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진중권의 아이콘] 말 한마디로 세상을 베라
2010-11-19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라코닉과 트위터

영화 <300>에는 이른바 ‘스파르타의 유머’가 등장한다. 가령 페르시아 군대가 “우리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을 것”이라고 협박하자,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짧게 “그럼 시원한 그늘 아래서 싸울 수 있겠군”이라 대꾸한다. 영화에선 제대로 묘사가 안됐지만, 레오니다스가 항복을 받으러 온 페르시아의 사신들을 발로 차 우물에 처넣는 장면도 실은 이와 관련이 있다. 당시 페르시아 사신들은 고대 관습에 따라 복종의 상징으로 스파르타의 흙과 물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스파르타 사람들이 이들을 우물에 빠뜨린 것은 전형적인 스파르타식 유머의 연출이었다. “(우물 바닥에 떨어져) 직접 파 가라.”

스파르타식 축약어법

농담을 할 때만이 아니라 스파르타인은 평소에도 말수가 적었다. 테르모필의 협곡을 막고 있는 스파르타의 용사들에게 페르시아의 왕 케르케스는 “무기를 내놓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말한다. 이 제안에 레오니다스가 보낸 답변은 딱 두 마디. “몰론 라베.”(Μολων λαβε) 우리말로 “와서 가져가라”는 뜻이다. 오늘날 이 말은 그리스 육군 제1군단의 모토로 사용되고 있다. 페르시아의 여인들은 전쟁에 나가는 남편이나 자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방패를 들고, 혹은 방패 위에 들려.” 승리하여 방패를 들고 돌아올 게 아니라면 전사하여 방패에 실려 돌아오라는 얘기다.

한두 마디에 모든 것을 담아내는 스파르타식 어법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 매력적인 어법의 절정은 아마도 마케도니아의 선전포고에 대한 유명한 대꾸일 거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켜가던 필립 대왕이 스파르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즉각 항복하는 게 좋을 거다. 만약(if) 내가 내 군대를 이끌고 너희 나라로 들어갈 경우에는, 내가 너희의 농장을 파괴하고, 너희 백성을 도살하고, 너희 도시를 무너뜨릴 테니까.” 이에 대한 스파르타의 공식답변은 딱 한 단어. “만약에.”(if) 이 한마디에 필립 대왕도, 그의 아들 알렉산더도 끝내 스파르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수사학에선 이런 식의 축약어법을 ‘라코닉’(laconic)이라 부른다. ‘라코닉’은 ‘라코니아’(=라케다이몬)라는 지명에서 비롯된 말이다. ‘라케다이몬’은 원래 스파르타와 구별되는 또 다른 도시국가를 가리키나 당시 사람들은 서로 인접한 이 두 지역을 모두 ‘라케다이몬’이라 불렀다고 한다. 스파르타식 어법이 ‘라코닉’이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일 거다. 그런데 스파르타 사람들은 왜 축약어법을 선호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스파르타 특유의 군사주의 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절주절 긴 말을 늘어놓는 것은 전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법. 전사의 미덕은 역시 말보다 행동에 있지 않던가.

라코닉 어법은 미개한 사회의 특징인지도 모른다. 말수만 적은 게 아니었다. 스파르타에는 법률의 수도 적었다. 스파르타에는 법률이 왜 이렇게 적냐는 물음에 카릴라우스 왕은 “원래 말이 적은 사람들은 많은 법이 필요 없다”고 대꾸했다고 한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일지 모르나, 발달한 사회는 아닐 것이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인간관계도 복잡해지고, 그에 따라 법률의 수도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까. 수사법도 마찬가지다. 스파르타인들이 언어로 철학을 논하려 했다면, 그들이 사용하는 어휘와 문장도 아테네인들의 것처럼 정교하고 복잡해졌을 거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다르게 보았던 모양이다.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 따르면 스파르타 사람들은 “실은 철학과 화법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오직 전투능력에서만 뛰어난 것처럼 보이려고 자신들의 지혜를 숨기고 일부러 돌머리인 척한다”는 것이다. “보통 스파르타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그가 처음엔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나 결국에는 그들은 짧은 언명으로 (그들에 비하면) 그대가 어린아이임을 보여줄 것이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스파르타라고 뛰어난 철학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스파르타 사람들은 대체로 단순, 무식, 과격했다.

언어의 금욕

경상도 남자들의 어법은 흔히 ‘라코닉’하다고 여겨진다. 경상도 남자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하는 말은 딱 세 마디라는 농담이 있다. “밥 도”, “아는?”, “자자”. 이런 어법을 구사하는 문화에서는 사내가 말이 많은 것은 결코 미덕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감정은 헤픈 말보다는 한번의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어떤 것이다. 경상도 사내가 사랑을 고백하는 방식도 매우 라코닉하다. 그들은 쓸데없는 디테일들을 일거에 생략하고 곧바로 본질적 사안으로 돌입한다. “내 아를 낳아도.”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겠지만, 이 농담들은 경상도 화법의 특성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오늘날 저런 어법을 구사했다가는 집에서 쫓겨나거나 여자에게 딱지나 맞기 일쑤일 거다. 하지만 저 무뚝뚝한 경상도 어법은 동시에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그 농담들을 들으며 웃을 수 있는 것도 그 축약어법이 발휘하는 미학적 효과 때문일 거다. 내가 보기에 경상도 화법의 매력을 잘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개그맨 김제동. 김혜리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경상도 화법의 특성을 이렇게 요약한다. 가령 “할머니,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안녕하셨어요?”라고 말할 상황이 있다고 하자. 경상도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딱 세 글자로 압축할 거란다. “할맨교?”

어린 시절 집에서 기르던 돼지를 잡는다는 말에 꼬마 김제동이 떼를 썼단다. “저 돼지 잡으면 나 학교 안 가.” 여기에 대한 어머니의 대꾸가 제대로 ‘라코닉’하다. “저 돼지 안 잡으면 너 학교 못 가.” 이 한마디에 꼬마의 저항은 맥없이 꺾이고 만다. 이렇게 상대를 일거에 제압하는 것이 바로 라코닉 화법의 힘이다. 어느 쇼 프로그램에서 본 얘기. 김제동씨는 예쁜 여자만 보면 같이 산에 가자고 조르는 버릇이 있단다. 어느 여성 연예인이 등산을 싫어한다며 제안을 거절하자, 김제동으로선 좀 민망한 상황이 됐다. 이때 김제동 왈, “앞으로 산에서 보이기만 해봐라”.

디지털 라코닉

외교부 장관을 지냈던 유명환씨가 언젠가 “천안함 관련 정부 발표를 못 믿는 젊은이들은 북한으로 가라”고 한 적이 있다. 이분이 제 딸을 외교부에 특채한 것으로 알려지자, 네티즌은 세습 좋아하는 그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니가 가라, 북한.” 최근에는 트위터가 라코닉 화법의 산실로 자리잡아가는 듯하다. 그것은 물론 140자 제한이라는 기술적 조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긴 글보다 짧은 글에 익숙한 영상문화의 효과 때문이다. 이른바 ‘오늘의 트위터 키워드’라 하여 일간신문들에 소개되는 트위터 글들은 나름대로 라코닉 화법을 적절히 구사한 예들이라 할 수 있다.

아테네의 아티카 유머가 유려하고 세련됐다면 스파르타의 라코닉 유머는 거칠고 투박하다. 라코닉에 밀려 교양있는 화법이 줄어든다고 디지털 대중이 스파르타 사람들처럼 단순무식해질 거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소크라테스는 거칠고 투박한 라코닉 화법 속에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난 지혜가 담겨 있을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디테일을 제쳐두고 곧바로 사태의 본질을 치는 화법. 그것은 절제와 금욕을 통해 몸에서 불필요한 동작을 떼어낸 고수의 검법을 닮았다. 뛰어난 검객이 단 한합에 상대를 베듯이, 트위터리언은 단 한마디로 사태의 단면을 베어야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