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최민식] 꼬불치면 뭐하나, 팬티 벗고 다 까발려야지
2010-08-27
글 : 이영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만나면 반가운 얼굴하고 덥석 손부터 잡는 최민식이다. 자주 얼굴 볼 기회는 없었지만, 그와의 몇번의 만남을 더듬고 곱씹어보면 어딘가 불편하고, 거북했던 것 같다. 묻는 이의 능력에 따라, 답하는 이의 사정에 따라 다르겠으나, 실제 인터뷰는 말뜻과 달리 상대의 속내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속마음을 바깥에 공개할 땐 반사적으로 이런저런 계산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그런데 최민식은 그런 적이 없었다. 어떤 자리에서든 최민식은 ‘샅샅이’ 속내를 털어놨고, 외려 당혹스러움은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 독주 몇잔에 ‘신들린 배우’론을 펼치고 나서 푹 쓰러지던 모습,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 뒤 사람들의 무심한 소매를 붙잡으며 ‘시비’를 던지던 모습도 떠오른다. 모나면 어때, 정 맞으면 되지. 에둘러 가지 않고, 마음이 끌리면 폭우는 물론이고 화살도 기꺼이 맞았던 그였다. 굳이 프레임 안에서 팔팔 끓는 그의 ‘배우 에너지’를 새삼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앞뒤 재지 않는 살인마 경철을 만났다.

-지겹겠다, 인터뷰.
=여기가 황산벌이다. 기자들은 나당연합군. 물리치면 또 오고, 물리치면 또 오고.

-제한상영가 결정이 내려졌을 때 어땠나.
=브레이크 걸릴 줄은 예상했다. 근데 두번 걸릴 줄은 몰랐지. 회사에서 미리 그쪽하고 밥도 좀 먹고 그랬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농담도 했다. 근데 잘라내도 센 건 마찬가지다.

-박훈정 감독(<혈투>)의 시나리오를 김지운 감독에게 먼저 제안했는데.
=<친절한 금자씨>의 이춘영 프로듀서와 막역하다. 같이 술 마시는데 죽이는 시나리오가 있다고 했다. 입담이 좋은 친구이기도 하다. 그때 제목은 <아열대의 밤>이었다. 사족이 없어 좋았다. 관객 아이큐 테스트 하려 드는 시나리오와 달랐다. 수현이 경철을 잡았다 놔주는 대목은 정말 흥미로웠다. ‘어, 어, 어 이거 봐라. 이놈도 미친 놈이네.’

-김지운 감독을 떠올린 건.
=여백이 많은 시나리오였다. 행위의 동기보다 행위 자체가 도드라지는 시나리오였다. 인물들이 목적, 동기, 상처 그런 것들을 어느 순간 저쪽으로 치워버리고 행위 자체를 즐기잖아. 그런 인물들이 김지운 감독의 스타일과 만나면 어떨까 궁금했고 그래서 국제전화요금 감수하고 연락했다. (웃음)

-제작자나 다름없다.
=에이. 그걸 의도한 게 아니라 내 성격이 좀 적극적이다. <올드보이> 때도 우진 역할 찾을 때 내가 대본 들고 다니면서 후배들 대신 만나고 그랬다. 내 파트, 네 파트가 따로 있냐. 바쁘면 내가 가서 만날게 그랬다. 그때 배우들한테 많이 까여봤다.

-시나리오는 많이 바뀌었나.
=굵은 골조의 기둥은 그대로다. 다만 느낌, 무게감, 템포 등은 감독의 머릿속에서, 또 현장에서 많이 변형됐다. 결과적으로 시나리오보다 날내가 더 난다. 비린내 나는 생선을 대충 씻어서 올린 터라 관객 중엔 밥상을 걷어차는 이도 있을 거다.

-금방 영화가 "날내가 더 난다"고 했다. 원래는 근사한 조리를 기대했던 것 아닌가.
=스타일보다 원색적으로 표현하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김 감독은 워낙 말이 없는 반면 난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당신 생각이 도대체 뭐냐, 물어보기도 했다. 논리적으로 답하진 않았지만 그 느낌을 알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수현의 약혼녀를 죽이는 첫 장면을 난 사운드로만 전달하면 어떨까 싶었다. 겨울, 인적 없는 첩첩산중, 차 미러 뽀개지는 소리, 여자의 비명이 들린다. 롱숏으로 멀리서 보면 차문은 열려 있고, 남자의 다리가 버둥거린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둔탁한 파열음과 여자의 비명소리가 잠잠해진 뒤 과연 저 여자는 얼마나 처참하게 죽었을까 하는 무서운 상상. 경철의 표정에 더 집중을 하고 실제 행위는 관객의 상상에 맡겼다면 심의도 피해가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 (웃음) 하지만 정답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니까. 감독의 생각에 동의했고 그래서 촬영했고.

-<조용한 가족>의 김지운 감독과 달라진 게 있던가.
=사람은 안 변한다. (웃음) 말없고, 커피 좋아하는 건 여전하고. 술은 좀 늘었더라. <반칙왕> 뒤풀이 때 생각난다. 그때는 지숙이 누님(연극배우, 김지운 감독의 누나)도 오신 날이었는데 내가 그랬다. 영화도 좋은데 이런 자리에서 좀 취하면 어떠냐고. 사람이 답답하게 왜 그러냐고. 떠밀어서 한잔 마셨는데, 얼굴이 새빨개져가지고, 심장 쿵 쾅거리는 소리가 내게 들릴 정도였다. (웃음) 현장에서의 열정이나 진지함은 그때보다 더 집요해진 것 같다.

-애초 수현을 염두에 뒀다고 들었다. <올드보이> 때도 오대수보다 이우진을 탐냈었고.
=그랬지. 박찬욱 감독이 당신이 이우진 하면 오대수는 최불암 선생님이 하나, 물었지. 수현이든, 경철이든 다 매력이 있다. 경철도 그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캐릭터였고. 원없이 악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배우라면 누구나 있으니까. 그전에 <친절한 금자씨>의 백 선생이 있긴 한데, 그건 너무 조금 나왔잖아. 그나마 개로 만들어줘서 분량을 늘려준 게 고맙지만. (웃음) <친절한 금자씨>는 금자의 영화였고, 상징적인 절대악에 가까웠다.

-수현에게 더 끌린 건 캐릭터에 부여된 감정의 진폭이 더 커서인가.
=평범한 범주에 속해 있던 인물이 엄청난 고통을 겪은 뒤 사적 응징을 하는 과정에서 폭력에 전염된다는 주제를 구현하는 이는 아무래도 수현이니까. 경철은 수현이 괴물이 되어가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고. 수현이든 경철이든 두 인물 모두 보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볼 때도 수현이 국정원 요원이 아니라 평범한 샐러리맨이면 어떨까. 여자 잘 만나 개과천선한 깡패면 어떨까. 그게 아니라면 태권도 사범일 수도 있고.

-감독들은 왜 배우의 바람과 다른 역할을 맡겼을까. 극중 대사로 치면 인간보단 짐승을.
=왜 불같은 최민식, 얼음장 같은 이병헌. 그런 이야기 많이 하는데 내가 무슨 라이터도 아니고. (웃음) 아무래도 감독들은 전체 구도, 상대 배우와의 조합을 생각해야 하니까. 지금의 경철은 야수에 가까운데 사실 수현을 못할 바엔 조금 더 다른 모습을 꿍쳐놓고 있다가 풀어놓을 생각도 해봤다. 경철 안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은 건 ‘앙마’가 아닌 ‘악마’잖아.

-처음 경철 역에 한석규를 추천했다던데. <넘버.3>의 잔혹 후일담인가.
=그냥 같이 하고 싶었다. <올드보이> 때도 같이 하자고 그렇게 꼬드겼는데…. 저 친구랑 작품으로 한번 만나고 싶은 바람이 가장 컸다.

-<서울의 달> 15주년, <쉬리> 10주년을 기념하는 건가.
=그렇지. 그러니까 꽃중년들이 다시 한번 모여… 아. 내가 꽃이 아니구나.

-경철을 조금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싶긴 했다.
=경철이 여중생을 납치하기 전에 우유도 주고 빵도 주고 관심을 표하면, 애들은 ‘쟤, 뭐야’, ‘재수없어’ 하는 표정을 짓는 장면이 있는데 빠졌다. 성적 욕망이 아니라 경철이 그 아이를 정말 좋아했을 수도 있잖나. 관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 돌변하는 것이고. 이어 나오는 수현과 맞닥뜨리는데 이 장면의 동선은 나 자신도 좀 아쉽다. 은밀한 의식을 침범당한 경철의 분노는 사실 쪽팔림이다. 바지를 추켜올리고 혼잣말을 지껄이면서 낫을 찾는 장면이 있었으면 했다. 그러면 두려움도 좀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연쇄살인마라고 해서 야수는 아니니.

-여성 관객이 가장 무서워할 만한 캐릭터를 꼽자면 <추격자>의 지영민이 아닐까. 하지만 지영민은 직접적인 성폭행을 가하지 않는다. 굳이 호감도를 비교하면, 경철보다 위다.
=어제 우리 와이프가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 첫마디가 ‘이 개 사이코, 집에서 나가!’였다. ‘영화 찍으라고 했지 누가 사이코 짓 하라고 했어!’(웃음) 어차피 날내 나는 영화라면 꼬불치면 뭐하나 다 까발려야지. 똥탕에서 더 뒹굴었어야 하는데. 경철은 병원장면에선 더한 짓도 하는데, 상영시간 때문에 많이 잘랐더라.

-경철이라는 역할을 택할 때의 위험부담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 없나.
=숙명적으로 우린 보여진다. 자의든, 타의든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도 저질러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근본적으로 이 일은 이기적이다. 숙명적으로 보여져야 하지만 그 이전에 내가 만족해야 한다. 배우는 가정(假定)을 통해 삶을 찾고 느끼는 존재들이다. 식당에 가서 빨리 나온다고 먹던 것만 시킬 순 없지 않나.

-후반부의 경철은 발악하지만 점점 바람이 빠지는 풍선 같다. 엔딩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다.
=짐승인 척해봐야 너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구나. 객기 부리다가 두려움에 떨다가 하는 그런 설정이 좋았다. 캐릭터가 빤스를 벗는다고 해야 하나. 나 더이상 보여줄 게 없다고 말하는 거니까. 다만 수현의 마지막은 관객으로서 볼 때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폭력에 전염된 저놈이 내일 또 어떤 세상에서 어떤 지랄을 할까 그런 느낌을 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오멘>의 마지막 웃음처럼. 영화의 날내가 좀 상쇄되는 것 같다. 김지운 감독이 관객을 위한 친절한 서비스로 현재의 엔딩을 택했다고 본다.

-어쩌다 경철은 폭력의 숙주가 됐을까.
=꼭 필요한 질문은 아니다. 영화에서 노부모, 아들은 있지만 아내가 없다. 여자한테 한번 데였나보군,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증오와 분노의 이유라고 말할 순 없다. 경철의 폭력성과 야수성은 산술적인 계산으론 추측하기 어렵다. 과거는 중요치 않다. 실제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의 특징 중에서 뽑아낸 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점 정도였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절충이 없다. 길들여지지 않았으니 건너뛰는 거다. 콤플렉스의 뇌관을 건드리면 곧바로 원자폭탄 같은 화학작용이 일어난다. 우리는 늘 겪는 일이 그들의 피해망상을 거치면 폭력으로 이어진다.

-좀더 지적이고 교양있고 우아한 살인마를 떠올린 적은 없나.
=한니발 렉터? 그런 상상을 한 적 있다. 두 번째 살인장면. 봉고차에 여자를 태우고, 여자가 묻는 말에 대꾸도 없이 가다가, 컷.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오프닝에 쓰였던 음악이 다시 흘러나오면 경철은 블루스를 추고 있다. 여자의 머리를 움켜잡으며 심취해 있는데 카메라가 빠지면 여자의 다리가 없는. 근데 이 영화랑 안 맞는다. 그럴 거면 다 바꿔야 하니까.

-올백 머리는 맘에 드나.
=맘에 들었겠나. 제작진이 여러 가지를 뽑아왔다. 처음엔 짧게 머리를 쳐볼까 싶었는데 수현이가 짧은 머리라서. 처음엔 살도 좀 빼려고 했는데, 그것도 수현과의 콘트라스트를 감안해서 하지 않았다. 척 보면 ‘아우, 저 새끼 짜증나네’ 그래야 하니까. 돼지 같은 모습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연쇄살인마들은 흔히 문신도 하나씩 갖고 있는데.
=상투적이잖아. 웃통 벗을 일도 없고.

-촬영장에서 더미처럼 자는 사진 보고 많이 웃었다.
=5년 만에 하니까. 날은 춥고 잠은 쏟아지고. 김지운 감독이 첫 촬영 나와서 이렇게 잠만 자면 어떻게 하냐고 구박도 했다. 한번은 난로 앞에서 자다가 조감독이 깨워서 ‘무슨 장면?’이라고 물었는데 말없이 흉기만 쥐어주더라. 7회차 정도 나가니까 슬슬 적응됐다.

-최민식은 잔상을 굉장히 강하게 남기는 배우다. <친절한 금자씨> <올드보이>를 연상하는 관객도 있을 거다.
=손오공이 아니니 비슷한 표정이 나왔을 수 있다. 다만 펜션에서의 섹스장면 두고 백 선생을 떠올리는 건 좀…. 후배위든, 교미든 다 그렇지 뭐. 그 자세가 가장 짐승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 것이고. 서로가 원하는 게 아닌 일방적인 섹스니까. 은밀한 섹스였다면 마주 보고 했겠지만.

-경철은 말을 배설하듯 뱉지만 대사 톤은 장면마다 미묘하게 바뀐다.
=동선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병원장면에서 경철은 머릿속이 복잡하다. 어떤 놈이기에 살려주고 돈까지 줬을까. 그런 상황에서 의사가 반말을 하고, 경철을 자극한다. 그런데 중간에 간호사가 끼어들면서 의사에 대한 분노가 성욕으로 바뀐다. 경철은 정서적으로 연관성이 없다. 상황에 충실하고 대상을 쫓는다. 그걸 감안해서 대사 톤을 조절했다.

-<주먹이 운다>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링 위에 올라선 선과 선. 이번엔 컨셉만 놓고 보면 악과 악이 부딪치는데.
=아니다. <악마를 보았다>는 선악 구도를 뭉개지 않는다. 단, 선이 굉장히 폭력적이라는 것이 다르다. 선이 갈기갈기 악을 찢어 죽였는데도 개운치 않은 건 무슨 이유인가를 되묻는 거다.

-이병헌과는 어땠나.
=썰렁했지. 아무래도 작품 따라가게 된다. 밥 먹었냐고는 수시로 묻지만, 작품이 찍어누르는 중압감이 있으니까. 나는 나대로 찍고, 병헌이는 병헌이대로 찍는 장면도 많았고. 드디어 한 프레임 안에 같이 들어가는 장면이 있어도 조곤조곤 이야기할 짬이 어딨나. 그냥 치고 박고 하는데. 게다가 병헌이도 프로니까. 자기 연기 책임져야 하니까. 한참 감정 잡고 있는데 가서 눈치없이 ‘야 임마!’ 불러놓고 똥침 놓고 도망갈 수도 없는 일이고.

-관객으로서 가장 맘에 드는 장면은 뭔가.
=손에서 칼 뽑는 장면. 의도하지 않았는데. 원래는 ‘으으으으’ 하면서 뽑는 건데, 손잡이만 쑥 빠지면서 ‘어라?’ 하는 식이 됐다. 군인들과 맞닥뜨리는 장면의 유머도 재밌고.

-출연을 검토 중인 작품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번에도 센 캐릭터를 고를 건가.
=아니, 아니, 절대 안 그런다. 유력한 것 중 하나는 푼수 같은 캐릭터다. 센 척하지만 바보처럼 당하기만 하는. 뭐 요즘은 예측 가능한 상황이 아니라 딱 이거다 말할 순 없지만.

-영화사를 다시 만들 생각은 없나.
=정리한 지 벌써 2년쯤 된다. 골치 아픈 거 안 할 생각이다. 일 봐주는 후배랑 같이 다니는 게 편하다. 회사가 없으면 프리하게 살고, 다이렉트로 사람 만날 수 있어 더 좋다. 우리 목표가 좋은 작품 만나는 것 아닌가. 발품 조금 더 팔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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