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장 바쁜 배우였다. 드라마 <위대한 계춘빈>,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 <옥희의 영화>를 완성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진한 스모키 화장 뒤에 숨어 꽤 강렬한 여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진상’ 캐릭터로 등장하는 김종관 감독의 <조금만 더 가까이>가 곧 개봉하며,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 역시 개봉 날짜를 조율하고 있다. “이렇게 한꺼번에 개봉하는 거, 아까워 죽겠어요. 이러면 내년에 할 게 없잖아. (웃음) 천천히 개봉하면 좋을 텐데요.” 그 사이에 베니스국제영화제도 다녀왔다. 프레스한테만 제공된, 그래서 정작 게스트였던 본인은 선물받지 못한 영화제 공식 가방이 너무 탐이 나 결국 광장시장에서 비슷한 빨간색 천을 끊어왔다고 했다. “제가 그냥 만들려고요. (웃음)” 나한테 그 가방이 있다면 주저없이 선물해주고 싶었던, 올해 가장 눈부신 연기를 보여준, 보석처럼 내내 아껴주고 싶은 배우 정유미를 만났다.
“…잊어버렸어요.” 인터뷰 도중 가장 많이 나온 단어였다. 얼마 전 촬영장에서 생겼던 일, 혹은 영화제에서의 경험을 질문할 때 정유미는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얼굴로 골똘히 생각하다가, 미안한 듯 웃으며 “잊어버렸어요”라고 했다. <옥희의 영화> 개봉 무렵, 타 매체로부터 포토 코멘터리를 요청받았을 때도 그녀는 돌이켜보니 바로 얼마 전에 찍었던 촬영장의 풍경이 하나도 기억 안 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오해는 마시라. 정유미는 어떤 작품에 출연 결정을 하고 나면 그 순간부턴 그 작품 하나만 생각한다. “이거 하나밖에 생각 안 해요. 그외엔 아무것도. 이 캐릭터, 이 영화, 이 작품을 통해 만나는 사람만이 저한텐 전부예요. 그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만드는 사람들 생각이 제일 중요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은 다음 내 안에서 또 고민하고. 그렇게 날 맡겨버려요.” 그렇게 마음을 다해 캐릭터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다음에는 자동적으로 그녀의 자기 보호 본능 기제가 작동하는 것 같다. 이성적으로 계산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패턴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는 현장에서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인 다음에는 그 감각을 뒤늦게 되살리려 애써도 쉽지 않은 듯 보였다. “전 카메라 앞에서 그 상황, 그 순간만 생각해요. 그거 말곤 잘 모르겠어요….”
넌 어디에서 왔니?
물이 올랐다고들 했다. 정유미가 이만큼 예뻐 보인 적이 또 있던가, 하는 말도 나왔다.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에서 정유미는 삶이 의외로 방향을 비트는 순간에 봉착할 때마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자신의 의지대로 또박또박 걸어나간다. 정유미는, 옥희는 마지막 4부의 내레이션을 제외하곤 진구(이선균)나 송 교수(문성근)의 시선을 통해서만 보여지면서도 자신만의 단단함을 잃지 않는다. 누군가와 짝을 맞춰 나와야만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배우들이 분명 있다. 하지만 정유미는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첩첩산중>과 <옥희의 영화>에서 문성근, 이선균과 모종의 관계에 놓여 있지만, 그녀 혼자 카메라 안에서 움직인다고 해서 허전하거나 비어 보이지 않는다.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선 박중훈이 그녀와 짝을 이루어 등장하지만, 정유미가 연기한 세진은 그 혼자만으로도 완결된 세계를 갖고 있다. 그녀는 화면 속에서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결핍을 연기하지만, 그것이 정유미라는 배우 자체의 결핍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 둘은 큰 차이다.
운이 좋았던 거라고 시샘 섞인 수군거림도 있을 법하다. 정유미는 6년 전 김종관 감독의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통해 관객에게 얼굴을 각인시켰다. 그때만 해도 단편영화가 단숨에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으며 감독과 주연배우에 대한 관심을 급상승시킨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사랑니> <가족의 탄생> <좋지 아니한가>에 이르는, 각각의 해마다 가장 호평받은 한국영화들에 그녀가 등장했다. “운이 좋았던 것도 있고…. 하지만 운 때문만이라고 생각하기엔 제 마음이 너무 간절했고 그 영화들 속으로 들어가 있었어요. 제가 ‘짠’하고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제겐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어요. 제가 정말 하고 싶었고 사랑하는 일이니까요.”
부산에서 올라와 서울예대 영화과에 진학하던 무렵에서야 정말 배우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단편영화도 대학 와서 처음 알았다고 했다. “배우는 TV에 나오는 게 다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학교에 들어와서 과제물로 단편을 여러 편 찍다 보니 내가 크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다같이 뚝딱뚝딱 만들어가는 그 과정이 정말 재미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다가 (제목은 밝히지 않은) 어떤 중편을 찍으면서, 처음으로 “안에서 뭔가 깨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게 뭘까 싶었어요. 공부만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받는 어떤 다른 느낌이었어요. 그 이후에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찍었으니, 아마 그 덕분에 좀더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조금만 더 거슬러올라가보자. 원래 정유미는 김종관 감독의 전작 <사랑하는 소녀> 출연 제안을 받았지만, 스케줄이 잘 맞지 않았던 관계로 단역에 가까운 간호사로 출연했다. 주인공 소녀가 찾아가는 산부인과 간호사, 소녀가 쭈뼛거리며 접수할 때 조금 무관심한 얼굴로 사무적으로만 응대하는 아주 짧은 역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카메라는 소녀가 아니라 간호사의 얼굴에 주의깊게 머물렀다. “김종관 감독님이 아마 <사랑하는 소녀>를 촬영하면서 저한테 좋은 이미지를 보셨던 것 같아요.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찍을 땐 사실, 반나절 동안 촬영하면서 짝사랑하는 주인공의 느낌에만 집중해서 내가 어떻게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없었어요. 나중에 완성본을 보고 나서야 깜짝 놀랐어요. 뭐지? 내 얼굴만 나오네!(웃음)”
그리고 <사랑니>가 있다. “지금까지 연기를 계속 사랑할 수 있게 해준, 정체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걸 만들어준, 지금까지 똑바로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작품이에요. 작품뿐 아니라 그때 만났던 사람들 때문에, 일을 떠나서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 좋은 느낌을 받았어요.” <사랑니>와 <가족의 탄생>을 찍을 때까지 정유미는 매니저 없이 홀로 꾸려나갔다. 혼자임에도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준 그때 그 사람들에게 “정말 잘해야겠다, 고마운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심을 지켜냈다. <사랑니>의 마지막 즈음, 17살 인영이 17살 정우에게 수술 자국을 보여주며 묻는다. “이상하지? 흉하지?” 정우는 무심하게 대답한다. “아냐, 예뻐.” 17살 인영, 혹은 스무살가량의 채현은 한국영화에서 일방적으로 소비되던 소녀의 이미지와 확연히 달랐고, 그녀들의 조그만 세계는 더 크고 화려한 가공의 세계에 비해 빛이 덜할망정 자신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정유미가 그걸 가능케 했다.
캐릭터를 등에 업고 자라는 그녀
캐릭터를 통해 성장하는 배우들이 있다. 직접 부딪쳐 얻는 경험치만큼이나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혹은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를 키워가는 경우. 정유미도 그랬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 캐릭터를, 이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다 끝내고 나서야 아, 이럴 수가 있겠구나 하면서 이해를 해요. 그러면서 공부가 되었고 경험치가 되었던 것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연기한 캐릭터들은 실제의 저보다 더 능동적인 경우가 많았어요. 사랑이나 일 모두. 찍을 때는 우울한 느낌이었더라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덕분에 내가 인간적으로 성숙했구나 하고 느끼게 돼요. <내 깡패 같은 애인>의 세진도 그렇고, <그녀들의 방>의 언주도 그랬고. 드라마 <위대한 계춘빈>의 춘빈도 그랬어요. <가족의 탄생>이나 <옥희의 영화> 같은 캐릭터, “난 싫어, 말이 안돼” 하면서 연기했는데 끝내고 나니까 그런 비슷한 사람들이 제 주위에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제야 주위의 친구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죠.”
인간적인 변화뿐 아니라 배우로서의 변화도 작품을 통해 가능했다. 어떤 작품에 들어가며 ‘연기 수업’을 받는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젊은 배우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정유미에게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그녀는 경험치의 차원에서 아주 실질적으로 사고하는 쪽이었다. 이를테면 드라마 <케 세라 세라>가 그랬다. 급하게 캐스팅됐고, 드라마를 전혀 찍어본 적 없는 상황에서 정유미는 처음에 겁을 많이 먹었다.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명성을 떨친 김윤철 감독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정유미를 따라와줬”다. 이젠 너무 유명해진 일화. <사랑니> 당시 정유미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 불허였기 때문에 카메라가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던 정지우 감독의 회상처럼 정유미는 프레임 안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정해지지 않은 방식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TV드라마에서 카메라는 대개 배우에게 최대한 가깝게 다가간다. 단지 연기 스킬의 차이뿐 아니라 카메라가 배우를 잡는 방식 자체가 다른 경우가 많다. 어쩌면 정유미가 그 안에서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케 세라 세라>에선 대부분 카메라가 절 따라와줬어요. 그게 정말 고마웠어요. 그때까지 TV 현장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이 펑 하고 사라진 거죠. 연기도 다르지 않았어요. 보시는 분들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제게는 영화든 드라마든 다가가는 마음이 똑같았어요. 타이트한 스케줄 혹은 감정적인 컨트롤을 하는 것도 <케 세라 세라>를 통해 배웠고요.” 그 이후에 찍은 <그녀들의 방>을 떠올리며 정유미는 털어놓았다. “만일 <좋지 아니한가> 이후 바로 <그녀들의 방>으로 넘어갔다면 잘 못했을지도 몰라요. 타이트한 예산과 시간에 쫓기며 싸우면서도 연기가 가능할 수 있다는 걸 드라마를 통해 이미 체득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전 제가 경험해봐야 아는 것 같아요.”
과장하지 않는 자연스런 신체 언어
지난해까지만 해도 정유미는 잡지 화보 촬영장에서 사뭇 곤혹스러워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 곤혹스러움은 어쩌면, 카메라 앞에서 프레임을 벗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순간에 정직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연기가 가능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에요. 움직일 수 없어서, 갇혀 있다는 느낌 때문에 부담스러웠던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과장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취하는 신체 언어의 풍부함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이를테면 <첩첩산중>에서 그녀가 느닷없이 프레임을 벗어나는 장면이 있다. 한때 사모했던 전 선생(문성근)이 친구 진영(김진경)과 사귄다는 말을 듣고 즉시 전화를 걸어 “야 이 나쁜 새끼야”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장면이다. 그녀는 분을 못 이기고 생각나는 대로 욕을 퍼붓고 발을 구르다가 갑자기 흙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냥 앉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철퍼덕 엎드린 채로 흐느끼며 운다. 혹여나 홍상수 감독이 지시했던 디테일일까? 아니라고 했다. “와악와악 온몸으로 욕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제가 쓰러져 있더라고요. 너무 열을 내다가 기운이 빠져서 그랬나…. (웃음) 혹시 신파로 보인 건 아니죠? (웃음)” 이런 자유로운 움직임이 대체적으로 감독들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에게 맡기는 편인지? “음, 저한테 맞췄다기보다 내버려뒀다고 생각해요. (웃음) 아닌 건 아니라고 하겠지, 자기 영화 만드는데 하고 생각하는 거죠. 아무 소리 안 하면 오케인가보다 안심하고. (웃음)”
그렇다면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선 어땠을까.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에 맞춘 여주인공에게 요구되는 표정과 자세가 어느 정도는 전형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금까지와 사뭇 다르게 움직여야 했을 때 불편함은 없었을까. “장르가 이러니까 이렇게 움직여야지라는 생각까진 안 했어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이려고 노력했지만 만일 보는 분들에게 조금 어색하게 보였다면 그것도 맞는 것 같아요. 상황이 다르고 말이 다르니까 다르게 움직이려 하는 거지, 장르적으로 세세하게 구분해본 적은 없어요.” 그녀의 이런 천진한 태연함은 어떤 영화든 자기화하는 무시무시한 아우라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앞으로 무궁무진한 작품을 경험해야 할 이 젊은 배우가 천천히 고민해야 할 지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에게 다시 묻는 시간
‘20대 배우 중 가장 독보적인 존재’라는 표현은 어찌 보면 양날의 칼일 수도 있다. 그녀의 남다른 안목과 연기력에 대한 상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안전한 선택을 하는 또래 배우들과 스스로를 비교했을 때 또 다른 부담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정유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인했다. “부담감이나 불안은 사실 별로 없어요. 그런 말 들으면 솔직히 기분 좋죠. (웃음) 단지 지금 제가 고민하는 건 마냥 하하호호 웃으며 기뻐할 수만은 없다는 예감 때문이에요. 제가 정말 배우가 됐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고, 지금까지는 영화를 통해, 현장을 통해 경험치를 쌓아왔는데, 영화 말곤 할 게 없었고, 영화가 휴식이었어요. 아무리 지치고 힘들더라도 일을 하면서 에너지를 받았어요. 하지만 이제 연달아 에너지를 얻고 소진하는 걸 되풀이하고 나니 좀 버거워지기 시작했어요. 이제 조금 다른 영역을 찾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에너지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영화 말고도 내가 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게 뭘지, 저한테 귀를 좀 기울여야 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때 혼자만 다른 얘기를 하는 게 지루하다고 했다. 같이 있는 느낌을 못 주는 것, 맛있는 걸 나눠먹지 않고 혼자만 먹는 것 같을 때 그녀는 지루함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는 6년 동안, 충분히 ‘나눠왔다’. 마치 <가족의 탄생>의 채현처럼. 지금부턴 혼자서 미리 맛있는 걸 소화시킨 다음, 천천히 아껴가며 조금씩 내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다. 앞으로 더 오랫동안 더 많은 작품에서 그녀가 기운차게 움직이는 걸 보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