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서영희] 죽이는 연기는 올바른 생활에서 나옵니다
2010-09-03
글 : 김성훈
사진 : 백종헌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의 서영희

딱히 규정할 만한 수식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배우 서영희. 특정한 이미지가 구축되는 것을 경계할 만큼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출연한 10편의 영화에서 서영희가 연기한 역할은 크게 두 부류로 한정되어 있다. 비극의 정점에서 생을 마감하거나(<궁녀>(2007)의 월령, <추격자>(2008)의 미진), 코미디 장르에서 전형적인 캐릭터 연기(<마파도>(2005)의 장끝순, <무도리>(2006)의 양미경, <청담보살>(2009)의 지혜)를 선보이거나이다. 간혹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처럼 “잔잔한 분위기”를 전달하기도 했지만 서영희는 늘 “극과 극”이었다. 죽거나 혹은 웃기거나.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배우로서 변화가 필요했다. <추격자>와 <청담보살>이 끝난 뒤였다. 그간 해보지 못해 아쉬웠던 “노멀한 역할”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읽었다. 그때마다 서영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힘이 느껴지는 캐릭터”였다. “그런 역이야말로 도전할 만한 의지가 생긴다”는 이유 때문이다. 평생 고생할 팔자인가 보다.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의 주인공 복남을 만난 것도 이때다. 소주와 어울리는 이야기지만 서영희는 방에서 혼자 와인을 마시며 시나리오를 단숨에 읽었다. 서영희에게 복남은 “답답하고 안쓰러운 여자”다. 그럴 만도 하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에서 복남은 부모없이 젖동냥하며 자라 짐승 같은 남편 만종(박정학)에게 학대당하고, 시동생 철종에게 수시로 강간당하고, 시부모에게 며느리 대우는커녕 매번 무시당하는 불쌍한 여자다. 복남에게 희망은 하나뿐인 딸과 태어나 처음으로 친절함을 보여준 친구 해원(지성원)이다. 서영희는 타들어갈 대로 타들어간 복남의 속을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남들보다 조금 더 고생했다. 몸 고생말고 마음고생. 또 어머니가 고생하면서 시집살이하는 것도 옆에서 보고 자랐고.” 복남이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선이 명확한 이야기는 노멀한 역할을 기다렸던 서영희의 마음을 되돌려놓았다. 또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 여성의 시선과 감정으로 끌고 가는 흔치 않은 작품이라는 점도 출연 결정에 한몫 했다. 다만 이전과의 차이라면 죽는 것이 아니라 전부 죽여야 한다는 것.

이야기는 인물의 전사(前史)를 따로 접근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설명적이었지만 복남이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섬 여자가 되는 것이 어려웠다. “여러 과제들이 있었지만 사투리와 까무잡잡한 외모”가 최우선 과제였다. “사투리는 극중 배경인 무도 사투리였다. 전라도 말씨가 기본이지만 어디 말투라고 하기에 뭣한 느낌이다. 섬이라는 공간이 그렇잖나. 여기저기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라 여러 지역의 말씨가 섞일 수밖에 없다. 마치 군대 같다고나 할까. 감독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사투리의 어미가 끝까지 이어졌으면 한다는 것과 센 발음은 지양해달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상황의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사투리는 연습하고 연습하면 어느 정도 익숙해질 수 있지만 새까만 피부톤을 만드는 것은 노력만으로는 안되는 일이었다. “까만 피부는 복남의 캐릭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내 피부가 원래 잘 안 타는 피부라 기계 선팅으로 아무리 태워도 안되더라. 반면 해원 역을 맡은 (지)성원 언니는 서울 여자라 하얀 피부톤을 유지해야 하는데 너무 잘 타서 난감해했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현장에 갔지만 촬영하는 동안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거지?” 비교적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임한 전작들과 달리 이번 현장은 불안감이 제법 컸다. 사람을 찔러본 적도, 낫질을 해본 적도, 총에 맞아본 적도 없는,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과 행동들이 많았다. 특히 남편이 뭍에서 온 다방 레지와 안방에서 섹스할 때 복남이 아무렇지 않게 비빔밥을 먹는 장면은 “어떤 상황인지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 이해하기는 참 어려운 장면”이다. “남편과 외간 여자와의 부적절한 행위에 상처받지 않으려고, 신음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밥을 먹는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다. 어릴 때 본 TV드라마가 생각난다. 남편이 바람 피우고 들어온 사실을 안 아내가 화장실에 가서 이에 피가 나도록 양치질을 하는 장면이다. 비빔밥을 먹을 때 정말 외롭고 쓸쓸했다.”

처음 호흡을 맞춰본 장철수 감독의 연출 스타일도 낯설었다. “감독님은 (배우를) 가두는 것을 싫어하신다. 리허설을 할 때도 배우가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는 스타일이다. 연기의 수위가 마음에 안 들 때도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힘을 빼는 것은 어떨까요?’ ‘리허설이 다가 아니니까 슛을 갈까요?’라고 오히려 물어보신다. 무엇보다 오케이 사인을 던질 때도 ‘오케이하죠’라고 한다. 오케이면 오케이지, 오케이하죠? 는 뭔가. ‘난 오케이가 아니지만 스탭·배우 여러분들이 괜찮다면 오케이할게요’잖아. (웃음)” 이처럼 감독의 구체적이지 않은 연기 지시 방식은 서영희를 더욱 안달나게 하고, 더욱 집중하게 했다.

내내 신경을 쓴 덕분일까. 서영희는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복남의 행동이 “참으면 병 생긴다”는 옛말을 실천에 옮기는 순간에서 집중력을 보여준다. 서슬 퍼런 낫을 치켜들고 그동안 자신에게 불친절했던 사람들을 심판하는 장면이다. 평소 싫은 소리 못해 항상 “예스”를 외치는 ‘예스걸’ 서영희가 그 장면을 연기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정말 속이 시원했다. 특히 죽은 남편의 시체에 된장을 던질 때 쾌감이 정말…. 그간 한국영화 속 여성은 항상 힘없는 존재였다. 반면 복남은 능동적으로 모든 일을 해결한다. 그렇다고 아무나 죽이는 게 아니다. 복남의 행동에는 나름 룰이 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은 해치지 않는다.”

카메라가 돌아갈 때는 머릿속이 복남으로 가득 찼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금방 인간 서영희가 되었다. 배역과 일상을 넘나드는 게 비교적 자유로운 편인 까닭이다. 매사에 호기심이 많은 그녀에게 잠깐의 섬 생활은 흥미진진했다. 물론 <마파도>에서 섬 촬영을 한 적이 있지만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영화가 제대로 된 섬 촬영인 셈이다. 일본 만화 <심야식당>처럼 주문하면 뭐든지 만들어주는 식당에서 치킨 맛에 녹다운됐고, 화장실이 없어 숲속에 들어가 볼일을 해결하기도 했고, 김밥 한줄도 스탭들과 나눠먹는 등 섬 생활하랴 촬영하랴 외로울 틈이 전혀 없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복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밝은 모습이다.

어쩌면 그의 다음 작품에서 인간 서영희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지와 봉식>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정준호와 함께 출연하는 형사 코미디영화다. 극중 그가 맡은 역할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영어 선생님이다. “그간 에너지 소모가 많은 연기를 해와서 그런지 여성스러운 느낌이 있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다.” 혹시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연애 안 하고 있다. 아니, 못하고 있다. 솔직히 정말 연애 하고 싶다. (웃음)”

영화만 11편째인데 서영희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지금도 ‘배우가 내 길이 맞나’ ‘영화라는 매체를 계속 잘할 수 있을까’와 같은 고민을 끊임없이 한다. 고두심 선생님이나 김해숙 선생님의 연기를 보면 연기가 아니라 진짜 생활이다. 나 역시 그렇게 되고 싶다. 일상에서의 행동 가짐이 중요한 것도 그래서다. 올바른 삶을 살지 않는다면 어떤 연기를 해도 스스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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