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술 수십궤짝 마시고 초심으로 돌아왔죠, <생활의 발견> 김상경
2001-12-26
글 : 박은영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사진에 음성이 찍혀 나오는 것도 아닌데, 김상경은 환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하하하’ 하고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가장하거나 시늉하는 건 체질상 안 맞는다는 듯. 그 겸연쩍은 웃음소리는, 연기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자신의 연기는 단순한 가장이나 시늉과는 거리가 멀다는 웅변처럼 들렸다. 더 일찍 연락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김상경은 지금 같지 않았다. 그는 <생활의 발견> 촬영을 멀쩡히 끝내고, 외롭고 허탈해서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홍상수 감독을 불러내 술도 마시고, 북한산에도 올라가고, 음악도 듣고, 피아노도 배워봤다. ‘유체 이탈’과도 같은 멍하고 나른한 나날을 보낸 뒤, 그는 일상으로 컴백했다. 노련한 분위기메이커이자 자발적인 이야기꾼의 모습으로, 다시 ‘준비된 배우’의 모습으로.

김상경에게는 철칙이 하나 있었다. 작품을 결정할 때 반드시 대본을 먼저 받아본다는 것. 그런데 예외를 만든 이가 바로 홍상수 감독이다. <홍국영> 촬영 도중에 만난 홍상수 감독에게 대본을 보자고 했더니, 대뜸 ‘없다’고 하더란다. 이런저런 살아온 얘기를 나누다 헤어졌는데, 다시 만난 홍 감독이 ‘머리 굴리지 말고 같이 하자’고 했고, 김상경은 엉겁결에 ‘넷’ 하고 대답했다. 함께 술을 마셨고, 그게 시작이었다. “사람 하나 보고 작품 결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내가 찾고 싶었던 걸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분이라는 믿음이 들었거든요.” <생활의 발견>을 찍는 동안 그에겐 촬영이 생활이었고, 생활이 촬영이었다. 자연인 김상경과 캐릭터 경수가 뒤엉키고, 둘 사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진기한 경험. 여행과도 같았던 이번 촬영의 끝에, 김상경은 연기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 초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김상경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증이 많은 사람이다. 굵직한 드라마에서 주로 상류층 엘리트 역할을 도맡아 했지만, 열거해보면(<애드버킷> <왕초> <초대> <경찰 특공대> <메디컬 센터>) 작품의 색깔도 배역의 성격도 다 다르다. 연극으로 시작해 TV로 얼굴을 알리고, 이제 영화에도 발을 담갔지만, 자신의 활동무대를 한정지을 생각도 없다. “TV 하던 사람들, 죄다 영화로 몰려가서 다시 안 돌아오는데, 그게 웃기는 거죠. 전 작품만 좋으면, TV도 하고 영화도 할 거예요. 연극은 꼭 할 거고요.” 집안의 막내라서, 태권도 시범이다 가무 공연이다 재롱을 떨며, 일찍부터 엔터테이너로서의 기량을 꾸준히 닦아온 셈. 고등학교 때 연극 한편에 감동받아 배우선언을 했다가, 아버지한테 숟가락으로 맞기도 하고, 일주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거창하진 않지만, 결코 간단치 않은 그의 바람 하나. “시장 아주머니들, 우리 부모님들, 소박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생활의 발견뭐 하나 특이한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얘기다. 내가 연기한 경수는 연극배우 출신으로 어쩌다 찍은 영화가 흥행에 참패해서 다음 영화 출연도 좌초되고, 그래서 방황하다가 여행길에 오른다. 여행하다 여자들을 만나고 같이 술마시고 얘기하고 잠도 자고, 뭐 그런다는 얘기다. 그냥 사람들이 살아가는 얘기.

주량의 발견아무리 감독님 지침이 그랬다고 해도, 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았을 텐데, 효과가 꽤 있었다. 연결신을 찍을 때 튀지 않게 하려고 빈 속에 술을 부으면서까지 취해야 했다는 게 좀 괴로웠지만. 좀처럼 취기가 오르지 않아, 빨리 취하겠다고 이과두주를 완샷한 적도 있다. 촬영하면서 내가 마신 술만 아마 수십 궤짝쯤 될 거다.

연기의 발견 원래 대본을 미리 받아들고 분석하고 연습하는 스타일이다. 처음 현장에 갔을 때 촬영 전날 밤까지 대본이 안 나와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곧 적응이 되더라. 관념과 사고의 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진짜 느끼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 이제 이런 ‘진짜’만 하고 싶어지니, 그게 또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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