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하 <김복남>)에 대한 평들은 큰 틀에서 일치한다. ‘투박하고 불균질적이나, 통쾌함이 살아 있는 복수극’ 이 중론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이견이 발견된다. 장병원(<씨네21> 770호 ‘전영객잔’)은 <김복남>을 여성주의 복수극이라고 보기엔 영화의 여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태도가 혼란스럽고 이중적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김복남>의 여성과 섹슈얼리티에 관한 태도는 매우 일관되고 분명하다. 영화는 여성주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편집이나 상징 등 디테일 면에서도 높은 성취를 보인다. <김복남>은 최고의 여성영화이자 장르적 세련미를 갖춘 슬래셔 무비다.
복남과 딸, 복남과 해원, 그녀들의 관계는
해원이 서울에서 겪는 에피소드는 무도에서 일어날 일을 암시한다. 해원의 차로 폭행당하는 여자가 다가와 도와달라지만, 해원은 차 유리를 올린다. 하지만 해원은 사건을 목격하고, 그 뒤 수사에 비협조적이었으나 신원이 노출되어 협박당한다. 은행원인 해원은 가난한 할머니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이는 그녀의 내면화된 ‘과잉억압’ 때문이며, 융통성을 발휘할 수도 있었음이 후배에 의해 증명되자, “엉덩이로 성공” 운운하며 여성간의 반목을 드러낸다. 이후 우연한 사고를 후배의 적대로 오인하여 직장을 잃는다. 두개의 사건은 한 가지를 가리킨다. 여성억압적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여성간의 연대를 외면하고 적대를 내면화하지만, ‘피할 수 없이’ 억압은 되돌아오고, 오히려 자기 존재는 더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이제 환상극장이 열린다. 스크루지 영감처럼, 그녀는 무도에서 ‘현재의 령’과 ‘과거의 령’을 만난다. 복남의 삶은 여성에 대한 물리적, 성적, 사회적 억압의 종합편이다. “본시 빌어먹던 애”였던 복남은 청년들에게 집단성폭행을 당해 임신하고, 만종과 결혼 뒤 구타와 중노동에 시달리며, 시동생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 산다. 복남에 대한 착취와 억압은 시고모를 비롯한 할머니들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된다. 이들은 남성노동력을 특화하여 남성우위를 승인하며, 그 노동력을 착취한다. 복남의 유일한 소망은 딸이 대처로 가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복남이 아는 외부세계와의 끈은 해원뿐이다. 그러나 해원은 ‘서울도 다르지 않고, 너도 성인이니 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며 복남의 긴급한 요청을 거절한다.
산 넘어 산이라고, 만종은 딸을 성폭행한다. 아동성폭력범죄의 47%가 친인척에 의한 것이라는 발표에서 보듯이, 아동성폭행의 상당수는 떠들썩한 강력사건이 아니라 조용한 집안일이다. <컬러 퍼플> <예의없는 것들> <조용한 세상> <301·302> <돈 크라이 마미> <백야행: 어둠 속을 걷다> <포 미니츠> <휴먼스테인> <사이더 하우스> <귀향> <사일런트 폴> <돌로레스 클레이본> <매그놀리아> <나비효과> <텔미썸딩> 등이 이 문제를 다루었지만, 아동들은 피해자로만 그려졌다. 그러나 실제 친족간 성학대 피해아동은 학대에 적응하여 유혹적으로 행동하거나, 가해자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가해자를 보호하거나 충절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딸이 선크림과 매니큐어를 바르고 만종의 목을 끌어안는 모습은 물론, 성매매여성의 뒤통수를 후려치거나, 밥상에서 복남의 자리를 밀치는 모습은 자신을 아버지의 성적 파트너로 사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경악하는 복남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다. 첫째, 딸을 시샘한다고 여기는 만종의 시각이다. 매니큐어를 복남의 얼굴에 뿌리며 “계집년들이란…”이라 말한다. 딸을 보호하려는 모성을 딸과의 경쟁구도로 치환하는 것이다. 둘째, “제정신이니?” 하고 묻는 해원의 시각이다. 이는 중립을 가장한 남성적 시각으로,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모성조차 남근을 둘러싼 경쟁으로 보는 것은, 여성들은 오직 남근적 질서하에서 서로 대립할 뿐이고 여성간의 연대나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연대는 가장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일어난다. 남편과 성관계를 한 성매매여성이 복남을 이해하고 돕는다. 또한 섬을 떠나고 싶지 않다던 딸도 엄마가 맞는 것이 싫다며 따라나선다. 한편 해원은 딸이 죽는 것과 거짓말로 진실이 묻히는 현장을 목도하고도 ‘중립과 불개입’의 입장을 고수한다. 공권력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사건이 수습되었을 때, 해원은 ‘필연적으로’ 다시 위험에 노출된다. 복남의 시동생이 해원을 강간하려는 순간, 이를 막는 것은 복남이다. 이때 복남의 회상인지 해원의 꿈인지 모를 절묘한 편집으로 과거사건이 나타난다.
해원의 침이 묻은 피리를 복남이 불고, 더럽지 않다는 복남의 뺨에 해원이 입을 맞춘다. 그때 소년들이 다가와 해원의 치마를 들추려 하자, 복남이 막아선다. 해원은 도망가고, 피리가 부러지고 복남이 쓰러진다. 이 장면은 이후 복남과 해원의 관계에 대한 축약이자 이후 삶에 대한 복선이다. 복남이 해원에게 품는 감정은 동성애다. 영화는 둘의 목욕장면 등을 통해 퀴어적 입장을 분명히 한다. 복남은 해원을 사랑했지만, 사회적 약자인 그녀는 성폭력에 의해 이성애 관계로 끌려들어간다. 당연히 남편을 사랑할 수 없었고, 그의 몸을 벌레 보듯 하였다. 그렇기에 남편이 성매매여성과 섹스를 해도 꾸역꾸역 밥을 먹고, 성매매여성과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복남에게 해원은 첫사랑이며, 부러진 피리는 헤어진 연인이 남긴 징표다. 복남은 바로 이 회상장면을 기점으로 해원에 대한 짝사랑을 거두어들인다.
원귀영화의 전통을 잇다
복남이 낫을 드는 과정이 <이방인>을 연상시킨다며 관념적이라는 장병원의 평은 적합하지 않다. 매니큐어로 상징적 피를 뒤집어쓴 그녀는 낫을 한번 들었다 놓는다. 만종이 딸을 성폭행했음을 알았을 때, 이미 낫을 들 만큼 분노가 임계점에 달했지만, 딸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딸이 죽고, 해원도 공권력도 배반하자 그녀는 아무 미련이 없다. 그녀가 태양을 째려보는 것은 (한갓진 실존주의가 아니라) 신적 폭력을 행사하던 남성성에 대한 치열한 맞짱이다. <돌로레스 클레이븐>에서 일식에 남편을 죽이는 것은 남성을 상징하는 태양이 여성을 상징하는 달에 의해 가려질 때를 택한 것이다. 그러나 <김복남>은 태양이 가려질 때를 택하지 않고, 정면 승부한다. 법망을 피해 남편을 죽인 돌로레스와 달리, 복남은 이웃은 물론 경찰까지 죽임으로써 자신이 속한 시스템 전체를 절멸시킨다. 유일한 생존자는 치매영감이다. <아리랑>이나 <감자>에서 보았듯 민중적인 연장인 낫을 쓰던 복남이, 거세를 상징하는 연장인 가위를 싹싹 갈아 영감의 머리를 잘라준다. 그는 복남과 마찬가지로 머슴이자 성적 피착취자였으며, ‘호모 사케르’다.
이 대목은 복남의 복수가 여성 대 남성의 대립구도나 무분별한 분풀이가 아니라, 억압과 피억압의 구도를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복남은 “X을 물고 살아야 한다”는 시고모의 말을 뒤집으며 남편을 죽인다. 남편이 든 회칼을 오럴을 하듯 애무하며 남편의 손가락을 씹고, 회칼을 입에 문 채 남편을 찌른다. 그녀에게 남편의 성기는 칼이나 다름없는 흉기였다는 직유법이다. 죽은 남편을 낫으로 저미고 똥처럼 보이는 된장을 처바르는 장면은 완벽한 복선과 상징의 활용이다. 해원의 흰 원피스를 입고 육지로 나온 복남이 파출소 계단을 걷는 장면은 귀신처럼 보이는데, 이는 원귀영화의 전통을 잇는 캐릭터임을 말함과 동시에, 해원이 한사코 대면하길 거부하여왔던 여성적 도플갱어임을 말하고 있다. 내동 중립을 가장한 남성적 입장을 고수하던 해원은 스스로 유치장에 갇힘으로써 법 속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문은 열리고, 복남이 불라고 건넨 피리는 해원의 손에서 창이 되어 남근처럼 복남의 목에 박힌다. 첫사랑의 손에 의해, 첫사랑의 품에 안겨 죽는 것이 행복한 듯 복남의 손가락이 피리를 추억하다 멈출 때, 해원은 그제야 복남의 손을 잡는다. 서울로 돌아온 그녀는 증언을 하고, 물을 뚝뚝 흘리며 ‘늦게 도착한 편지’를 집어든다. (김재홍 화가의 그림처럼, 혹은 김기덕의 <섬>처럼) 그대로 섬이 된 그녀의 실루엣은 억압과 살육의 격전지 무도를 여성적 자기 정체성으로 합일화하려는 각성을 담고 있다. 그 위로 행복한 소녀들의 모습이 겹친다. ‘여자로 태어나 미친년으로 진화하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제정신으로 보이느냐”는 복남의 말과 함께, <김복남>은 도저히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여성억압적인 사회에서 남성적 시각을 내면화하고 여성적 자아를 척살하며 혼자 살아남으려 버둥대는 수많은 여자들에게 ‘미친년-되기’와 여성적 연대의 의미를 ‘늦기 전에’ 깨닫기를 촉구하는 핏빛 여성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