독이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려 했다면, 악마성을 ‘행위의 잔혹함’보다는 ‘생각의 사악함’에서 찾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생각보다는 행위에, 정신보다는 육체에 집착하고, 복수 역시 범인의 정신에 고통을 주기보다는 그의 신체에 잔혹함을 행하는 쪽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스스로 “고통도 공포도 못 느낀다”고 말하는 자의 신체를 파괴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 수현은 그 게임을 통해 경철의 생각을, 그의 기획을, 그의 삶을 지탱하는 코드를 파괴했어야 한다.

니체의 말대로 “가장 큰 비판은 상대의 이상을 비웃어주는 것”. 흉악범들은 언젠가 자신의 신체 역시 파괴되리라 예감한다. 그들의 (생물학적, 혹은 사회학적) 죽음은 이미 그들의 기획 속에 포함되어 있다. 사탄은 적그리스도(Antichrist)다. 죽음을 무릅쓰고 어떤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행위 역시 영웅적이다. 다만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반영웅(Antihero)라 할 수 있다. 이 내용 없는 형식적 영웅주의야말로 모든 위대한(?) 범죄의 진정한 동기다.

악마를 비판하는 형식은 이것에 대한 비웃음이다. 악마도 상처를 받는다. 악의 영웅에게 ‘나쁜 놈’이라 욕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정작 “그래 봤자, 너는 듣보잡”이라는 말이다. 그가 절대악이 아니라 상대악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가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한갓 잡것, 동네 양아치에 불과하다는 사실. 진정한 복수는 악마 스스로 이를 자기 내면에서부터 인정하게 만드는 데서 성립한다. 악마를 잡기 위해 악마보다 더 잔혹할 필요는 없다. 악마를 잡으려면 악마보다 더 사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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