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례 감독의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은 소를 통해 성장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 선호는 고향으로 낙향해 소똥을 치우며 사는 시인이다. 구박하는 부모와 나아지지 않는 처지에 스트레스를 얻은 그는 홧김에 소를 팔러 나서고 이때부터 소와의 여행이 시작된다. 선호를 맡은 배우 김영필은 불만으로 가득한 인생에 놓인 이 남자를 생동감 가득한 연기로 묘사했다. 임순례 감독은 <경숙이, 경숙아버지> 등의 연극을 통해 그를 발견했지만, 알고보니 김영필은 이미 몇몇 영화에서도 인상을 남겼던 전력을 갖고 있었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본 선배기자는 당신이 박해일을 닮았다고 했다.
=박해일 덕을 많이 봤다. 현장에 가면 박해일 닮았다고 여자 스텝들이 잘 챙겨준다. (웃음)
-영화는 이번이 처음인가.
=문승욱 감독님의 <로망스>에 출연했었다. 조재현 선배와 일하는 형사 중 한명이었다. 대사가 한마디 있었는데, 잘렸다. 담벼락에 앉아서 아이스크림 먹는 장면 정도가 나온 것 같다. <강철중: 공공의 적1-1>에서는 극중 이원술(정재영)의 변호사를 연기했다. 나중에 이원술의 뒤통수를 치는 캐릭터였다. <비열한 거리>에서는 이보영씨와 내연관계에 있는 직장상사를 맡았었다. 나중에 조인성씨한테 두들겨맞는 남자다. (웃음)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은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임순례 감독님이 극단을 통해 연락하셨다. 내 공연을 보셨다더라. 주인공 선호가 낯설지 않았다. 일이나 사랑이나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남자라는 점에서 예전에 <청춘예찬>에서 연기한 ‘청년’과 비슷한 남자 같았다.
-개나 고양이도 아니고 소와 교감하는 게 쉽지는 않았겠다.
=평소에 겁이 많은 편이다. (웃음) 소 이름이 먹보인데, 처음 봤을 때 일단 부담스럽더라. 고삐를 잡는 것도 어려웠다. 한번은 발길질을 당하기도 했다. 엉덩이를 만지면 안되는데 내가 그때 정신줄을 놓았던 거다. 그래도 실수만 안 하면 의외로 순한 동물이었다. 나중에는 친해져서 소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한테도 애정이 생겼다.
-촬영 중에 구제역 기간이 있었다고 하더라.
=당연히 잠시 연기해야 했다. 평소에도 먹보는 자주 피곤해 했다. 한번 앉으면 4시간씩 앉아서 쉬더라. 사람이 다독여서 일으키면 다시 촬영을 할 수는 있는데, 임순례 감독님이 그런 부분에서는 많이 기다리려고 하셨다.
-따로 키우는 동물이 있나.
=원래 동물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촬영한 뒤 생각이 좀 많아졌다. 어느 날은 밤에 동네에서 라면을 먹고 있었는데, 식당 안으로 고양이가 들어왔다. 내 앞에 앉아서 빤하게 쳐다보더라. 슬쩍 다가가갔더니 도망가지도 않더라. 내가 그날 좀 취했었지, 그 애를 안고 집에 데려와서 지금까지 키우고 있다. (웃음) 이름은 달래고 암컷이다. 여기 (손등을 보여주며) 할퀸 자국도 있다. 아마 이 영화를 하지 않았다면 집에 데려갈 생각도 안 했을 것 같다.
-영화에서 술 마시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선호의 찌질함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술을 조금씩 마시고 연기했다. 극중에서 현수와 술을 마시다가 물에 빠지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잠깐 나오는 장면인데, 촬영은 정말 길었다. 내가 카메라에 익숙지 않아서 그랬던 거다. 감독님이 그러시더라. “연기는 나쁘지 않은데, 어쩜 그렇게 잘 숨냐”고. 연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바위나 나무 뒤에 있는 거다. 물에 들어간 그 장면도 그래서 길어졌다.
-겪어보니 임순례 감독은 어떤 사람이던가.
=자상하고 편안한 분이다. 나이가 어린 나에게도 존칭을 쓰셨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정말 무서웠다. 어쩌다 내가 넋놓고 있으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으셨다. 영화를 찍는 동안 내 혼을 다 빼놓으셨다.
-연극을 시작한 건 언제였나.
=대전에서 학교를 다녔다. 연극에 대한 관심은 항상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극단을 찾아갔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서도 연극반 활동을 했었고. 서울에는 20대 후반에 올라왔다. 서른한살 때 박근형 선생님을 만나서 이후 <청춘예찬>과 <경숙이, 경숙아버지> <너무 놀라지 마라> 등에 출연했다.
-영화에 대한 생각도 계속 갖고 있었겠다.
=너무 하고 싶었다. 사실 예전에 <박하사탕> 오디션도 봤다가 떨어졌다. 영화에 출연하게 된 건 아무래도 박근형 선생님 덕분인 것 같다. 그분의 작품에 출연하지 않았다면, 감독님들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셨을 거다. 또 예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역할만 하려 했었는데, 박근형 선생님을 만나서 내 안에도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냥 물어보고 싶었다. 소고기를 좋아하나.
=정말 좋아했다. 돈이 없어서 못 먹었던 거지. 삼겹살이나 닭을 많이 먹었다. 이제는 돈이 생겨도 웬만해서는 소고기를 안 먹으려고 한다. 먹지 않는 게, 먹보에 대한 도리인 것 같다. 이렇게 이야기해놓고도 나중에 또 먹게 될지 모른다. 내가 좀 우유부단한 편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