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낯선 이에게 드러내고 싶은 욕망
2010-11-12
글 : 김혜리
바흐 이후의 소리들.

10월22일

고등학교 3년 내내 편지를 주고받았던 중학교 동창 Y가 실로 오랜만에 전시회를 하는데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소셜 네트워크> 시사와 겹쳐버렸다. 그림은 볼 수 있겠으나 친구와 만나지는 못하게 됐다. 어젯밤만 해도 트위터 이웃에게는 침실 전구를 갈다 깨뜨렸네, 소슬바람이 창가에 불어오네 시시콜콜 늘어놓았던 내가 오랜 벗에겐 이 모양이다. 따로 예를 찾아 눈 부릅뜰 것도 없이 내가 바로 세태(世態)다. 그러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직접 살은 맞대지 않은 채 ‘연결’되기를 바라고 클럽의 멤버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가 잘 모르는 이를 선호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잘 모르는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나를 떠나거나 상처줄 수 없으니까. 지금 세대가 가장 두려워하는 말은 “당신에게 반대한다”, “나랑 싸우자”가 아니라 차단(block), 혹은 절연(disconnect) 같은 단어들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주인공인 페이스북의 창립자 마크 주커버그는 그러한 대중의 욕망을 꿰뚫어보고 뚝딱뚝딱 알고리즘으로 만들어버린 천재다. 그가 만든 것은 완결된 실체가 아니라 사슬을 연결하는 방식이었고 전세계 사람들이 그 안으로 뛰어들어와 페이스북을 만들고 진화시켰다. 즉, ‘페이스북’(facebook)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됐다. ‘동사’라는 꿈틀거리는 표현에서 희망을 볼지 징그러움을 볼지는 선택사항이다.

페이스북 사태에 연루된 여러 사람의 진술을 수집한 영화 <소셜 네트워크>는 전체적으로는 <라쇼몽>의 복잡미묘한 변형이고, 실내신으로 한정하면 <12 앵그리 맨>도 연상시킨다. 한편 극화된 인물 마크 주커버그는, 황폐한 마음을 안고 홀로 남는 아메리칸 드림의 구현자라는 점에서 <시민 케인>의 찰스 포스터 케인,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 <대부>의 마이클 콜레오네,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다니엘 플레인뷰와 한 계보에 소속돼 있다고 해도 좋다. 영화를 한번 본 직후 즉각적인 인상을 새기는 요소는 아론 소킨 작가가 쓴 대사다. 하버드의 오만한 영재들은 두세수를 앞질러가며 제압하는 대화를 한다. 사과나 감사를 해야 할 순간에 용케 다른 화제를 찾아내 대화의 가지를 치는 것도 장기다. 때로는 그들이 입안에서 굴리고 있는 게 말인지 면도날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모르긴 해도 이 영화의 시나리오 두께는 평균의 2.8배는 되지 않을까. <소셜 네트워크>의 몇겹씩 인코딩된 대사를 듣고 있다보니, 내 입에서 나오는 밀도 낮은 말들은, 대체 말일까 당나귀일까 열등감이 엄습한다.

10월23일

벽장을 정리하다 발견한 <마녀의 특급배달> DVD를 플레이어에 넣고 곁눈질하면서 마루를 닦는다. 방바닥을 걸레질할 때마다 마침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좋을 텐데 생각한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뭐하냐는 안부전화에 “방 닦아” 세 글자로 응대하던 박해일의 쿨한 대사를 한번 내 입으로 해보고 싶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노라면 한때 소녀였던 내 안에도 잠든 마녀가 있을 것만 같아 으쓱해진다. 오랜만에 다시 본 마녀 키키는 나의 기억보다 훨씬 불안하고 신경질적이다. 하긴 그 편이 자연스러운지도. 이러니저러니해도 키키는 낯선 대도시에서 난생처음 독립을 시도하는 열세살 소녀니까. 또 다른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나 모노노케 공주가 모성의 대안으로 손색없는 위대한 소녀성을 구현하는 캐릭터라면, 키키는 우연히도 마녀의 가계에 태어난 평범한 여자애다. 좀더 밀어붙여 말하면, 키키는 막 도시로 나와 직장을 찾고 성인으로서 생활을 시작하려는 젊은 현대 여성의 초상이다. 그녀가 정착을 꾀하는 도시 키리코는 로맨틱한 유럽 각국의 예쁜 이미지를 모아놓은 거리 풍경으로 소녀의 환상을 부풀리지만 막상 사람들은 냉담하다. 그녀는 하늘을 날 수 있는 근사한 재능이 있지만 그것만으론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다. 고로 사회적 관점에선 ‘쓸모없다’. 도시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동안 본래 타고난 능력은 서서히 잃어가는데, 대신 무엇을 얻게 될지는 불확실해 히스테리컬해지는 키키의 모습은 젊은 날의 한 시점에 생활의 근거지를 옮겨본 모든 이에게 친숙할 거다.

과거 불가능했던 온갖 카메라 움직임과 3차원 효과를 낼 수 있는 지금도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비행신은 두근거린다. 키키가 건물 지붕을 차고 반동을 이용해 날아가는 방향을 돌리거나 뱅그르르 빗자루를 거꾸로 오를 때, 그리고 활공을 마치고 지면에 첫발을 디디는 착륙의 순간에는 촉각마저 쫑긋 선다. 현실적인 중력 묘사에 비행하는 장본인의 기분을 살짝 보탠 듯한 형상의 연출이다. 비슷한 예로 미야자키의 작품에서는 인물의 감정이 부풀어 오를 때 치맛자락과 머리칼도 공기를 머금고 부풀어 오르는데, 그때마다 덩달아 내 가슴에도 훈풍이 스며든다. 애니메이션에서 움직임은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인위적으로 궁리된 것이다. 이는 흔히 우연과 노이즈를 포함한 현실의 운동을 고스란히 담는 실사영화에 못 미치는 애니메이션의 약점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인간의 의지로 매 찰나를 디자인해 완성한 움직임에는 어딘가 감동스러운 면이 있다. 살아 움직이는 존재를 이만큼 동경하고 신격화하는 작업도 없는 게 아닐까. 성경 속 장면을 세밀화로 그리고 긴 시간을 들여 장정했던 수도사들은 애니메이터들의 전신이 아닐까? 2001년 만들어진 100% CG영화 <파이널 판타지>가 바가지로 욕을 먹고 있을 무렵 “예전의 어떤 영화도 인간 남자와 여자를 표현하는 데에 이만한 값을 지불하지 않았다”며 그 의의에 감격했던 장 마르크 랄란의 글이 생각난다.

10월24일

“올해 10월엔 5번의 금요일, 5번의 토요일, 5번의 일요일이 모두 한달 안에 있고 이건 823년 만의 일이니 8명의 좋은 사람에게 보내면 4일 안에 돈이 생긴다”는 중국 풍수에 근거한 문자메시지가 일부 영화인 사이에서 돌고 있나보다. L감독님이 P감독님에게서 받았다며 트위터에 올린 것과 동일한 메시지를 저녁 무렵 J감독님이 휴대폰으로 받는 광경을 목격했으니 말이다. 예전 ‘행운의 편지’ 풍습의 정수(精髓)는 무엇보다 재앙이 두려운 나머지 투덜거리면서도 일곱 통의 편지를 필사하며 자신의 이기심과 소인배다움을 절감하는 순간에 있었건만. 소셜 네트워크 시스템이 실핏줄처럼 퍼진 요즘에야 여덟명 전달 정도야 일도 아닐 테니 자연 반성의 시간도 없겠다.

10월26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은 다큐멘터리부터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모든 장르의 영화에 경이롭게 잘 어울린다. <다이하드>에 흐르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라니! 고풍스러우면서 모던하고, 천진한 동시에 지적인 음악이라 가능한 일이며, 특정 정서에 못박히지 않은 음악이기에 가질 수 있는 품이다. 카탈로니아 노장 페레 포르타벨라의 <바흐 이전의 침묵>은 바흐 음악의 물성(物性)에 주의를 끌어당긴다는 점에서 기념할 만하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통틀어 음악에 관한 영화를 표방하지만 연주자와 작곡가의 삶에 관한 영화로 귀결되게 마련인 통상의 음악영화와 다르게 포르타벨라는 악기와 음악 사이에 게재되는 인간을 제거하거나 하나의 변수로만 다루고 있다. 에피소드식 구성 안에는 바흐 가족의 재연드라마를 포함해 인물이 등장하는 단편이 많지만, 궁극적으로 다다르는 정서는 멜로드라마에 침윤되지 않은 결코 의인화될 수 없는 음악 자체의 감흥이다. 포르타벨라가 포착한 기계장치에서 음악이 발생하는 순수한 광경은, 오디오만 감상할 때보다 오히려 더 음악을 가까이 느끼게 한다. 카메라 앞으로 바퀴 달린 자동연주 피아노가 다가드는 도입부와, 우리의 눈이 악보를 읽는 동시에 귀가 그 실현인 음악을 정확히 받아들이게 연출한 마지막 장면만으로도 <바흐 이전의 침묵>은 오랫동안 몸 안에서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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