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단의 반응으로 짐작하건대, 앞으로 별 이변이 없다면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올해의 가장 강렬한 데뷔작으로 꼽힐 확률이 크다. <씨네21>에서만도 김도훈(769호), 장병원(770호), 안시환·황진미(771호)가 이 영화의 장점에 대해 길게 썼고, 20자평은 호의로 가득하며, 국내외 영화제에서의 잇단 수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많이 늦은 감은 있지만, 그런 평들을 상기하며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하 <김복남>)을 보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나니 이 영화를 둘러싼 호평과 그 근거에 과장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으나 <김복남>의 불균질함이 주는 매혹, 장르적 쾌감, 그 바탕에 전제된 정치성의 조합이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는 게 그간의 공통된 견해들이었다고 정리해도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장르일수록 작품에 대한 호불호에 취향의 문제가 개입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런 반응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두드러진 영화적 결함마저도 장점으로 치환하는 너그러움을 보일지언정, 비평적으로 그 어떤 이견도 없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의아하다. 이상하게도 <김복남>의 장점이라고 지적된 위의 근거들이 실은 영화에 없거나, 충분하지 않거나,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의 옹호자들은 여기서 영화적 에너지든, 메시지든, 사건이든 뭔가 전복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은데,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김복남>을 김기덕 영화의 자장 안에 두려는 피상적인 견해들은 김기덕의 세계를 오해하고 있거나 <김복남>을 오해한 것 중 하나라는 게 내 생각이다. 둘을 비교하는 자리가 아닌 만큼, 간단하게나마 정리하면 이렇다. 김기덕 영화가 동물적이라면 그건 이성적 규범이 제어하고 포괄할 수 없는 잉여의 영화적 현시로 이성적 규범 안에서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하거나, 그럴 필요를 요구하지 않거나, 이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김복남>의 세계가 동물적이라면 그건 이성적 세계의 괴물적 반복이나 결과에 가까우며, 결국 그 세계의 질서 안에서 읽히고 그 안에서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김기덕 영화의 폭력과 육체성을 보면서 쾌감을 논하는 사람은 없다. 바꿔 말해, 사람들이 열광하는 <김복남>의 영화적 쾌감은 사실, 그 파괴성이 결국 정돈되고 설명 가능하므로 쾌가 되는 감흥이다. 어쨌든 지금 나는 이 영화에 대한 수많은 호평들에 늦게나마 이견을 덧붙여야 할 필요를 느낀다.
방관자의 각성? 죄의식의 또 다른 발로일 뿐
<김복남>은 영화 내적 원리의 치밀한 구성으로 이야기를 쌓아올리는 영화가 아니라 이미 상정된 기본적인 뼈대를 매 순간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표현해서 붙여놓은 영화에 가깝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후반부의 어떤 지점들은 영화 맥락상 유독 납득하기 어려운데, 이 영화에 대한 논의를 거기서부터 시작해도 될 것이다. 무도의 가해자와 방관자들을 모두 죽이고 섬을 떠나는 배에 오른 복남(서영희)은 비밀스러운 가방을 들고 해원(지성원)의 신발을 신고 있다. 육지에 내린 뒤, 그녀는 해원이 타고 도망쳤던 배를 목격한다. 영화는 복남이 부둣가에 벗어둔 신발을 비춘다. 그런 다음 플래시백(복남이 자신의 딸이 죽는 순간을 해원이 목격하는 걸 보는 장면)이 삽입되고, 경찰서에서 벌어지는 복남과 해원의 혈투장면이 붙는다. 복남이 육지에 도착해서 해원과 마주하기까지의 후반부 신들은 친절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 복남이 해원이 잠들어 있는 경찰서로 어떻게 찾아갈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녀를 감금했는지에 대해서는 내용적 측면이나 스릴러적 구성 측면에서도 정교함이 떨어지고 갑작스럽다. 그 부분은 분명 영화적으로 방만한 연결이다. 혹은 복남이 무도의 가해자들을 모두 살해하고 영화적 클라이맥스가 이미 지나간 뒤, 또다시 등장한 피의 향연은 보는 이의 감정을 짜내거나 무언가를 억지로 지연시키는 무리하고 불필요한 설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찰서 시퀀스에 영화가 무게를 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의 연쇄는 다음과 같다. 왜 영화는 무도를 떠나는 복남에서 끝내지 않고 복남과 해원을 적대적인 관계로 다시 마주하게 했을까. 복남이 해원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하지만 결과적으로 죽는 사람은 복남이다. 그렇다면 복남이 영화가 끝나기 전에 어찌되었든 죽어야 하기 때문에 이 장면이 필요했을까? 그렇다면 영화는 왜 복남을 죽이는가? 복남을 희생시킨 다른 인물들은 모두 살해하면서 해원만은 살려두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이 시퀀스가 영화 내부의 시공간적 맥락을 타지 못하고 어딘지 부자연스럽고 급작스럽게 느껴져서 한동안은 누군가의 꿈이라고 생각했다. 인터뷰들을 보니 감독은 그걸 꿈으로 의도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이 부분은 해원의 죄의식이 만들어낸 꿈으로 보고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이와 관련해 영화 속 두개의 플래시백- 복남의 시동생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해원을 복남이 구해준 뒤 유사한 상황의 어린 시절 기억의 삽입, 복남이 해원에게 복수하기 전 딸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이 목격한 사실을 상기하는 장면의 삽입- 도 복남의 복수가 정당함을 설파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방관자 해원의 죄의식이 투영된, 해원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볼 때, 결국 해원이 복남을 죽이는 경찰서 시퀀스는 해원의 죄의식의 결과이자 죄의식 그 자체의 형상화로 읽힌다. 말하자면 앞서 몇 차례 타자의 죽음을 방관했던 해원이 그 죄의식의 불안과 공포에 대응하는 방식은 실제로든, 환상에서든 타자를 살해하는 것이다. 죄의식의 근원을 삼켜버리는 동시에 더 큰 죄의식에 휩싸이는 것. 해석의 비약이라는 반론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결말을 방관자의 각성, 혹은 그에 대한 요구로 이해하는 일련의 반응들에 의문이 들어서다. 정말 그런가? 우선 이 물음은 해원의 현실에서 무도로, 다시 해원의 현실로 돌아오는 영화의 구조와 관련된 문제이며,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충분히 장르적이지 않다는 사실, 즉 영화가 장르를 흡수하는 방식과도 함께 말해야 하는 문제이다.
장르와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다
무도는 해원 혹은 여자들이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겪는 폭력의 현실을 극대화한 장소다. 현실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여자에 대한 학대가 이미 예정된 운명 안에서 특정한 목적을 향해 하나씩 자행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작위적인 설정들, 이를테면 불행이 다가오는 타이밍은 결코 우연처럼 보이지 않고, 복남의 고통을 의도적으로 지속시키는 장면은 내적 필연성이 없을 때가 많다. 무도를 탈출하려는 복남의 돈을 받아든 남자가 배를 출발시키지 않고 이유없이 꾸물댈 때나 복남의 남편 만종이 자신이 딸을 죽이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동네 노인들과 공모해 필요 이상으로 늘어놓을 때, 그건 관객의 두뇌와 게임을 벌이려는 목적을 갖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직 복남에 대한 영화적 가학이 있다. 그녀의 복수심을 차근차근 쌓아올려 무참한 복수로 분출하려는 영화적 계산이 복남의 삶에 대한 연민을 훨씬 앞선다. 영화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결국 그 폭력에 대한 복수의 정당성 안에서 사후적으로 용인될 수 있을까. 영화가 여성잔혹극을 전면화할 때 이 질문을 쉽게 여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무도를 현실의 법이 아닌 장르의 문법으로 움직이는 철저히 장르적인 공간으로 본다면, 이런 작위적인 상황과 폭력은 싫어할 수는 있어도 수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복남과 해원의 혈투 시퀀스가 영화 말미에 붙으면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복남이 무도를 빠져나오자마자 해원에게 살해되고 살아남은 해원이 집으로 돌아오는 현실의 결말을 마주하면서다.
복남과 해원의 혈투 시퀀스가 중요한 이유는 무도라는 장소 밖에서, 그러니까 현실의 규범으로 지배되는 장르 밖에서 해원과 복남이 대면하는 첫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려한 복수의 주체는 장르 밖으로 나온 순간, 살아남지 못한다. 그 죽음은 복수의 완결로서 택한 자살이 아니라 마지막 복수의 실패를 알리는 타살이다. 복남의 복수는 현실의 법 안으로 개입하지 못한다. 그녀의 복수는 오직 장르 안에서만 기능한다. 이 영화가 해원의 현실로 무도라는 다분히 비현실적인 장소를 감싸안는 구조를 취할 때, 그걸 다소 거칠게 도식화해서 현실-장르-현실의 구조로 볼 수 있다면, 장르적 관습에 따른 쾌감을 지향하던 영화는 무도를 빠져나오는 순간, 망설임없이 그 장르적 성취를 거두어버린다. 여기서 장르는 현실과 충돌하거나 섞이지 않고 스스로 퇴거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남이 죽음을 맞이한 뒤에 무도에서 살해된 자들의 무덤들을 차례로 보여주는 인서트는 그곳에서 벌어진 앞선 사건들의 소란함에 비해 지나치게 고요하고 평화롭다. 복남의 죽음과 함께 마침표를 찍은 무도의 역사. 여기서 무도의 비극적인 역사는 유령으로든, 트라우마로든 무도 밖 현실세계로 침입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망각의 다리를 건너는 것 같다. 영화 속 복남과 함께 존재했을 장르의 전복적인 잠재성이 현실의 시간 앞에서 맥없이 멈추고 물러나는 순간이다.
복남의 저항, 컬트로 박제화되다
물론 복남이 죽었어도 방관자이자 이 모든 사건의 목격자인 해원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지 않겠냐고, 혹은 영화가 복남의 역할을 이제 해원에게 넘기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해원이 경찰서에 자진 출두해서 자신이 영화의 시작에 모른 체했던 성폭행범들을 직접 지목하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해원의 변화를 영화가 강박적으로 의식한 결과 같고, 오히려 여기서 보이는 건 살아남은 자의 자기 합리화나 변명 같은 것이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자 해원은 시스템과 싸우는 자가 아니라 여전히 죄의식과 싸우는 자의 모습에 훨씬 가깝다. 결정적으로 이 후반부에 의해 영화의 추는 무법한 세상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여인이 아니라 그런 여인을 바라보며 죄의식과 내적 분열에 사로잡힌 또 다른 여인의 이야기 쪽으로 기울어진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해원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에는 우리도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공감이 있는데, 거기에는 어쩐지 반성보다는 연민에 가까운 감정이 스며 있다. 학대받는 타자인 복남을 딱하게 바라보거나 그녀의 복수 행각을 호기심으로 쳐다보던 시선과는 다른 것이다. 영화의, 혹은 해원의 그런 태도를 탓할 수는 없겠지만, 그걸 전복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때때로 죄의식이 펼쳐낸 복수의 환상이라고 표현하고 싶게 만드는 이 영화에서 복남과 해원의 영화적 위상(이들의 계급적 조건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은 동등하지 않다. 더욱이 영화에서 복남은 엄밀히 말하자면, 구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보다는 복수의 잔혹함을 설득하기 위해 원인을 전시하는 기능처럼 보인다. 대다수의 관객이 해원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 위치에 서는 것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유의 지점이라고 하자. 그렇더라도 거기 도달하기 위해 영화 안팎, 장르 안팎으로 이루어지는 복남에 대한 타자화의 과정을 묵인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여러 이유들로 나는 <김복남>을 여성주의적인 영화로 평가하는 일련의 견해들에 수긍하기가 망설여진다.
감독은 복남의 복수 행렬을 의미화하기 위해서는 해원의 현실과 그 안에서 그녀가 이뤄낼 변화에 대한 기대가 필수적이라고 답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무도에서 현실로 나간 것, 그러니까 장르의 테두리를 믿지 못하고 그 안에서 멈추지 못한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복남의 복수를 한갓 장르적 기능으로 소진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인정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영화의 야심은 되레 복수의 파괴력을 앗아갔다. 장르의 에너지는 자신의 힘에만 의존해서 자신의 질서를 갱신할 때 생기거나 현실과 장렬히 부딪치는 과정에서 일어날 텐데, <김복남>의 선택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다. 이는 장르와 현실의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와도 구별되는 것으로 어딘지 둘을 끼워맞춘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복수를 의미화하려는 영화의 그런 의도, 그리고 거기 담긴 메시지에 감흥을 얻는 자들에게 나는 동조하지 못하겠다. 그 의미가 틀려서가 아니라,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복수의 내재적 에너지가 어떤 식으로든 재단되는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저항하는 복남, 아니, 그런 복남으로 대변되는 세계가 컬트로 박제되거나 물질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결국 복남의 복수가 설명 불가능한 불쾌감이나 이물감을 남기지 않고 현실사회의 질서 속에서 해소되는 것, ‘정당한’ 복수에 대한 가치판단이 가능한 데서 오는 쾌감, 아마도 이것이 사람들이 만족하는 카타르시스의 정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김복남>이 물질과 육체적으로 먼저 다가오는 영화라는 감상에는 어느 정도 오해가 있다. 제어할 수 없는 불균질함의 에너지가 영화 도처에 숨쉬고 있다는 평도 어딘지 의심스럽다. <김복남>은 기본적으로 몸이 아니라 머리를 먼저 믿는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정작 중요한 건 복수의 정당성, 혹은 복수를 불러온 원인의 사회적 맥락이나 원인을 둘러싼 가해자와 방관자의 태도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복수를 장르 안에 가두고서 현실을 흘깃거리는 <김복남>은 그 복수를, 혹은 장르를 영화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취해서 소비하고 있는가. 그 방식 안에서 발생하고 작동하는 우리의 쾌감이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에 동의할 수 있을까. <김복남>에 대한 올바른 판단의 방향은 이제 다시 이 질문들을 경유해야 한다.
남다은(영화평론가) 나는 복남이 그런 식으로 죽지 않길 진심으로 바랐다. 만약 그랬다면, 다른 어떤 결함에도 눈 딱 감고 이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영화가 예상과 달리, 충격적이지 않고 온건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 영화에 쏟아진 찬사들은 더욱 의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