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닥친 2010년의 여름. 배우 이정진에게 올해는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분명한 건, 적어도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데 있어서 올해를 빼놓을 순 없게 생겼다. <마파도> 이후 5년 만의 스크린 복귀. 권혁재 감독의 <해결사>에서 이정진은 자신의 사욕을 위해 해결사(설경구)가 가는 곳마다 끔찍한 덫을 놓고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냉혈형사 장필호를 연기한다. 십년을 훌쩍 넘은 이정진의 연기 커리어에 이보다 더 파격적인 행보는 없었다. 삼십대 초반, 이정진의 보폭이 성큼 넓어졌다.
-요즘 검색어 이정진을 치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쁘다’다. 쉬는 게 오히려 어색한 경지에 달했다고 들었다.
=어느새 보니 내가 그 일을 다 하고 있더라. (웃음) 초췌해져가고 있다고 할까. 그래도 이렇게 작품하기 힘든 시기에 바빠서 오히려 기분이 좋다. 데뷔한 이후 활동시간에 비해 그동안은 좀 쉬엄쉬엄 갔던 것 같다.
-요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역시 <도망자>인가? 얼마 전엔 도쿄에 있다더니 연일 필리핀, 마카오 등 아시아를 종횡무진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해결사>는 봄에 촬영했고, 지금은 <도망자>와 <남자의 자격>으로 바쁘다. 요즘은 몇 개월 동안 해외에서 <도망자> 찍다가 국내 스케줄 있으면 잠깐 들어왔다가 또 나가는 생활의 연속이다. 오늘도 아침에 마카오에서 막 왔다.
-<해결사>는 그럼 오늘 시사회에서 처음 본 건가.
=촬영할 때 현장편집본도 보고, 후시도 보고 그랬으니까, 정식 기자시사 전에도 이미 본 셈이다. 그땐 영화 전체를 보지 못했지만 나름 기대가 있었다. 오늘 보고 나니 모두들 열심히 했는데, 그 결실이 느껴지더라.
-기자시사회에서 이 영화가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스스로 ‘이정진의 새로운 대표작이 될 거’란 기대를 드러냈다.
=<해결사>는 순전히 배우로서의 욕심 때문에 택한 작품이다. 회사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영화는 선택이 쉬운 작품이 아니다. 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끌어내야 하는, 배우로서의 과제가 명확한 작품이다. 영화 보고 나서 개인적으로는 내가 연기한 부분에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이정진 필모그래피에 절대 마이너스가 될 영화는 아니다’라는 만족을 할 수 있어서 기쁘다.
-작품을 선택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 남자 대 남자의 구도라면 결정내릴 때 상대배우도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 같다.
=물론 경구 형 때문에 쉽게 결정한 게 사실이다. 이미 경구 형이 캐스팅되어 있었고, 처음 시나리오는 지금의 대립구조보다 더 경구 형 원톱 느낌에 가까웠다. 남자 둘이 나오는 영화가 대부분 둘이 파트너를 이루는 경우인데, <해결사>는 좀 달랐다. 일대일로 서로 대립하는데 촬영 전부터도 그 긴장감이 전달되더라. 이 경우에 서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면 오히려 효과가 반감되는데, 이번 영화에선 그런 욕심 자체가 없었다. 그러니 막상 촬영 때는 부담없이 찍을 수 있었다. 경구 형이 워낙 상대방의 호흡까지 맞춰줄 수 있는 배우이다 보니 잘 따를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 또 이런 영화를 만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악역을 택했다는 점에선, 뭔가 각오가 있어 보였다. 기존의 착한 이미지를 배반했다.
=나의 출세를 위해 주변을 져버린다는 점에선 ‘필호’는 악역이 분명하다. 그런데 또 따지고 보면 악역이지만 본성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대본을 보면서, 필호를 비롯한 인물들이 2010년 지금의 한국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기업과 정치가 유착하는 구조에서 충분히 탄생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그럼직한 인물이다.
-낮게 깔린 전화 목소리가 사뭇 달라 보였다. 악역의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염두에 두었던 게 있나.
=특정 캐릭터를 참고하거나 하진 않았다. 사실 차승원씨 같은 이미지를 표현해낸다면 악역으로써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쑥 들어간 볼살부터, 훌륭하게 악역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런데 오히려 난 <남자의 자격>의 이윤석 같은 사람이 악역을 하면 어떨까 싶더라. 평소 아무렇지도 않게 있다가, 어떤 계기로 악의 본성이 드러나면 그런 사람이 더 무서울 수 있겠더라. 필호 같은 경우, 최대한 차분하고 조용하려고 애썼다. 그게 오히려 후반부에 본색이 드러날 때 파급효과가 나지 않을까 싶더라.
-이번 결정에 의외의 반응이 많을 거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결정을 즐기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말죽거리 잔혹사> 때는 부잣집 아들 같은 얌전히 이미지를 피하려고 감독님한테 모범생 ‘현수’ 대신 학교짱 역할이었던 ‘우식’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말죽거리 잔혹사> 끝나고 <마파도> 한다고 했을 때도 갑자기 코믹을 하겠다고 하니, 다들 다음 선택으론 의외라 여기더라. 근데 예상 밖의 결정에도 영화가 호응을 얻었다. <남자의 자격>을 한다고 했을 때도 기자들 반응이 한결같았다. 다들 ‘이 배우, 연기 좀 하려는 줄 알았더니 결국 이 프로그램으로 예능으로 옮겨가는구나’ 했다. 예능하면 좋은 드라마나 영화 주연은 힘들다는 게 정설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해결사> 하고 다음 작품 <도망자> 하면서 그런 선입견을 깨나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예능 말이 나와서 그렇지만, 사실 예능 체질은 아니다. (웃음) 빠르고 살벌한 예능의 세계와는 여전히 동떨어져 보이는데, 시청자는 그런 부조화를 오히려 좋게 평가하더라.
=처음 이 프로그램 섭외 들어왔을 때, 나도 ‘내가 무슨 예능이야’ 했다. 그런데 나 말고 다른 출연진들을 듣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모아도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나와서 뭔가를 하는 게 오히려 다른 예능과 달리 신선해 보이더라. 생각해보면 <남자의 자격> 출연진 모두 산전수전 겪은 분들이다. 대한민국에서 그 나이 먹으면서 어떤 순간 한번 꺾여보기도 했지만, 그걸 또 잘 극복해서 지금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과 같이 일한다면 그 자체로 보람이겠다 싶었다.
-지금의 생각은 어떤가. 그 결정이 잘한 선택이었나.
=너무 감사한다. 이 프로그램하면서 내가 얻는 것이 너무 많다. <남자의 자격>팀이 증권사 광고도 찍지 않았나. 여배우가 화장품 광고 하는 것이 일종의 상징인 것처럼, 증권사 광고 역시 신용, 신뢰도 없이는 접근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우리 팀이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저들은 장난은 치지 않아, 하는 시각이 성립된 것이다. 마라톤 편이나, 지리산 등반 편에서도 어려운 상황을 통해서 웃기기보다 진실하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멤버들이 보여주는 진솔한 모습을 통해서 매번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2002년 <해적, 디스코왕 되다>로 첫 주연작을 맡았을 때 스타덤에 올랐었다. 그런데 데뷔 이후 이정진 하면 떠오르는 색깔을 구축하는 데는 좀 소홀한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스스로 엄격한 평가를 내린다면.
=절실하게 배우를 원했던 적은 없었다. 워낙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예전의 친한 친구들이 내가 이 일을 하는 것 자체를 신기해했으니 말이다. 난 내가 그냥 운동화에 면티 입고 일하는 평범한 회사원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우연히 모델 생활을 하게 됐고, 배우가 됐다. 운이 좋았던 거다. 그런데 연기수업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나름 연기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게 있다면, 자고 일어나서 스타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게 그걸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다. 함께 연기한 동료 중에서도 꾸준히 활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잊혀진 배우도 많다. 연기를 계속하는 이들은 결국 극소수다. <무간도> 개봉했을 때, 유덕화 보면서 어린 친구들이, “저 배우 누군지 모르겠는데 연기 참 잘한다”고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난 유덕화 같은 배우가 진정한 승리자라고 본다. 자기관리 철저히 해서 끝까지 진실되게 연기할 수 있는 배우 말이다.
-예능을 하면 자연인 이정진의 모습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참 숫기가 없어 보이는데도, 의외로 주변엔 사람들이 항상 끊이질 않는다.
=전생에 착한 일 많이 했는지 인복이 있다. 이상하게 또래 친구 중 단짝이라 할 만한 친구들은 없는데, 주로 형들과 많이 친하다. 이쪽 일이 친분이 곧 일로 연결되는 편인데, 난 사람 사귀는 데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거나, 작품을 함께할 거니 투자의 의미로 사귀어보자는 의도 같은 게 없다. 사심없이 만나다보니 오히려 그게 통했나보다. 박진영 형이랑 친한데, 어느 날 진영이 형이 “넌 좀 그런 사교력이 필요한 것 같아” 하고 충고를 해준 적도 있다. (웃음) 아, 참 오늘 VIP 시사에는 아이돌 후배가 온다고 문자도 보냈다. 선배들한테 많이 받았으니, 이제 어린 친구들, 후배도 좀 챙겨야겠다.
-<도망자>는 <추노>의 천성일 작가와 곽정환 감독 콤비가 다시 뭉친 하반기 기대작이다.
=정지훈, 대니얼 헤니, 이나영 등 함께 출연한 배우들이 기대된다. 그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쁘다. 난 의문의 사건과 관련해서 (정)지훈을 쫓는 외사부 형사 역을 맡았다. 보기엔 심각해 보이는데 푸는 방식은 굉장히 재미있어서 나 역시 기대된다. 해외 로케이션이 많은 작품이라 홍콩, 마카오, 필리핀, 타이를 오가며 계속 촬영했다. 당분간은 그럴 거다.
-<해결사>는 팽팽한 긴장감을 끌고 가다, 마지막 장면에서야 설경구씨와 액션 연기를 선보인다. 마지막 액션장면을 보니, 좀더 본격적인 액션 연기가 기대되던데 <도망자>에선 어떤가.
=<도망자>는 거의 대사만큼 액션이 많은 작품이다. 지훈이랑 하도 같이 몸을 맞대고 액션장면을 많이 해서, “우리 이러다 정분나겠다”고 했다. 여배우와도 그 정도는 아닐 거다. (웃음) 촬영 때 더위 때문에 애도 많이 먹었다. 특히 상하이 촬영 때는 42도의 폭염이라 촬영이 쉽지 않았다. 낮에 하도 땀을 흘리니까 저녁에 수분이 다 증발했는지 땀도 안 나더라. (웃음) 얼굴이 탄 게 아니라 벌겋게 익는 수준이다. 그걸 보고 누가 ‘이정진씨 술 마셨어요?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요?’라고 묻더라. (웃음)
-그래도 팬들에겐 또 더 멋있어진 ‘비덩’(비주얼 덩어리)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겠다.
=꼭 그렇진 않다. 같이 출연하는 대니얼 헤니씨는 같은 남자가 봐도 몸이 멋있더라. 그래서 지훈이랑 같이, “우리도 좋은 음식 먹으면서 몸관리하자” 했는데, 막상 촬영하다 보면 너무 힘들어서 저녁엔 꼭 햄과 라면을 먹게 된다. (웃음)
-낼모레면 또 해외로 훌쩍 가버리는데 떠나기 전에 이건 물어봐야겠다. 추석영화가 무려 다섯편이다. <해결사>의 예상 기대치는.
=<말죽거리 잔혹사>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든 대진운을 겪었다. 그때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랑 외화는 <반지의 제왕>이 함께 개봉했으니, 나야 마음이 가볍다. 오히려 영화마다 흥행한 경구 형이 걱정이겠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