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25년을 촘촘히 채운 사랑의 기억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
2010-11-10
글 : 주성철

25년은 과연 얼마나 긴 시간일까.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이하 <엘 시크레토>)는 그 긴 시간을 촘촘히 채운 사랑의 기록이면서, 1970년대 암울했던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에 대한 환기다. 영화에서 그 둘은 따로 있지 않다. 벤야민 에스포지토(리카도 다린)는 25년 전에 벌어진 강간살인사건의 기억으로 괴로워한다. 당시 법원 직원으로 그 사건을 조사하고 범인까지 잡았던 그는 그에 대해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함께 사건을 추적했던, 과거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음에도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던 이레네(솔레다드 빌라밀)를 다시 만난다. 당시 두 사람은 사건 발생 몇년 뒤 극적으로 범인 고메즈를 잡아 종신형을 받게 했지만, 정부는 범인이 반정부 게릴라 소탕에 협력한다는 이유로 그를 풀어준다. 정부 당국에 항의하지만 에스포지토는 오히려 풀려난 고메즈의 습격을 받고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잔인무도한 범죄자에게 아내를 잃은 모랄레스(파블로 라고)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그렇게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젊은 선생이자 이제 막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여인 릴리아나의 죽음은 그대로 아르헨티나의 암울했던 역사와 겹친다. 하지만 사건 현장의 여자는 더없이 아름답다. 천인공노할 사건의 무게감과 아름다운 나신의 괴리감은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남편은 은행 일을 하면서도 퇴근해서는 범인이 다녀갈 것으로 예상되는 기차역에 매일 나가 그를 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의 노력을 보고서 에스포지토와 이레네는 경찰이 대충 종결지었던 사건을 1년 뒤 다시 재개하게 된 것. 모진 세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남편의 순수한 사랑은 그 두 사람의 마음에도 동요를 일으킨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과 과거의 끔찍했던 사건은 계속 교차하며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 끔찍했던 사건에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은 바로 세계 첫 여성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이사벨 페론이다. 군부에 의해 축출됐다 1973년 망명지에서 돌아온 페론은 대통령에 재선되는데, 1974년 그가 죽자 세 번째 부인이던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계승한다. 하지만 세계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역사적이고 영광스런 기록은 1976년 곧장 군 장교들에 의해 실각됨으로써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1980년대 초까지 극심한 정치 불안정과 경제 침체 등이 이어지며 암울한 나날이 계속된다. 영화에서 힘들게 잡은 강간살인범이 졸지에 정부를 위해 일하는 요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처럼 역사와 개인의 기억을 교차하는 구조의 영화는 많지만 <엘 시크레토>는 좀더 독특한 매력으로 빛난다. 인파로 가득한 축구경기장에서 범인 고메즈를 잡는 롱테이크 장면은 마치 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추격신이며, 그를 풋내기라고 자극하며 범인임을 증명해내는 이레네의 심리 전술 또한 묘한 박력으로 넘친다. 더불어 현재 시점에서 재현되는 플래시백이 과연 정확한 실제인지, 아니면 현재의 에스포지토가 써나가는 소설로서의 기록인지 다소 모호한 상태로 전개되는 점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범인을 쫓고 사건을 밝혀나가는 스릴러 장르로서, 25년 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비밀스런 멜로 장르로서 모두 영화는 흡족하다. 국내 관객에게는 에두아르도 미노냐 감독의 <작별>(1998)로 알려져 있는 리카도 다린은 후안 호세 캄파넬라 감독의 다른 작품 <신부의 아들>(2001)에서도 멋진 연기를 선보인 적 있다. 그와 더불어 솔레다드 빌라밀까지, 같은 배우가 무려 25년의 시간을 간단한 염색과 메이크업만으로 소화해내는 호흡은 놀랍다.

그렇게 평행하게 전개되는 두 이야기가 각자의 클라이맥스를 가진 채 다가오는 것도 무척 흥미롭다. 기차역에서 헤어지며 그저 얼굴을 부비는 것만으로, 그러니까 그 순간의 감촉만으로 25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현재 사랑 이야기가 그 첫 번째 클라이맥스라면 소설을 써나가는 에스포지토가 전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충격적인 결말이 그 두 번째 클라이맥스다. <엘 시크레토>는 멜로영화로서도 깊은 감정의 굴곡을 만들어내지만 무엇보다 올해 본 가장 인상적인 복수극이라 할 만하다. 올해 오스카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이며 워너브러더스가 최근 리메이크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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