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영화를 매끈한 틀 안에서 설명하기란 늘 어려운 일이었지만, <옥희의 영화>는 정말 그렇다. 알려진 대로 네편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각편은 연결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같은 배우들이 계속 나오지만, 이들이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다(<씨네21> 770호에 실린 정한석의 글과 김혜리의 인터뷰 참고). 다만 영화 전체를 돌아볼 때, 각 이야기들 사이에서, 혹은 인물들 사이에서 뭔가 팽팽하고 치열하게 붙다가도 느슨하게 풀어지고, 때로 어긋나버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관된 줄기가 없기 때문에 우선은 그 느낌의 근거를 단번에 알아채기 어렵고, 상투적인 규정도 피해야겠지만, 그것이 다른 무엇에도 기대지 않는 이 영화가 유일하게 기대고 있는, 영화만의 절실함이라는 사실만큼은 점점 분명해진다. 만약 <옥희의 영화>를 볼 때 단 한 가지, 영화에 대해 지켜야 할 예의라는 게 있다면, 그건 이 절실한 느낌을 영화적으로든 우리의 삶 안에서든 쉽게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날씨는 감정”이라면 ‘폭설 후’의 의미는?
도식, 구조, 심지어 그림으로도 꿰뚫어지기 어려운, 그러나 분명 반복과도 관계가 있을 상황들이 <옥희의 영화>를 이룬다. 아니, 이룬다는 표현이 맞기는 한가? 그런 상황들이 거기 던져져 있다. 아니, 이 표현도 적절하지 않을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홍상수는 미리 전체를 상정하지 않지만, 그보다 더 치밀한 직관에 의해 그 자리에, 그 이야기 혹은 장면을 위치시키는 감독이다. 그런데 <옥희의 영화>에서 이 치밀함은 단순히 배열의 문제만이 아닌 것 같다. 배열의 촘촘함만으로 획득할 수 없는 기운, 그러니까 특정 장면, 특정 이야기, 특정 인물의 상당한 밀도로부터 다른 이야기, 다른 장면, 다른 삶으로, 최소한의 인위적 장치를 통과해서 퍼져나가는 기운이 여기 있다. 배열이 단단한 게 아니라 배열로도 가닿을 수 없는 어느 장면, 어느 사람, 어느 풍경의 마음이 단단하다.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이상한 느낌과도 일면 상통되는 기운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몇몇 평자에게는 그것이 흘러넘치는 파토스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지만, 내게는 차라리 건조하게 말라버린 정념의 흔적처럼 다가온다. 좀 이상한 표현일 수도 있는데, 이 영화를 보며 그 건조함이 더 깊은 정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게 부정과 환멸이 아니라 긍정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놀랍다.
이 느낌과 기운이 <옥희의 영화>를 그간 홍상수의 영화와는 좀 다른 지평으로 이끈다. 뒤에서 좀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그 지평은 그의 전작들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라, 전작들을 끌어안고서 확장되고자 하는 움직임이라는 확신을 준다. 그러니 각 장들이 어떤 관계 안에서 조직되어 결국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보다 <옥희의 영화> 그 어디서, 나의 심상이 왜 여전히 머무르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할 것이다. 물론 네편의 이야기 중 어느 편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는 이에 따라 좀더 끌리는 쪽이 있을 것이고, 내게는 3번째 편인 ‘폭설 후’와 4번째 편인 ‘옥희의 영화’가 그렇다. 이렇게 말하고도 싶다. 뒤의 두편이 안긴 정서적 감흥이, 혹은 어떤 깨달음이 앞의 두편에 대해, 그리고 홍상수의 11번째 영화에 대해 새롭게 느끼게 했다. <옥희의 영화>는 그저 <하하하> 다음에 찾아온 영화가 아니다.
홍상수는 <옥희의 영화> 속 네편의 이야기를 주문을 외울 날(1)-키스왕(2)-폭설 후(3)-옥희의 영화(4) 순서로 각각 이름 붙였다. 동일한 배우들이 동일한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이 네편의 이야기 사이에 시간적 연속성은 없다. 앞편이 뒤에 따라오는 편보다 시간적으로 뒤인 것 같을 때도 있고 한편이 다른 한편 안에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다. 굳이 시간의 축에 이 이야기들을 위치짓는다면, 2-3-4-1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홍상수는 인터뷰를 통해 영화를 만든 순서는 1-2-4-3이었다고 말했다. 영화상 세 번째 등장하는 ‘폭설 후’가 마지막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2-4는 어찌되었든 영화 내용상의 내적인 필요에 의해, 그의 말을 빌리자면, “더 풀어줘야 할 것 같아” 이어진 구조다. 그러니까 세개의 이야기만으로도 <옥희의 영화>가 완성되는 데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키스왕’을 중심으로 ‘주문을 외울 날’은 진구의 영화, ‘옥희의 영화’는 옥희의 영화, 이렇게 대칭 구조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103년 만에 폭설이 왔고 홍상수에게 문득 ‘폭설 후’가 떠올랐다. “날씨는 감정”이라고 곧잘 말해온 그에게 분명 눈이 불러온 심상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없어도 되었을 이야기가 분명 있어야만 하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그는 하얀 세상을 보았을까, 결국 흙탕물 속으로 녹아버린 하얀 세상 그 뒤를 보았을까.
삶의 우연과 영화적인 필연
그렇게 탄생해서, 그 자리에 놓인 ‘폭설 후’는 네편의 이야기 중 가장 이상하다. 진구(이선균), 옥희(정유미), 송 선생(문성근)의 관계가 다른 편들에 비해 가장 희미하다. 셋이 한자리에 모인 유일한 장임에도, 그들 사이의 긴장감, 셋이 서로에게 기대는 정도가 가장 약하다. 말하자면 다른 편들은 누구의 이야기라고 말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고, 대체로 인물들의 관계가 부각되지만, ‘폭설 후’는 관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만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 누구는 송 선생이다. 그러니까 ‘폭설 후’는 오로지 송 선생의 마음을 위해 거기 있다. 진구와 옥희가 송 선생에게 질문을 하고 그가 답을 할 때, 마치 질문이 답 같고 답이 질문 같다. 학생들의 질문은 어딘지 상투적이고 일반화된 답을 기다리는 느낌이 나는데 반해 송 선생의 답은 그 상투와 일반성에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확신을 원하는 학생들의 질문에 불확실한 답이 아니라 불확신이 곧 삶의 답이지 않느냐고 되묻던 남자가 끝에 이르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신, 하나의 마음만은 지키기로 할 때, 가슴이 아릴 수밖에 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나머지 장들, 특히 ‘주문을 외울 날’의 송 교수, 돈과 권력을 밝히는 그 남자가 송 선생의 껍데기라면, 그것이 그가 의존하는 교수라는 상투성이라면 ‘폭설 후’의 송 선생은 그 상투성과 싸우며 마음을 보존하기 위해 갈등하는 남자다. 그때 결기로 가득 찬 남자가 아니라 쉽게 상처입는 나약한 세속의 남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단, 그 다짐의 희극적인 표출이 있다. 흰 눈 위에 토해진 낙지의 꿈틀거림과 뒤돌아 걸어가는 남자의 등과 그의 체념적인, 그러나 스스로를 위로하는 소심한 내레이션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 어쩌면 눈이 오지 않았다면 탄생하지 않았을 이야기, 아마도 눈이 오지 않았다면 결단하지 못했을 남자의 행위. 위대한 눈. 우연이 이룩해낸 기적. 이 기적은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뼛속이 차가워지는 꿈 같다. ‘폭설 후’가 쓸쓸하다면, 결단을 내린 중년 남자의 상투적인 뒷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 풍경들이 현실이 아닌 꿈처럼, 맑아지기 위해서는 초라함 또한 감내해야만 하는 그런 나이가 되어버린 남자가 꾸는 절실한 꿈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상투를 버리는 순간은 남자의 표현대로 ‘속이 시원’하지만, 이제 이 나이 든 남자는 자신의 맨몸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상은 나이 든 남자의 맨몸을 맨눈으로 봐줄 수 있을까. 이 장면에서 맑음과 비애는 종이 한장 차이다.
그런데 홍상수가 이 기이하고도 서글픈 꿈결 같은 ‘폭설 후’를 다른 어디도 아닌 하필이면 ‘옥희의 영화’ 앞에 붙여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차피 시간의 연속성에 따라 이야기들이 배치되지 않은 거라면, ‘폭설 후’가 만들어진 순서대로 ‘옥희의 영화’ 뒤에 놓여도 안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보자. 만약 ‘폭설 후’가 ‘옥희의 영화’ 앞에 없었다면, ‘옥희의 영화’를 보며, 그 세 사람의 풍경에서 지금과 같은 감흥을 느낄 수 있었을까? 딱히 두 이야기가 관련이 없다 해도, 아무리 애써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앞에서 퇴장하는 남자의 등을 보며 방금 전 맑아지기 위해 애쓰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남자의 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폭설이 왔고 홍상수가 어떤 직관에 의해 ‘폭설 후’를 마지막으로 만들게 된 건 우연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폭설 후’가 ‘옥희의 영화’ 앞에 배치된 건 영화적 필연처럼 느껴진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우연과 필연이 언제나 일치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폭설 후’를 채우는 어떤 기질, 심상 혹은 마음의 파장이 ‘주문을 외울 날’에서 허세를 부리는 진구에게도, ‘옥희의 영화’에서 송 선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옥희에게도, 어쩌면 ‘폭설 후’와 전혀 다른 세계들에도 일렁이고 있다는 걸 우리가 영화를 보는 순간이나 보고 난 뒤 알게 될 때, 홍상수 영화의 전체, 그 말이 부담스럽다면 <옥희의 영화>가 구조화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떤 딱딱한 틀로 된 구조가 아니라, 감정의 파장, 그것이 구조다. 감정이 틀이다. 그 감정이 움직이는 방향은 이를테면 날씨처럼 기적 같은 우연이 이끄는 곳이다. 감정 그 자체는 상투적이고 인위적이지만, 그것이 우연의 배를 타고 움직이는 길은 그 감정의 상투를 넘어선다. 우리는 인물들이 품고 있는 감정 그 자체에 동요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퍼져가고 떠나고 남겨진 자리 혹은 행로에 감동을 받는다. 그 자리와 행로, 파장에 결국 과거와 현재와 미래, 즉 홍상수 영화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옥희의 영화>를 보며 홍상수에게 배열의 문제는 결국 그렇게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정한석이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을 “어떤 감정의 반응으로서의 활동으로 영화를 완성한다는 것”(770호)이라고 말할 때, 나와 같은 의미인지 잘 모르겠으나, 어느 정도는 유사할 것 같다. 우연에서 시작하지만 모든 순간을 반드시 거기 있어야만 할 것으로, 하찮게 버려두지 않는 것, 삶의 우연과 영화적인 필연, 지극히 영화적인 경험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삶 안에 있을 때만 기능하게 하는 것. <옥희의 영화>에서 나는 그걸 더 깊게 느낀다.
이 엔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폭설 후’의 기운을 받은 ‘옥희의 영화’는 말 그대로 옥희가 만든 영화다. 내용은 이렇다. 12월31일 옥희는 나이 든 남자와 아차산에 왔다. 그리고 일년이 지난 뒤 1월1일 젊은 남자와 다시 아차산에 온다. “같은 길을 다른 남자와 갔을 때의 죄책감과 흥분이 이 영화를 만들게 했다. 두 경험을 나란히 붙여놓고 보고 싶었다”고 옥희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설명해준다. 우리는 나이 든 남자와 옥희, 젊은 남자와 옥희가 정말 같은 길을 올라가지만, 두 커플이 전혀 다른 것을 보고 다른 대화를 나누는 걸 본다. 영화는 옥희의 내레이션에 따라 그렇게 1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두 커플을 오간다. 그러다가 나이 든 남자가 혹시라도 헤어지게 되면 잘생긴 나무 앞에서 매년 1월1일에 만나자는 제안을 한다. 영화는 옥희가 나이 든 남자, 젊은 남자 각각과 산에서 내려오는 장면들을 계속 교차한다. 그때 나오는 옥희의 내레이션에는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다. 옥희는 말한다. “나이 든 분과는 말다툼을 해서 기분은 나빴지만 그분을 사랑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젊은 남자와는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언젠가는 헤어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에 옥희 곁에 있는 남자는 젊은 남자다. 거리감을 느꼈다는 남자는 거기 있고 사랑한다는 걸 느꼈다는 남자는 거기 없다. 물론 사랑 앞에서 시간은 멈추는 법이 없으므로, 그 사이 흐른 일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사연이 있었을 테고, 그걸 상상해보기만 해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영화가 그 두 그림을, 두 남자에 대한 옥희의 단상을 나란히 붙여놓자 둘 사이의 구체적인 시간의 두께가 사라지고, 그때 영화는 기이한 기운에 휩싸인다. 좀 유치하기는 해도 그럼 어떤 사랑이 더 절실한가, 옥희의 회한과 후회와 그리움은 어느 쪽으로 더 기울었나를 보고 싶지만 여기 그런 건 없다. 여기서 두개의 사랑은 곧 시간 그 자체 혹은 시간의 결과겠지만, 옥희의 영화 속에서 사랑의 기억은 시간성을 잃은, 삶의 시간축 위에 자리잡지 않는 기억이다. 아니, 특정 시간이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영화적) 시간 위에 평면처럼 눌려 있다. 그렇다고 그걸 죽은 기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영화적 평면 위에 다시 놓인 기억의 심상들이 때때로 두 남자에게서도, 심지어 옥희에게서도 떠나 온전히 그 자체의 힘만으로 서로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직 표면의 리듬만 느껴지는 기억들이며, 누군가의 마음으로도 품어지지 않는, 그러나 거기 여전히 존재하는 기억들이다. 이런 기억들이 망각보다 더 서글플지도 모른다. 옥희의 기억보다는 영화적 기억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때 옥희가 잃은 것들, 혹은 영화만이 담아낸 것들. 대과거(나이 든 남자)와 과거(젊은 남자)를 하나로 묶는 옥희의 목소리는 과거인가, 현재인가, 미래인가? 기억으로서의 영화는 우리의 시간 그 어디쯤에 속해 있는가?
그런데 나는 사실 그런 추상적인 문제보다는 이 후반부에서 영화가 왜 옥희에게 나이 든 남자가 아닌, 젊은 남자를 남겨두었는지가 궁금해졌다. 만약 그 순서가 반대로 되었다면, 옥희의 영화는 자신의 내레이션대로 나이 든 남자에게 더욱 사랑을 느낀 순간 끝날 수 있었을 텐데, 왜 언젠가 헤어질 것을 예감한 젊은 남자와의 우울한 정조 속에서 끝냈을까? 홍상수는 왜 그렇게 했을까?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여기서 옥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산을 찾았다 돌아서는 나이 든 남자의 무력한 어깨, 거기 밴 세월의 무상함, 이런 것들이 주는 상념에 대해 쉽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홍상수답지 않고 너무 상투적이다. 홍상수의 최근작의 엔딩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여인이 어리석은 남자를 남겨두고 총총히 해변을 빠져나갈 때, <하하하>에서 남녀가 이보다 더 사랑할 수 없을 것처럼 서로를 보듬을 때, 거기에는 삶의 충만함이 있었다. 그건 삶이 아름답다는 감상주의가 아니라, 끝이 예정되고, 슬픔과 고통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어떻게든 스스로 충만함을 끌어내려는 노력,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던 엔딩이었다. 그런데 ‘옥희의 영화’ 끝에는 현재에서 미래의 이별을 미리 예견하거나 현재에서 과거의 자리를 보며 사랑과 삶의 빈 장소를 들여다보는 옥희의 우울이 있다. 그리고 충만함을 붙잡는 데 실패한 중년 남자의 쓸쓸한 뒷모습이 있다. 그러니까 충만한 현재, 그것이 부족하다. 이 엔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옥희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다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란 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제 손으로 두 그림을 붙여놓고 싶었습니다.” 한동안 홍상수의 영화를 논할 때 가장 많이 나왔던 담론이 바로 ‘반복과 차이’였으나, 그 논의가 홍상수의 영화가 갖는 삶의 구체성을 설명하는 경우를 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런데 바로 ‘옥희의 영화’ 마지막에서 옥희는 깨달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차이의 정체를 본 것 같다. 옥희가 두 남자와의 기억을 붙여 차이를 발견할 때, 중요한 건 그것이 어떤 차이인지, 그 차이를 우리 삶의 좌표 어딘가에 다시 위치시킬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다. 놀랍게도 그 과정은 우리에게 삶에는 무수한 반복이 있고 그때마다 차이가 있지만, 삶이 그 차이 모두를 평화로운 전체 속에서 융화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옥희의 영화’는 반복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버려질 수밖에 없는, 동시에 버리고 갈 수밖에 없는 차이들, 요컨대 어떤 마음, 존재, 풍경을 보는 영화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 싸우는 기억들을 보여주는 대신, 유령처럼이든 처연한 미소로든 여전히 그 자리를 떠돌지만 버려진 삶의 감정들을 과연 나의 영화가 안아줄 수 있을까, 홍상수는 묻고 있다. 분명 이건 죽음을 말하는 방식이 아니며, 오히려 죽음이 불가능한 삶의 질긴 어떤 지점마저 긍정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삶을 정직하고 단단하게 받아들이는 용기
그러니 <옥희의 영화>에서도 홍상수가 여전히 우연을 사랑하는 건 맞지만, 그 우연의 반복을 통해 우연으로 풍성해지는 삶의 형상을 그리고 있다고 보는 건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반만 맞는 말일 것이다. 삶이 우연의 반복을 통해 덧셈의 과정을 겪을 때, 그 우연은 동시에 뺄셈의 과정 속에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이 우연의 순간들을 받아들여 충만해지려고 할 때, 우리는 결국은 시간의 또 다른 우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이유들에 의해 뒤에 남겨진 것들, 잘못된 타이밍에 돌아온 것들, 의지로 의욕하거나 부수지 못하는 것들도 동시에 목격할 수밖에 없다. 그걸 견디고 그걸 보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기억이고 시간이다. 이 기억은 망각보다 고통스럽고 쓸쓸하지만 결국 윤리적이다. <옥희의 영화>가 파토스를 끌어내는 데만 목적을 두었다면, 송 선생의 슬픈 등을 쳐다보는 것으로 끝내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기어이 옛사랑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옥희의 얼굴로 돌아오고, 나는 그 선택에 감동을 받는다. 1월1일의 아차산. 나이 든 남자와 옥희, 한때 사랑했을 그들은 그때 그 장소에서 이제는 멀리 떨어져 서로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이듬해에도 이들은 같은 자리로 돌아올까. 분명한 건 그때도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우연은 찾아올 것이고, 그들은 또다시 남겨진 자리, 두고 가야 할 것들 또한 대면하게 될 것이다. 결코 감정적으로 넘치지 않지만 외로운 우수로 가득 찬 홍상수의 11번째 영화는 우연을 말하는 데서 나아가 우연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사람의 감정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 안에서 삶을 정직하고 단단하게 받아들이는 용기. <옥희의 영화>에는 그것이 있고,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지금 내게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