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았다>는 인과율적으로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채 광기와 복수의 잔혹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스펙터클화하는 영화다. 관객은 맹목적인 광기(또는 복수)의 몸짓과 그로 인해 갈기갈기 찢긴 신체의 향연을 본다. 이러한 영화를 대할 때, 관객은 크게 두 가지 갈림길에 놓이는 듯하다. 하나는 과잉된 폭력의 이미지 자체를 페티시즘적으로 즐기는 것이다. 이미지에 담긴 함의보다는 그 자체가 이룬 표현의 강도를 우선적으로 즐기는 것. 만약 그 표현의 강도를 새로운 영화적 체험이나 영화적 성취로 인정할 수 있다면, <악마를 보았다>는 옹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다. 문제는 그 스펙터클을 공허한 것으로 느끼면서, 과잉된 이미지의 폭력을 무력한 응시로 체험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을 경우다. <악마를 보았다>에 대한 내 체험은 공교롭게도 후자쪽이었다. 내 영화적 체험과 유사한 영화 속 한 장면. 경철이 수현 장인의 얼굴을 아령으로 내리찍는다. 이때 장인은 그 폭력 앞에서 경철을 향해 무력하게 손을 뻗는다. 난 그 손길을 보며 정말 부질없는 짓이라 느꼈다. 이때 카메라는 장인의 시선과 유사한 각도에 위치하는데, 경철은 그 손길을 외면하며 때린 데 또 때린다. 나는 이유없이 가해지는 폭력 앞에서 무력하게 손을 뻗은 수현의 장인이 나와 유사한 처지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지의 과잉된 폭력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력하게 그것을 감내하는 것이 전부라는 점에서. 이제 그만, 하며 손을 뻗쳐봐야….
짧은 단평이었지만, 나는 이미 <악마를 보았다>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밝혔다(<씨네21> 767호). 그리고 동일한 관점에서 이 영화의 ‘황폐한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한 김혜리(<씨네21> 767호)와 이동진(‘이동진닷컴’, “황폐한 정육점 스릴러”) 글이 있다. “살인뿐만 아니라 섹스신을 포함한 숱한 대목에서, 과잉은 무엇인가를 담아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이동진) “끔찍하지만 진실의 일단을 보고 있다는 생각도,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고 있다는 기분도 들지 않는다. <악마를 보았다>의 악마는 잔혹한 폭력묘사가 아니라 그 효과의 무시무시한 공허함이다.”(김혜리) 두 평론가의 글을 인과 관계로 묶어 읽으면, <악마를 보았다>의 영화적 체험에 관한 가장 완전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악마를 보았다>에 대해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악마를 보았다>에 재현된 이미지의 폭력이 왜 공허한 것으로 체험될 수밖에 없는지 내러티브와 관련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김지운의 영화에 대해,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에 대해 내러티브를 이야기하는 것은 영화의 핵심에서 비켜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가 갖는 과도한 스펙터클, 또는 잔혹한 이미지의 공허함이 내러티브와 무관하지 않다면, 내러티브 자체가 핵심이 아니라 해도 그에 이르는 길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을 닮은 복수
<악마를 보았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수현(이병헌)과 경철(최민식)이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이다. 영화가 채 중반도 넘어서지 않은 지점에서 쫓고 쫓겨야 할 두 인물이 만난다면, 이후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이야기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악마를 보았다>는 그런 선택을 한다. 수현이 경철을 놓아주며 그에게 프로메테우스적인 형벌을 내리는 신적 입장에 서려 할 때, 나는 이후 두 사람이 어떠한 이야기를 그려나갈지 너무도 궁금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장면 이후에 두 사람이 펼쳐낼 새로운 국면을 기대한 것이다. 내 영화적 경험으로는 아직 이러한 관계로 진행된 복수담은 없었다. 그런데 <악마를 보았다>의 내러티브는 계속 전진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한 지점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 이후 수현의 복수는 영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거나 이야기를 앞으로 진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닐하우스 장면에서 봤던 그 상황에 고착된 채 동일한 복수를 리플레이할 뿐이다. 그러고 보면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은 설정 그 자체는 매력적이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일은 지루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낮에 독수리에게 간이 쪼이고, 밤에 회복되고, 다음날 또 쪼이고, 또 회복되고…. 그 반복을 지켜보는 일이란….
물론 <악마를 보았다>에서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출은, 수현과 경철의 관계가 역전되면서 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영화가 낮으로 배경을 바꾸며 분위기를 전환시킬 때다. 밤이 낮으로 대체될 때, 하계의 판타지에 머물러 있던 악마가 지상으로 기어 올라와 현실 세계를 휘저으며 활보하는 듯한 매력이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시퀀스에서만큼은 (내가 앞으로 지적할 이 영화의 한계와 무관하게) 몇몇 장면을 페티시즘적으로 즐겼던 것 같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가 갖는 치명적인 한계는 경철이 아닌 수현쪽에서 발생한다. 이는 이 영화가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그가 회복한 뒤 다시 간을 쪼기 위해 진격하는 독수리에 관한 영화라는 뜻이기도 하다. 애초에 미치광이 개사이코인 경철에게는 실존적 고민 따위가 개입할 여지가 없고 보면, 수현에게서 사적 복수에 뒤따르는 윤리적 딜레마와 그로 인한 심리적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영화에서 재현되는 복수의 행위는 무의미한 가학적 몸짓에 머물 위험이 있다(이는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피학적 몸짓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악마를 보았다>가 택한 전략은 내러티브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복수의 지루한 반복을 피하기 위해, 또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점점 강도를 높이며 이미지의 잔혹성을 과잉시키는 것이다. 페티시즘적인 관객이라면, 점진되는 잔혹한 이미지만으로도 <악마를 보았다>는 즐길 만한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과잉된 표현이나 페티시즘적 영화 관람을 그 자체로 문제삼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그에 공감하지 못하고 의문을 가졌던 것은 잔혹한 이미지가 과잉적으로 표출될 때, 왜 그것이 수현의 내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실제로 두 사람이 대면한 직후, 수현이 경철을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새로운 인물을 만나고, 경철에게 다시 가학적 복수를 행하고, 누군가의 고통이나 죽음과 맞닥뜨리지만, 그의 심리적 상태는 그 어떤 변화나 발전도 없이 약혼녀가 죽은 그 순간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악마를 보았다>의 내러티브가 자꾸 뒤로 되감기려 하는 것처럼, 수현은 자신의 눈앞에 그 어떤 일이 벌어지건 말건 간에 약혼녀에게 분노로 다짐했던 그 순간에서 조금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수현의 이러한 특징이 김지운의 연출 의도에 내재해 있다는 점이다. 김지운의 말에 따르면, <악마를 보았다>는 분노가 최고조인 상태의 인물이 “그 감정을 그대로 끝까지 쭉 흐트러짐 없이 가지고 가는 영화다.”(<씨네21> 767호) 김지운은 수현의 감정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스크린에서 확인하는 수현의 복수는 눈먼 자의 맹목적 몸짓에 가깝게 느껴진다. <악마를 보았다>의 과잉된 잔혹의 이미지는 철저하게 관객만이 본다. 수현은 그 잔혹성을 보지 못한다. 아니 보지 않는다. 오직 관객만이 비명을 지르거나 눈을 감으며 그 잔혹함에 반응할 뿐이다. 수현이 경철을 뒤쫓은 직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잔혹한 상황에 처해지고, 그때마다 과잉된 이미지는 스크린을 검붉은 피와 훼손된 신체로 채우지만, 수현은 이에 대해 어떤 충격을 받거나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분노가 인물의 입체감을 삼켜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수현은 자신의 복수가 의도하지 않은 또 다른 누군가의 고통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수현의 흐트러지지 않는 감정’이란 신체 훼손의 스펙터클을 전시하기 위한 일종의 알리바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수현의 눈이 먼 이상, 그는 잔혹한 스펙터클에 대한 반응이기도 한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이는 신체 훼손 이미지 등의 과잉된 스펙터클이 점층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궁극적인 동력으로 작동한다.
수현은 왜 항상 뒤늦게 도착하는가
<악마를 보았다>의 내러티브는 수현의 행위를 인과율적으로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김지운의 관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너무도 쉽게 내러티브의 인과율을 벗어나버린다. 물론 그러한 사례를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인과율적 내러티브의 생략이 스펙터클의 전시를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인과율적으로 어긋나면서 가장 납득되지 않는 설정 중 하나는 여성들이 강간의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수현의 도착이 왜 반복적으로 지연되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그 원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수현은 그냥 그 자리에 늦게 도착했을 뿐이다. 그런데 인과율적으로 생략된 수현의 때늦은 도착(倒着)이 영화의 도착(倒錯)적 욕망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쉽게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경철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는 어떤 패턴의 변화가 있다. 경철의 첫 번째 살해 대상. 그 여인은 수현의 약혼녀다. 우리가 보는 것은 사정없이 구타당하는 것과 발가벗겨진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경철 친구의 말을 참고한다면, 이 생략된 시간에 경철은 수현의 약혼녀를 강간했을 것이다). 두 번째 살해 대상. 버스를 기다리던 여성 역시 수현의 약혼녀와 유사한 방식으로 처리된다. 그런데 세 번째, 네 번째 살해 대상에서는 그 패턴이 다르다. 여고생과 간호사는 구타 대신 그녀들이 옷 벗는(또는 벗겨지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패턴 변화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수현의 때늦은 도착과 무관하지 않다. 수현은 여고생의 팬티와 브래지어는 벗겨지지만 경철의 그것이 삽입되지는 않은 순간, 간호사가 오럴 섹스의 대상은 되지만 삽입의 대상은 되지 않는 순간에 도착한다. 한발 늦은, 또는 한발 빠른 도착. 그렇다면 왜 하필 많고 많은 여성 중에 그녀들이 간택된 것일까? 그녀들의 복장에 답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해 보인다. 페티시즘적인 성적 도착(倒錯), 그러니까 일본 AV(Adult Video)의 주요 소재인 복장 도착과 관련한 포르노그래피적 욕망 말이다. 일본 AV에서 복장이 성적 매력을 부여하는 대표적인 여성 캐릭터가 여고생과 간호사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캐릭터가 일본 AV업계를 지탱시키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는 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인과율적 설명이 삭제된 수현의 때늦은 도착은 복장 도착증적 쾌락의 전시회 이후에 이뤄진다. 복장 도착증에 빠진 자들에게 여고생과 간호사의 성적 매력은 어디에 있는가? 몸? 아니다. 그 쾌락은 어디까지나 그 신분을 지시하는 복장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일본 AV에서 여고생은 섹스 중간에도 교복 치마를 벗지 않는 경우가 있고, 간호사는 참 불편하게 보이는 간호사 모자를 쓰고 섹스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악마를 보았다>는 여고생의 하얀 속옷(이는 한국 에로영화에서도 여고생을 환유적으로 지시하는 대상이다)이 노출되는 순간에 방점을 찍기도 하고, 특히 간호사가 옷을 벗는 순간은 롱숏으로 꽤 길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여고생과 간호사의 복장이 몸에서 미끄러지는 도착적 스펙터클의 전시를 위해 수현의 도착은 지연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장면을 두고, 경철의 성적으로 뒤틀린 악마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짐승 같은 놈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해도, 이 장면이 경철의 캐릭터와 관련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이 장면들이 가해자의 악마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것 못지않게, 피해자의 고통을 도착적으로 즐기려는 욕망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악마를 보았다>가 인과율의 내러티브에 지지되기는커녕 오히려 자극적 장면의 전시를 위해 그것을 비켜나고 있다는 점은 이 영화의 스펙터클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악마를 보았다>는 영화 전체가 복수의 종결을 유예시키며 전개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장면들은 인과율이 거세된 복수의 행위와 과잉된 스펙터클의 전시가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가장 징후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충분한 설득없이) 수현의 복수가 지연될 때, 내러티브의 텅 빈 공백을 스펙터클이 덮어씌운다. <악마를 보았다>에 대한 페티시즘적 탐닉의 끝이 궁극적으로 공허함일 수밖에 없는 것은, 비어 있는 이미지, 자신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더욱 잔혹해진 이미지에 대한 쾌락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윤리적 딜레마가 없는 영화의 허망함
천사의 날개가 악마의 눈이 되어 먹잇감을 바라보는 영화 도입부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는 꽤 매력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설정이 새롭지 않을뿐더러 더 중요하게는 그러한 아이러니가 영화 전체적으로 녹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와 유사한 장면은 경철이 두 번째 살해를 마친 뒤 스킨을 정성스레 바르고 기타를 치는 장면이다. 이는 경철에게 어떤 아이러니가 내재해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겠지만, 궁극적으로 이 장면은 경철의 캐릭터에 통합되지 못한 채 예외적인 장면으로 남고 만다. 이는 경철이 친구와 만났을 때, 친구가 세상을 뒤집으려 했던 젊은 시절을 회고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거론한 장면만 가지고 말한다면) 친구의 이야기는 <복수는 나의 것>을 상기시키고, 살해 뒤 경철의 모습은 <케이프 피어>(마틴 스코시즈)의 로버트 드 니로를 연상시킨다(그가 긴 머리를 쓰윽 뒤로 넘기는 장면은 특히 그렇다). <악마를 보았다>는 여러 영화를 혼성모방하지만, 그것이 영화 내적으로 통합되었다기보다는 (또는 반대로 그것들이 서로 충돌하며 비균질적인 매력을 주기보다는) 참조한 영화들이 그저 엉기성기 묶여 있는 듯한 느낌에 가깝다.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다는 것과 그것이 내적으로 잘 통합되어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악마를 보았다>는 도입부 장면과 달리 아이러니한 매력이 없는 단선적인 성격의 영화다. 영화는 경철에게도 아이러니한 면모를 부여하려 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치광이 개사이코로 머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악마를 보았다>의 문제는 경철이 아닌 수현이다. 이 영화가 괴물의 심연을 바라보다 괴물이 된 수현에 대한 영화라 말하는 것에, 나는 그다지 동의할 수 없다. 난 괴물이 된 수현의 모습은 봤지만, 그 이전에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다. 영화의 아이러니를 살려야 했다면 그것은 경철이 아니라 수현이어야 했다. 아쉽게도 수현에게는 윤리적 딜레마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수현 내부에 약혼녀를 죽인 살인마에 대한 분노만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그와 팽팽하게 줄다리기하는 또 다른 의지가 느껴져야 한다는 뜻이다. 수현에게는 충분히 그럴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신체 훼손을 중심으로 한 스펙터클의 악마를 보여주기 위해 그 잠재력을 스스로 죽여버렸다.
물론 이것이 <악마를 보았다>가 그러한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영화는 경철에게 복수하는 단계마다 운을 맞추듯 수현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클로즈업의 시작은 약혼녀의 시체가 발견되면서부터다). 그런데 나는 무수히 반복되는 클로즈업이 영화에 단단히 붙어 있기보다는 기계적으로 삽입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악마를 보았다>는 수현에 대해 내러티브적으로는 인색한 반면, 복수의 스펙터클을 세부적으로 묘사하는 데는 너무 후하다. 수현의 행위가 적절한 인과율을 만나지 못할 때, 그것은 기계적 운동에 가까운 복수의 스펙터클을 재생한다. 김지운의 전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인물의 기계적 운동만으로 스펙터클을 창출하며 영화 전체를 이끌어간 작품이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만하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아니다. 스펙터클의 향연 자체가 제아무리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윤리적 결단의 파토스가 결합되지 않는다면, <악마를 보았다>는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제스처를 반복하는 영화에 머물 수밖에 없다.
<악마를 보았다>가 참조한 영화 중 하나로 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은 복수를 연쇄시키는 메커니즘과 그 동력에 관한 영화였다. 운명에 가까운 복수의 그물망에 걸린 자들은 복수로서 자신의 행위를 추동시키지만, 그 속에는 윤리적 딜레마와 그에 따른 어떤 결단의 순간이 내재해 있었다. 그렇다면 <악마를 보았다>는 복수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김지운은 <악마를 보았다>가 “전리품이 없는 싸움에 뛰어든 한 남자의 허망한 파국”이라 말했다. 이는 복수로도 이룰 수 없는 실재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의미할 것이다. 복수극에 어울리는 주제다. 그런데 <악마를 보았다>를 통해 내가 경험한 허망함은 수현의 복수가 전해준 선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화 관람 자체에서 오는 허망함에 가깝다. 김지운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것은 복수의 스펙터클에만 매달린 한 영화의 허망한 파국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