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시간을 사는 영화 홍상수의 제3막이 열렸네
2010-10-14
글 : 이동진 (영화평론가)
시간이라는 변인(變因)에 대한 <옥희의 영화>
<옥희의 영화>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듯,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유독 정서가 중요한 작품이다. 그것은 이 영화가 펼쳐내는 이야기의 성격 때문이었을까. 이전과 달리 느슨하게 풀어진 듯한 구조 때문이었을까. 혹시 어느덧 쉰을 넘기게 된 홍상수 감독의 나이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각각에 대한 설명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옥희의 영화>에 대한 평문이 쏟아지고 있지만 (내가 알고 있기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이 부분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변인(變因)에 대한 것이다. 말하자면 <옥희의 영화>는 시간을 바라보는 홍상수의 첫 영화다.

홍상수 영화에 죽음이 드물었던 이유

홍상수는 그동안 공간이라는 변인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왔다. 그의 거의 모든 영화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는 인물이나, 옮겨갈 것을 논의하는 인물을 스케치하면서 시작된다. 이동은 곧 공간의 확장을 뜻한다(이때 그에게 공간이란 특정한 지역성을 가진 구체적 장소라기보다는 일종의 대체현실을 담아내는 서사공간에 가까웠다).

하지만 <옥희의 영화> 이전까지 시간이라는 변수의 영향은 최대한 축소되었다. 삶의 특정한 한 시기만 면도칼로 도려내듯 잘라내 다루는 방식이 인물의 시간적 반경을 최대한 압축해온 것이다.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마주보는 대칭 구조를 특히 선호해온 그의 영화세계에서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내용이 나뉘어진 경우라고 해도, 그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없어 동시 발생적이거나(<강원도의 힘>) 이틀 뒤거나(<해변의 여인>) 길어봤자 12일 뒤(<잘 알지도 못하면서>)다(근작으로 올수록 시간적 간격은 그나마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프롤로그나 에필로그가 없었다. 많은 영화들이 타이틀 시퀀스가 펼쳐지는 도중이나 이전에 관객의 시선을 끌기 위한 프롤로그 에피소드로 시작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제목과 배우와 제작진의 이름 등을 담은 타이틀 자막으로만 간결하게 출발한다(서울타워를 비추면서 타이틀 시퀀스가 함께 흐르는 <극장전>만이 예외다).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가 다 마무리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모습을 짧게 스케치하는 에필로그도 없다. 플래시백 역시 거의 없다(<하하하> 이전까지 플래시백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딱 한번 쓰였을 뿐이다). 플래시백이나 프롤로그는 주로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인물이 과거에 어떠했는지에 대한 묘사라는 점에서, 그리고 후일담을 즐겨 다루는 에필로그는 주로 인물의 미래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에서, 홍상수는 인물의 지나간 날과 다가올 날에 대해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의 영화들은 주로 현재성에만 관심이 있었다(시간적 맥락이 축소되면 정서가 아니라 욕망이 중요해진다).

이 모든 형식적 특성은 홍상수라는 예술가의 목표가 표면의 포착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리저리 미끄러지는 욕망의 궤적을 통해 일상의 표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통념과 상투를 끈질기게 응시하는 그의 영화들은 ‘반복과 차이’ 속에서 미세한 변화를 잡아내려고 한다. 그럴 때 강력한 자장을 가진 시간이라는 변인이 개입하게 되면 모든 것이 흔들려버려 미묘한 양상을 그려내는 게 어려워진다.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제외하면 그의 영화들에서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한번도 없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야말로 시간성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모티브이고, 시간이라는 변인이 가장 강렬하게 영향을 끼친 흔적이기 때문이다(극에서 시간의 영향력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창작자는 죽음이라는 모티브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 죽음은 제한된 시간 속에서 기괴하게 왜곡되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감상주의의 얼룩을 남기거나 그때까지 묘사되었던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파괴하는 내러티브의 폭탄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의 흐름을 최대한 배제해온 그의 방법론은 물의 흐름이 인위적으로 잘 통제되고 있는, 일종의 실험실과 같은 환경을 지닌 인공호수에서 수중 생태계의 일상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과 유사하다.

최악의 상태에 놓인 홍상수와 그의 변화

그런데 <옥희의 영화>에 이르러 홍상수는 호수에서 벗어나 바다를 향하는 강으로 뛰어들었다(그 조짐은 극의 대부분이 플래시백에 해당되는 <하하하>에서부터 엿보였다).

사실 송 교수(문성근)에 대한 추문의 진상을 면전에서 캐묻던 진구(이선균)가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GV 자리에서 자신과 관련된 소문에 대해 관객 앞에서 추궁당하며 끝나는 1부 ‘주문을 외울 날’은 전형적인 홍상수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2부 ‘키스왕’이 시작되면서 이 신작은 전작들로부터 점차 멀어져간다. 그리고 3부 ‘폭설 후’와 4부 ‘옥희의 영화’가 펼쳐지면서 놀라울 정도로 새로운 경지가 전개된다. ‘옥희의 영화’는 이제까지의 홍상수 영화들과 완전히 다른 작품인 동시에, 내가 이제껏 한번도 본 적 없었던 영화다(흥미롭게도 이 4부작에서 인물들의 동일성은 온전히 확보되지 않는다. 아내가 진구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해프닝으로 이 작품이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 수정>에서 이름이 잘못 불릴 때의 뉘앙스와 달리 도착된 동일성에 대한 암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인물의 동일성이 깨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글에서 설명하고 있으므로 더이상 거론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인물들의 동일성이 깨지는 것은 ‘부분적’이기에, 이 글에서는 일단 세 배우가 연기하는 세 주인공이 4개의 이야기 속에서 기본적으로 같은 사람이라고 전제할 것이다).

진구가 학교와 회식 자리와 GV 행사를 떠도는 1부는 하루라는 짧은 기간 동안 펼쳐진다. 크리스마스까지 (아마도) 3일간의 일을 다룬 2부도 그렇다. 3부 역시 폭설이 내렸던 다음날 하루에 국한된다. 하지만 영화 속 영화의 형식을 띠고 있는 4부는 이제까지와 많이 다르다. 12월31일과 1월1일에 발생한 두개의 이야기를 교차하고 있는데 그 두 날 사이에는 햇수로 2년, 날수로는 정확히 366일 차이가 있다(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옥희의 영화>는 4명의 스탭과 13회차 촬영으로 완성됐다. 촬영 기간이 짧아지고 촬영 여건이 간소해지면서 내러티브에서 시간의 진폭은 더 커지는 역설!).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에피소드들의 관계다(인물들의 깨진 동일성 때문에 시간 순서를 명확히 따지는 것은 곤란한 일이지만 대략적 파악은 가능하다). 2부와 3부는 (송 교수의 달라진 처지를 논외로 놓고 보면)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것으로 일단 추측할 수 있다. 1부는 2-3부 이후 적어도 십수년이 지난 상황에서의 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4부는 (그것이 영화 속 영화라는 것을 고려하면) 2-3부 이후의 상황에 대한 일종의 후일담 역할을 한다.

물론 이 네 에피소드의 관계는 단선적인 시간 순서로 온전히 배열되지는 않는다. 1부 이후의 상황은 1부의 주인공인 진구 입장에서의 플래시백으로 볼 수도 있다. 1부를 2부의 진구가 꾼 꿈이나 진구가 만든 영화(이를테면 ‘진구의 영화’)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4부와 2-3부의 관계는 일반적인 시간 순서의 맥락으로 파악하는 데 큰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4부는 (아무리 극중에서 경험에 바탕한 것이라고 전제되어도) 2~3부로부터 따로 떨어져서 허구의 틀을 빌린 일종의 논평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4부가 2-3부와 맺는 관계가 혼란스럽더라도, 거기엔 상당한 시간의 흐름이 전제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설혹 영화 속 영화이거나 영화 속 꿈으로 읽어내도 그렇다. 그리고 에피소드들 사이의 혼란스러운 연대기적 순서와 비논리적인 관계는 시간적 맥락의 파장을 더욱 크게 키워놓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게다가 홍상수는 제작과정에서 영화 속 날짜와 실제 촬영날짜를 일치시켰다. 4부의 12월31일과 1월1일 분량은 실제로 한해의 마지막 날과 첫날에 촬영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배경인 2부의 장면 역시 크리스마스 당일에 찍었다(크리스마스 아침을 배경으로 젊은 연인의 낭만적인 키스와 앞날에 대한 싱싱한 다짐을 묘사하고 있는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날이 오다니!).

완성된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3부는 경이적이면서도 필수불가결한 부분으로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1-2-4부를 다 찍은 상태에서도 장편영화의 러닝타임 하한선이라고 할 수 있는 80분에 못 미쳤기에 그제야 송 교수가 중심이 되는 에피소드를 추가로 떠올리고서 3부를 하루 만에 찍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말했다. 왜 부가적으로 찍은 부분이 하필 3부의 그 내용이었을까. 그것은 혹시 시간에 대한 맥락이 상대적으로 가장 약한 대목이 3부였기 때문은 아닐까(이 영화에서 시간을 포괄하는 그물망은 1-2-4부를 다 찍은 순간 상당 부분 완성됐다).

‘주문을 외울 날’의 마지막 신에서 진구는 관객 앞에 이렇게 말한다. “오늘 하루 어떤 사람을 만나면 어떤 인상을 받고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나름대로 판단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을 내일 만나게 되면 또 다른 면을 보게 되고 또 다른 면을 판단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제 희망은 제 영화가 그렇게 살아 있는 무언가와 비슷하게 만들어지는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항상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홍상수의 목표였다. 그리고 <옥희의 영화>에서 그 목표는 가장 풍부하게 성취되었다. 영화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물건이 되려면 거기엔 시간성이 좀더 강하게 부여되어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시간 속을 흘러간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까.

홍상수는 인터뷰에서 <옥희의 영화>라는 영화에 착수할 때 개인적으로나 촬영 조건으로나 최악의 상태였음을 밝힌 바 있다. 그처럼 어려운 상태에서 영화를 만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는 게 <옥희의 영화> 촬영을 강행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최악의 상태에 놓인 홍상수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상태에서 무지막지하게 촬영을 밀어붙였을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영화에 내려앉게 된 것은 시간에 대한 감각이었다.

퇴장할지언정 고개를 떨구진 않는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감각은 필연적으로 정서를 불러들였다. 홍상수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옥희의 영화>에 페이소스가 짙게 배어 있다면 그것은 상당 부분 이 영화가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집사람이 예전 같지 않다”라는 이 영화의 첫 내레이션 자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배태한다. 그리고 인간이 느끼는 정서의 상당 부분은 변화와 관련된 것이다. 실존 인물이든 극중 인물이든 시간을 두고 누군가를 오래 지켜보면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옥희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는 연민이 느껴진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자기 연민이란 감정을 갖기도 한다. 특히 극중 송 교수가 두 차례 뒷모습을 보이면서 걸어가는 장면은 무척이나 쓸쓸하다. 이 영화에서 흘러가는 시간과 흘러오는 시간은 하나의 관계를 종료시키고 새로운 관계를 출발시키는 과정에서 지체와 서행으로 감정의 침전물을 남긴다. 그리고 한 사람은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등을 내보이며 서서히 퇴장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무망하게 주문을 외운다(그렇더라도 이 영화의 인물들에겐 1인분씩의 위엄이 있다. 퇴장할지언정 고개를 떨구진 않는다. 세월 앞에서 ‘위풍당당’할 순 없을지라도 여전히 시간 속을 터벅터벅 걷는다. 그런 그들에게 어쨌든 12월31일은 지나갔고 1월1일은 다가왔다).

<옥희의 영화>는 쓸쓸하다. 쓸쓸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변화에 대한 느낌이고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계절의 순환이든 관계의 상실이든 쓸쓸함은 ‘더이상 ~이 아니다’라거나 ‘더이상 ~이 없다’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찾아온다. 쓸쓸함에서 중요한 것은 부재 자체가 아니라 부재를 낳은 시간이고 세월이다. 결국 쓸쓸함은 삶에서 특정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격발되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무상한 세월의 흐름 앞에 선 인간의 실존적이고 원초적인 반응이다. 물론 그 쓸쓸함이 마지막으로 가닿는 곳은 시간의 끝, 즉 죽음과 소멸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제 인간의 죽음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다.

<옥희의 영화>에는 “인위적인 것을 통하지 않고는 네 진심이 안 통해. 인위를 통해서 네 진심으로 가는 거야”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동안 홍상수 영화들에서 그 ‘인위’를 담아내는 그릇은 주로 ‘구조’였다. 그리고 그 구조는 누차 설명해온 대로 ‘반복과 차이’를 드러냈다(<옥희의 영화>에서 인물의 동일성이 대체로 유지되면서도 부분적으로 파괴되고 있는 양상은 ‘반복과 차이’가 이제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도 적용된 경우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먼저 반복을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것들 속에 통념이 있고 상투가 있다. 이제까지 홍상수가 반복을 실행하면서 외운 주문은 공간의 변주였다. 변주된 공간들 속에서 현실 1-1은 현실 1-2와 별다른 장애 없이 비교가 가능했다.

하지만 <옥희의 영화>에서 “두 그림을 붙여놓고 보려는” 시도는 좀더 불규칙하고 복잡한 변수들로 인해 “효과가 절감”된다. 이 영화의 4부는 이제까지 홍상수가 만들어온 작품들과 흡사한 구조를 갖고 있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엔 결정적 차이가 있다. 4부의 두 가지 이야기가 같은 공간에서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는 사이에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반복되면서 그 과정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4부의 디테일들은 이전과 달리 시간이라는 변인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 결과다. 양상은 훨씬 더 복잡해졌고 홍상수는 바빠졌다.

나는 <옥희의 영화>가 홍상수 영화세계의 제3장을 열어젖혔다고 조심스럽게 예측한다(1장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2장은 <극장전>에서 시작됐다). 홍상수는 이제 그의 작품을 새로 지탱하게 된 또 다른 축으로 눈을 돌렸다. 시간이라는 망망대해 속에서 그는 어떻게 노를 저어나갈 것인가.

홍상수는 1996년에 우리의 눈이 뜨이게 했고, 2005년에 우리의 눈을 비비게 했다. 아니, 지난 십수년간 흥미롭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내게 이 자유롭고 진보적인 예술가는 바로 지금 가장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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