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참극의 주범은 입 다문 방관자들이다
2010-09-30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을 현재 한국사회의 알레고리로 읽어보니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하 <김복남>)은 원시적이고 비균질적인 매력이 넘치는 작품이다. 이는 기이한 분위기가 감도는 섬에서 펼쳐지는 처절한 복수담이라는 영화의 내용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김복남>의 기이한 매력은 거칠고 투박한 촬영과 편집, 갑작스럽게 비약하며 전진하는 내러티브 등, (일정 정도 감독이 의도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연출의 실패나 미숙함마저 거칠게 파닥거리는 영화의 생명력으로 빨아들인다는 점에 있다. 장병원이 이미 지적했듯이, “이야기와 스타일, 형상화의 모순과 때때로 작렬하는 비논리성은 <김복남>의 단점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충동 안에서 매혹과 혐오를 동시에 자아내는 이 영화의 참된 가치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장병원은 <김복남>의 영화 형식과 내러티브의 비균질성이 갖는 기이한 매력을 이야기한다(<씨네21> 770호).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와 다른 지점에서 <김복남>의 매력을 발견하고 싶다. ‘침묵하는 방관자’를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면서 자신의 주제의식을 관철시키려는 의지는 비균질적인 매력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복남>은 최근 개봉작 중 가장 적극적이고 신랄하게 한국사회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또한 <김복남>의 주제는 다층적이어서 다양한 방식의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한국사회의 폭압적 근대화 과정에 대한 알레고리나 남성 중심 사회의 여성 착취에 대한 단죄라는 페미니즘적인 젠더정치학으로 접근하는 것 등등. 물론 이에 대한 논의 역시 나름의 가치가 있겠지만, 내 관심은 <김복남>을 현재 한국사회의 알레고리로 설정할 때 제기되는 정치적 함의에 대한 것이다.

침묵하는 목격자가 겨냥하는 바

<김복남>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은행장면은 공포영화의 맛을 제대로 보여준 <드래그 미 투 헬>(샘 레이미, 2009)에서 빌려온 것처럼 보인다. 대출을 받으려는 하위계급 노파와 이를 매몰차게 거절하는 은행원. 히피 노파를 등장시켜 공포영화 특유의 기이한 분위기를 형성하려 했던 <드래그 미 투 헬>과 달리, <김복남>은 가장 밑바닥의 노파와 은행원간의 관계를 좀더 현실적으로 그린다. 또한 은행원 해원은 <드래그 미 투 헬>의 여주인공에 비해 훨씬 더 차갑고 히스테리하게 느껴진다. 여기에 어떤 사건의 목격자로서 증언하는 것을 회피하는 모습이 더해지며 타자의 사건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적 태도가 드러난다. 해원의 삶의 목표는 단 한 가지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냉정한 표정과 태도로 자신의 입을 다무는 이유다.

<김복남>의 초반 시퀀스는 내러티브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해원의 에피소드 없이 무도에 집중한다 하더라도, <김복남>의 강렬함에는 그리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이 시퀀스가 없었다면, <김복남>은 다층적인 텍스트로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복남>이 날카롭고 신랄한 시선을 던지는 대상은 폭압적 권력자에 한정되지 않고, 더 궁극적으로는 그로부터 파생된 사태를 침묵하며 지켜보는 자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남의 복수담이 갖는 가장 독특한 매력은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이분법적 구도로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중간지대’의 인물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한다는 점이다. <김복남>은 (장병원이 이미 지적한 바 있는) 서사적 비균질성에도 불구하고 방관하는 목격자에 대한 태도만큼은 일관성있게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다. 해원은 중간지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주연처럼 보였던 해원은 무도 도착 이후 자신의 자리를 복남에게 양보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역할은 여전히 동일하다. 해원의 역할은 사건의 목격자, 즉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런데 해원이 무도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목격하는 과정은 목격자로서 자신의 자리가 사건의 외부가 아닌, 그 내부에 있었음을 자각하는 과정과 맞물린다. 영화에서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는 영화 후반부 경찰서 장면에서 해원이 복남의 복수를 피해 창살 안으로 몸을 피하는 장면이다. 의도된 공간 설정이라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해원이 창살 안에 자신의 몸을 가둘 때, 이는 김복남 살인 사건에 연루된 자로서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김복남>은 (그것이 너무도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할지라도) 복남의 복수담 자체가 아닌, 이를 통해 해원이 방관과 침묵의 죄를 인정하고 각성하는 과정을 담는 작품에 가깝다. 해원처럼 사건의 직접적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와 무관하지 않은 중간지대의 인물에 대한 가치 평가에는 판단의 딜레마가 따르게 마련이지만, <김복남>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해원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복남의 복수에는 ‘중간지대’가 존재하지 않으며, 동일한 죄질의 죄인만 있을 뿐이다.

이는 위험한 분노의 표출이지만, <김복남>을 관람하면서 그와 관련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폭력의 카타르시스를 거부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이는 복남의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을 위해 차곡차곡 사건을 쌓아가는 <김복남>의 서사적 전략이 꽤 성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복남의 낫이 마을 사람들의 목을 향할 때, 그녀에게는 그외에 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또한 복남의 핏빛 얼굴 위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마지막 몸부림 같은 처연하면서도 슬픈 정조가 감도는 것 역시 그녀의 복수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분노의 몸짓이 그와 관련한 문제제기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집단(사회적 체제)이 어떤 보호막도 제공하지 않는 ‘불친절한 시대’의 희생자인 복남의 복수 속에 대중의 집단적 무의식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던 사회적 체제를 향한 응축된 좌절감과 불만, 분노를 일거에 폭발시키는 힘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분노의 표출이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주는 매력을 거부할 수 없다(그 이유는 이후 대중독재와 관련한 논의 속에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목격자로서 해원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사실은 해원이 관객을 매개하는 시선의 담지자, 또는 관객과 유사 존재라는 점이다. 즉, 해원은 무도의 스펙터클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객인 셈이다. 실제로 관객은 국외자인 해원과 동일한 위치에서 무도의 생활상을 지켜본다. 그런데 제3의 목격자였던 해원이 복남에게 위협받을 때, 그녀는 더이상 목격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다. 그녀는 사건 외부의 목격자가 아니라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된다. 이처럼 ‘침묵하는 목격자’를 사건 안으로 끌어들여 그 죄를 물으려 할 때, 이러한 인력은 해원뿐만 아니라 그녀를 매개로 무도의 기이한 생활상을 목격했던 관객에게까지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독 장철수가 (<드래그 미 투 헬>을 변형해) 해원에게 좀더 현실의 질감을 부여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목을 자를 수도 있는 대출을 거부하고, 목격자로서 증언을 회피하는 그녀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 해원의 히스테리컬하면서도 지나치게 차가운 태도는 비난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현실의 우리가 해원과 다른 선택을 할 거라고 쉽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즉 해원의 선택은 <김복남>을 관람하는 주체이기도 한, 현 시대 대중의 평균적인 삶의 태도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사건의 전말을 지켜봤으면서도 침묵으로 응답하는 해원을 비겁한 목격자라 비판적으로 말할 때, 그 비판의 화살은 해원과 동일한 목격자의 자리에 서 있던 우리 자신을 향해 되돌아온다. 대중의 시대에 대중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김복남>은 목격자-관객에게 향하는 자신의 낫을 거두려 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복남이 자신의 남편에게 복수하는 장면이다. 장철수는 이 처벌의 스펙터클을 아주 직접적으로 남근의 거세, 또는 남성 중심 사회의 폭력성을 단죄하는 것처럼 재현한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이후의 장면이다. 카메라는 남편의 시점에 가까이 위치하고, 복남은 카메라를 향해, 즉 관객의 시선을 향해 난도질을 시작한다. 관객 모독의 장면. 복남의 분노는 단지 자신의 몸을 약탈하고 유린한 악한에게만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말없이’ 응시하는 목격자-관객의 시선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복남>이 영화적 공간을 스크린 외부로 확장하는 관객 모독의 스펙터클을 통해 궁극적으로 처벌하려는 ‘권력의 담지자-남근’의 주체는 누구인가?

무도, 대중 독재의 풍경

영화의 제목 속 ‘전말’의 사전적 의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이 진행되어온 경과’이듯, 목격자로서 해원은 김복남 살인 사건의 시작과 끝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루’(나는 이 단어를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와 무관하지는 않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되어 있다. 이는 영화가 제시하는 사건의 전말(그것이 김복남이 살인한 사건이든, 김복남을 살인한 사건이든 간에)은 복남의 개인사에 머물지 않고, 그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집단의 죄를 함께 고려해야 함을 의미한다. <김복남>에서 제시되는 해원에 대한 유죄 선고는 폭압적 권력자에 대한 복수와 구별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무도의 지배형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무도에서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마을의 지배 메커니즘이 폭압적 권력으로부터 아래로 일방적으로 작동하기보다는, 스스로 지배의 대상이 되려 하는 다수의 아래 사람들로부터 권력을 떠받치는 동력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무도는 ‘대중 독재’(mass dictatorship)의 지배 형태를 갖는다. 이곳에서 해원은 이를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방관자로서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김복남>은 ‘불친절한’ 사회적 체제가 ‘나쁜 소수’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이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자발적 동의와 지지(마을의 할머니들)에서부터 방관과 침묵이라는 암묵적 지지(해원)에 이르는 다양한 층위로부터 동력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준 뒤, 이 모두를 유죄의 이름으로 처벌한다. 즉 무도의 ‘권력의 담지자-남근’의 주체는 나쁜 소수보다는 다수의 대중에 더 가깝다.

<김복남>의 복수담이 갖는 파괴력은 ‘나쁜 소수’와 ‘결백한 다수’라는 일반적인 구분법을 무너뜨린다는 점, 달리 말해 나쁜 소수뿐만 아니라 폭압적 지배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다수에게 느끼는 분노의 감정을 한치의 망설임없이 폭발시키고 있다는 점에 있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죄를 단죄하려 할 때, 그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식은 ‘나쁜 소수’와 ‘결백한 다수’라는 이분법적 환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나쁜 소수에게 공동체의 죄를 떠넘길 때 그로부터 결백한 다수라는 환상이 완성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환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쁜 소수가 모든 죄를 모두 떠안음으로써 자발적 동의에서부터 암묵적 승인에 이르는 다수의 죄가 가시권에서 사라지며 그 결백함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김복남>은 이러한 대중 독재의 가장 끄트머리에 놓여 있는 ‘침묵하는 방관자’마저 공격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불친절한 세상’이 어떻게 발생, 유지되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물론 영화에서 침묵하는 방관자는 해원이 유일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 다수 대중의 표상으로서 그 자리에 존재함을 기억해야 한다.

복남은 벙어리였다. 말을 못해서 벙어리가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불친절한 세상에 대해 그 어떤 발언권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누구도 그녀의 외침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녀는 집단(사회적 체제)이 공모하여 만들어낸 벙어리다. <김복남>은 그것이 나쁜 소수의 힘만으로 가능한 일이었는지를 묻는다. 영화 엔딩에서 해원은 자신이 목격한 것을 진술한 뒤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눕는다. 그리고 그녀의 누운 모습 위로 무도가 디졸브된다. 중첩된 이미지를 통해 <김복남>은 무엇이 무도의 참극을 잉태했는지 다시 한번 묻고자 한다. 무도의 참극은 나쁜 소수가 아닌, 목격했지만 사태를 방관한 채 입을 다물었던 다수에 의한 것이다. 이때 <김복남>은 복수담에서 이 시대의 교훈극으로 변모한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에 선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해원의 복수는 끝이 아니다. Memento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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