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그 섬, 터부가 들끓는 용광로로구나
2010-09-16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매혹과 혐오를 중탕한 혼종의 에너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바야흐로 몸서리처지는 원한의 스펙터클이 스크린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응징의 카타르시스를 갈망하는 괴물들의 재림이라고나 할까? 영화가 관객에게 안락한 관람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이같은 방식으로 드러낼 때, 그러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감독의 의도는 이야기의 표면에 안주하기보다 그 불편한 표현 속에서 창조적인 의미를 찾아달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여진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하 <김복남>)에서 신인 감독 장철수는 이러한 창작의 전략을 구사한다. 이 영화의 드라마는 도식적으로 느껴질 만큼 단조롭다. 문명의 이기가 만연한 광명천지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을 것 같은 외톨이 섬이 있다는 것, 유년기를 이 섬에서 보낸 도시로 간 처녀 해원(지성원)이 낙향해 친구 복남(서영희)을 만났다는 것, 그리고 아름답게만 보이던 폐소공포증적인 섬사람들의 교활한 마성에 고통받던 복남의 시련이 복수로 이행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룬다.

내외로 주목받으며 올해의 데뷔작으로 떠오른 <김복남>을 통해 장철수는 점진적인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연출에 대한 비상한 이해력을 보여준다. 관객의 감정을 흔드는 순간들은 느리게 확대되어가는 분위기의 폭력 안에서 배열된다. 하지만 장르의 쾌락을 조율하는 재능을 상회하는 이 영화의 가치는 한데 모이기 힘든 인물과 이야기, 스타일을 공존시킨 왕성한 응용력에서 찾아진다. 어느 모로 보나 <김복남>은 수려한 웰메이드라고 부르기 주저된다. 거칠게 건너뛰는 서사의 비약이나 숏 연결의 둔탁한 리듬, 양립하기 힘든 세계관과 미학의 공존 등 통일성을 숭배하는 전통에 따르자면 하자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산업의 상업화 주술에 홀린 근자의 신인 감독들과 완연히 구별되는 장철수의 재능은 이 제어되지 않은 불균질성에 있다.

김기영의 <이어도>와 장철수의 무도

외견상 <김복남>은 만듦새가 고르지 않다. 러닝타임을 반으로 쪼개 앞과 뒤가 완연히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장르의 경제학에 편승한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그 틀을 과격하게 부숴버리려는 파괴의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김복남>이 임상수의 <하녀>와는 상이한 방식으로 김기영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생각한다. 임상수의 <하녀>가 원한에 사무친 하층민 여성의 복수극이라는 계급적 관점에서 김기영을 참조했다면 <김복남>과 김기영의 근원적인 친연성은 도저한 과잉의 스타일에서 찾아진다. 원시적 생명력과 주술적 마성이 온존하는 섬의 공간적 함의에서는 김기영의 <이어도>가 즉각적으로 떠오른다. 섬 여성들의 강렬한 생명력과 대비된 죽음을 향해가는 남성 캐릭터, 생명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죽음을 상징하는 푸른색의 대비를 이룬 색채 상징은 <이어도>의 그것이며, 고립된 섬에서 벌어지는 비원의 죽음을 공간이 지닌 암시 안에 녹여낸다는 점에서도 그 영향력이 짐작되는 바이다. 비단 60~70년대 김기영이 아니더라도, 80년대 한국영화계를 풍미했던 ‘원녀’(怨女) 공포영화 시리즈와 <김복남>의 근친성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피칠갑을 하고 낫을 든 서영희의 오싹한 이미지가 말해주는 것처럼 이것은 원망의 곡소리를 울리는 여자의 복수극이다.

서사의 흐름상 <김복남>은 이분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속적으로 관객의 시신경을 괴롭힐 뿐 아니라 특정 장면에서 분열증적으로 보이는 영화는 폐쇄적인 시골 공동체를 장악한 주민들간의 적의를 묘사하는 데 전반부를 할애한다. 캐릭터의 행위보다 그들을 둘러싼 불안과 신경증이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내는 전반부는 분위기로 압도하는 드라마다. 이에 비해 후반부는 행위의 동기에 대한 설명이나 부연을 미뤄둔 채 끔찍하고 가차없는 복수극을 상연한다. 이 순간부터 군침을 흘리는 백치 같은 남자들과 오로지 약자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노파들이 목이 댕강 날아가고 잘근잘근 썰어진다. 극악스러운 무뢰배들에 대한 후련한(?) 보복이 행해질 때 객석에선 갈채가 터질지도 모른다.

캐릭터들간의 구도 역시 이분법적이다. 모든 영화가 캐릭터를 만들지만 그들 모두가 생명을 갖는 것은 아닌데 비해 서영희의 김복남이 남기는 인상은 강렬하다. 남자들이 자행하는 착취로 인해 광기로 침잠하는 복남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보여주기 위해 장철수는 굴종과 희생에 굳은살이 박힌 한 여인이 살인귀로 변하는 과정을 침착하게 쌓아간다. 동시에 이 괴기한 농촌 공동체의 마녀들이 남자들의 성적인 도락을 어떻게 묵인하는가를 낱낱이 까발린다. 굴종의 섬을 탈출해 ‘도시 여자’가 된 해원은 복남의 훼손당한 여성성으로부터 멀리 도망간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근사치의 고통을 나누고 있다. 서울의 은행원으로서 해원이 겪는 전근대적인 차별과 수모는 착취의 섬에 만연한 그것을 상기시킨다. 도시와 시골은 여주인공 해원과 복남에게 각각 다른 의미에서 폭력적인 장소인 셈이다. 살인사건을 목격하고도 진실을 은폐한 해원의 행위는 복남이 사는 무도에서 또 다른 살인사건의 목격자가 되었을 때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된다. 해원이 시달리는 공포와 신경증은 시골 여인 복남에게 좀더 강화된 폭력의 형태로 가해진다. 피를 나누지 않았다뿐인 이 자매는 근원적으로 친밀한 존재이다. 해원은 복남에게 있어 자유로운, 동경할 수밖에 없는 꿈의 세계를 이루는 대상이고, 복남은 해원에게 도망가고 싶은 원체험의 대상이며 존재의 그림자이다. 환언하면 그들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도식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이분법 구도가 <김복남>의 내러티브를 살짝 도포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분화된 세계 인식을 뚫고 나오는 잉여들, 상이하거나 상반되기까지 한 표현 형태의 고르지 않은 분출이다. 결코 숙련된 솜씨라고 보기 힘든 시각적 수사의 모순을 자유롭게 다루는 장철수의 혼종 능력이 이 대목에서 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이와 관련지어본다면, <김복남>은 대립하는 두 가지 항에 모두 그 의미를 닿도록 만든다. 전통과 현대, 도시와 시골, 남자와 여자로 대비되는 이분법적 구도가 은근히 깨어지는 순간인데, 심지어 장철수는 동일한 시퀀스에서조차 모순된 감정을 야기하는 확고한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다. 예컨대 공동체의 이상이 깨어지기 이전, 전근대적인 공간이자 문명의 오염에서 비껴난 청정지역 무도는 목가적인 섬마을의 외양과 달리 황막한 사회의 구조와 악덕의 온상이다. 그곳은 이타심과 인정이 넘치는 공동체도, 문명의 이기에 물들지 않은 순수 무구성의 공간도 아니다. 이러한 다층적인 묘사의 결과는 몽환적인 무드를 만들어내며, 장르의 질서를 대담하게 흩트리는가 하면, 동성애와 근친상간, 시체애호증을 포함한 터부를 무심히 전시하는 퇴폐적인 영화로 <김복남>을 끌고 간다.

인간을 다층적으로 묘사하는 드라마 구조

일면만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인간에 대한 <김복남>의 탐구는 두터운 양감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 안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의식이 투영되어 있지만 종종 장철수는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이물스러운 정서를 그 안에 흘린다. 정연한 논리와 도덕률로 설명되지 않는 인간 욕망의 본바탕을 드러내려는 이 영화는 리얼리즘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복수의 서사에만 연연하지 않고 질탕한 피냄새를 풍기는 원초적인 야성의 삶을 육질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도식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단순한 내러티브 구조를 극복하는 <김복남>의 이면은 이와 관련된다. 도시와 시골, 현대와 전통, 남자와 여자, 가학과 피학의 이항대립 위에 세워진 것처럼 보이는 서사는 일순간 일방통행적 이분법의 논리를 찢고 탈주한다. 일견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자명해 보이는 구도 안에서 명백히 가해자의 자리에 있는 남편 만종까지도 탐욕스러운 노파들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딱한 처지로 그려진다. 이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관찰하는 것보다 세상 혹은 인간의 내면은 복잡하며 미스터리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인가? 황막한 세속의 이기에 강박된 인간의 초상을 묘사하는 <김복남>의 가치는 이같은 의미의 복잡성에 있다.

이런 주장을 좀더 밀고 나가보자. <김복남>은 서울과 유폐된 섬 사이의 대조와 유사성을 폭풍전야의 고요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복남이 오랜 세월 한과 노여움을 삭여온 여성이라 할지라도, 무엇이 그를 미치광이로 만들었는가에 대한 이 영화의 결정은 다소 모호하게 처리되고 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복남이 복수의 화신으로 돌변하는 순간의 장면화를 살피는 것이 요긴하다. 완악한 섬의 착취자들이 평상 그늘에서 한가로이 주연(酒宴)을 벌이고 있을 때, 금과옥조 같은 여식을 잃은 가련한 여인 복남은 뙤약볕 아래 씩씩거리며 감자를 캔다. 착취의 사슬에 결박당한 무지렁이 시골 아낙에서 적개심에 불타는 원녀로 그가 표정을 바꾸려는 순간, 이 이행의 동기화는 엉뚱하게도 복남의 정수리로 내리쬐는 따가운 햇볕으로 정당화된다. 현실에 대한 정치한 인식 아래 출발한 영화가 별안간 실존주의적 태도를 드러내는 이 순간에 대해, 복남은 “태양을 한참 째려봤더니, 말을 하대”라고 말함으로써 해석의 모호함을 가중시킨다.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따가운 태양이 야기하는 존재론적 불안에 휩싸인 복남은 낫을 들고 반격에 나선다.

순간 명백하게 그 기원을 가지고 있었던 복수의 동기화는 모호한 관념에 자리를 내준다. 일종의 신경증적인 열기와 태양의 공포에 의해 관통된 복남의 표변 안에는 복합적인 태도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김복남>은 세속을 장악한 악마들을 응징해야만 하는 복수 판타지인가, 존재의 불안과 정신병적인 상태에 대한 실존적 탐구인가, 모든 긴장을 유발하는 것은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먹이사슬적 관계인가, 끈적끈적한 섬의 공기인가, 명백히 현실에 기원을 둔 것처럼 진행되던 그제까지의 이야기는 이 순간부터 삐딱하게 굴절된다. 균일하지 않은 욕망들이 충돌하는 장으로서 <김복남>의 특성을 드러내는 장면들은 더 있다. 착취자들을 하나씩 처단하는 복남의 오디세이가 남편 만종에게 이르렀을 때, 그녀는 해원을 인질로 잡고 위협하는 만종의 칼과 손가락을 혀로 핥는다. “자기에게 미안해서 그려요”라는 복남의 말은 성적으로 소원했던 남편에 대한 측은지심을 은연중에 흘리면서 폭력으로 점철된 만종의 이전 행위에 대한 논리적 동기화로 작용한다.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말하자면 복남에 대한 만종의 학대는 섹슈얼한 소외에 대한 비뚤어진 보복심인가, 만종을 향한 복남의 태도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 대한 또 다른 복수인가, 만종은 진심으로 복남을 사모한 것인가 따위의 위문.

단일한 특성으로 균질화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인간의 특성을 묘사하기 위해 장철수는 다층적인 맥락을 심어두었다. 텍스트의 표면은 울퉁불퉁하며 따라서 구멍이 많다. 몇몇 평자들로부터 여성주의 복수극으로 불리는 이 영화의 여성에 대한 태도는 때때로 이중적이며,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하다. 폭력과 성욕의 노예라고 할 섬의 남성을 응징하는 여성 복수극으로 달려가는 후반부와 달리 전반부는 종종 여성의 육체에 대한 관음증을 숨기지 않는다. 해원의 뒤를 밟는 철종의 시선, 술집 작부의 옷을 찢으며 오럴섹스를 강요하는 만종의 우악스러운 손길, 복남과 해원의 벗은 몸을 보여주는 목욕신, 만종이 배다른 딸 연희의 몸을 쓰다듬는 신 등에서 에로틱한 시선은 노골화된다. 욕정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한편 능청스럽게 작동하는 에로틱한 쾌락의 시각화에서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일관된 태도를 추정하기란 힘들다. 욕망의 저열함을 폭로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시선의 쾌락을 즐기는 것으로 기능하는 이 장면들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여성에 대한 영화의 혼란스러운 태도와 여성/남성 인물들의 관계는 두 메인 캐릭터들간의 레즈비언적 끌림을 암시하는 몇몇 장면들에 의해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전달된다. 복남이 해원의 요가를 흉내내는 장면이나 평상에 누운 두 여인의 모습에서 암시적으로, 친구 이상의 감정을 교류하는 유년 시절에 대한 플래시백과 한밤의 목욕신에서 명시적으로 처리되는 복남과 해원의 관계는 성적인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김복남>은 관객의 신경을 가지고 유희를 벌이려는 듯 군다. 공통점이 별로 없어 보이는 두 여성 캐릭터들을 다룸에 있어 장철수는 광기에 휩싸인 극단적인 혼란으로 그들을 이끌어감으로써 근본적으로 상이한 특징들을 섞어놓는다. 처음에 해원은 일차원적이고 이기적이며, 어떤 골치 아픈 일에도 연루되기를 꺼려 하는 차가운 여자로 묘사된다. 도입부는 인간미를 결여한 해원의 성격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열린다. 거리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인의 목격자로서 그녀는 명백한 살인자들에 대한 증언을 거부함으로써 성격을 드러낸다. 해원은 복남과 완전하게 반대되는 인물이다. 복남은 섬 남자들의 성적 노리개이며, 일생 동안 견고한 섬의 네트워크에 의해 고혈을 착취당하는 고단한 노동자였다. 지옥 속에서 그녀가 삶을 부지하는 유일한 이유는 딸 연희이며 감옥과 같은 처지에서 딸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열망이다. 자기만 아는 전형적인 이기의 인간인 해원에 비해 자기 희생적인 복남은 욕망을 상실한 여자처럼 보인다. 도시에서 섬으로, 해원에서 복남으로, 드라마에서 호러로 점진적으로 내러티브를 진전시키면서 장철수는 미묘하고 복잡한 인물들의 상태를 도덕의 이름으로 평면화시키지 않는다. 단면만을 드러내는 인간의 본질을 완전히 꿰뚫어 알아낼 수 없다는 듯 모든 인물들은 순결하지 않다. 해원은 휴식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들의 기억처럼 어둡고 원형적인 악과 대면한다. 자연은 아름답고 인간은 악마적이기만 한가. 아름다운 자연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며 이 유령적이며 외진 섬을 포위하고 망가뜨린 뒤 수수방관하는 원흉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상당한 시간 동안 관객은 해원이 이 살풍경한 비극에 중립적인 시선을 취하고 있다는 환상을 가질 수 있지만, 장철수의 미장센은 그 반대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악몽의 주체이기보다 방관자이다.

리얼리스트와 표현주의자의 구분을 지우고

시작부터 끝까지 불안과 신경증을 고조하는 <김복남>은 엄밀한 전환장치 없이 드라마에서 고어로 이행한다. 장르를 위한 의미없는 죽음과 달리 이 살육은 특징적인 방식으로 무대화되고 있다. 낫의 새로운 사용법을 발견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폭력적인 후반부는 유혈이 낭자한 도살극이다. 가장 민중적인 연장(?)인 낫으로만 행해지는 이 피투성이 무도회는 인간의 깊은 내면을 파고들어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 <김복남>의 묘사는 동물적 본성 또는 가장 음습한 욕망으로 우리를 돌려놓는다.

김기덕의 문하에서 익힌 실체험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장철수는 전통적 영화 학습이나 동시대 영화 작품에 빚진 바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감독이다. 장면들이 만들어내는 날선 긴장과 달리 그들의 연결은 체계적이지 않다. 특히 복수가 종료된 이후 이어지는 종결부 시퀀스들은 늘어지는 감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쁘게 말하면 정돈되지 않은 잡스러운 취향의 산물이며, 좋게 말하면 그 잡스러움이 기성의 미학을 파괴하고 갱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은 돌연변이적 성운이다. 개인적으로 후자쪽에 기대를 걸게 된다. 이같은 기대는 처음에 낯섦과 기이함, 상당한 당혹스러움과 저항을 한꺼번에 안기던 내러티브가 시간이 지날수록 예상치 못한 흡입력을 발산하면서 숨가쁘게 몰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전술했듯 이야기와 스타일, 형상화의 모순과 때때로 작렬하는 비논리성은 <김복남>의 단점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충동 안에서 매혹과 혐오(몇몇 장면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를 동시에 자아내는 이 영화의 참된 가치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김복남>이 목불인견의 고어적 묘사와 숨막히는 분노의 시각화에 몰두하는 이 영화가 관념적인 시정을 문득 보여줄 때 힘을 얻는다. 놀라운 것은 시각적 수사를 다루는 장철수의 숙련된 솜씨가 아니라 이 단단한 내러티브 구조 안에 혼종의 미학을 부려둔 그의 응용력이다. 철저하게 이분화된 서사 구조 안에서 작동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던 <김복남>은 결과적으로 그 이분구조를 파괴하려는 열망을 동시에 내장하고 있다. 이분법적인 세계 인식은 단순히 대립하는 두 범주를 창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두 범주 사이의 위계를 만들어낸다. 여자와 남자, 도시와 시골, 영혼과 육체, 흑과 백 등 이분법적 범주의 어디에도 속하기를 꺼리는 혼종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은 양분화된 체제에 대한 반역이 된다.

<김복남>은 위험스러운 터부가 들끓는 용광로이다. 내용과 형식, 세계관, 스타일을 통해 전면적으로 관철되는 <김복남>의 이율배반성은 일관성과 통일성의 원리 위에 구축된 고전적 미학의 이치를 완곡히 거스른다. 장철수는 드라마와 장르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비켜서는 다채로움과 개성을 지닌 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재목으로 보인다. 사건의 전개가 현실의 논리와 어긋나고, 서사적인 흐름이 유연하게 이어지지 않으면서(특히 후반부가 그렇다), 우화적인 서술과 시적인 묘사, 의도가 뻔히 드러나는 상징 전략, 풍자적 웃음 등 여러 요소들을 섞은 잡스러움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는 혼종의 텍스트 전략이 이 영화의 본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리얼리스트와 표현주의자의 구분을 지워버리는 장철수의 월경(越境)은 자못 흥미롭다. 잡종은 스스로의 잡스러움이 지닌 힘을 자각할 때 비로소 창조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김복남>은 보여준다. 자기 비하적 폭력을 전시하는 최근 유행성 영화들의 탁류 안에서 이 영화가 빛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점이 또한 ‘김기덕의 아이’가 아니라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꾸려나가는 데 있어 장철수의 밑천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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