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봉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과 <대부2>를 보았다, 알고 있다. 이미 오래전 걸작 반열에 오른 작품에 대해, 지금 와서 더이상 할 말이 남아 있을까. 게다가 무려 30여년이 흐른 영화를 동시대 안으로 끌어와 말한다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대부> 시리즈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매혹은 어떤 새로운 경지의 깨달음이 아니라, 온전히 영화만이 선사해줄 수 있는 감흥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에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기대는 충족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고나서 지금까지 뇌리를 맴도는 건 감흥의 경험이 아니라, 다소 난감한 고민, 아니 질문이다(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다시 본 두편의 <대부>가 새삼스레 안긴 생각에 관한 글이므로, 종결편인 <대부3>를 여기서 본격적으로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순한 범주화에 양해를 구하고 말하자면, <대부> 시리즈는 아버지-아들의 서사 혹은 역사, 그리고 복수(revenge)로 추동되고 지탱되는 장르의 원본과도 같은 영화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수없이 반복되는 뼈대, 즉 ‘아들은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고 아버지의 역사를 반복한다’는 전제. 수많은 영화들이 아버지-아들의 서사를 완결하거나 실패시키고, 이에 대한 비평들이 그런 선택에서 함의를 발견할 때에도 그 전제만큼은 불변하는 문장이다. 서사의 중심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진다는 사실, 거기서 배태된 문제들, 혹은 아들이 아버지의 역사를 어떻게 반복하고 있는지의 문제만이 대체로 중요하게 다뤄져왔다. 그 어떤 영화가, 혹은 비평이 위의 전제에 ‘왜’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던가. 돌이켜보면 나도 그랬다.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는 아들’의 플롯이 봉합하고 반복하는 역사를 가치판단의 대상으로 삼은 적은 수없이 많아도, 그 전제 자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적은 없다.
<대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 전제는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미 위대한 프로이트가 증명했고, 수많은 이론과 예술의 토대가 되어왔으며, 인간(실은 남자)의 근본적인 욕망과 속성으로, 가부장적 문명사회의 근간으로, 그렇게 이미 거기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 1, 2편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만 이상한 혼란에 빠졌다. 정말 웃긴 일이다. 6시간이 넘게 그런 전제가 가장 멋지게, 그것도 비판적으로 펼쳐진 영화를 보고나서, 처음으로 우리는 왜 그 전제를 이런 장르의, 텍스트의, 혹은 이데올로기의 기본 명제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물음에 사로잡힌 것이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말도 안되는 질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 의문은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이 당혹스럽고 놀랍다. 나보다 <대부>가 먼저, 1편에서 2편을 거쳐 결국 그 물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영화가 그 전제가 틀렸다고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거나, 납득할 만한 어떤 답을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두편의 영화는 결국 자신의 존재 전체를 질문으로 만들어 그 전제 자체를 들여다보고 사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이 영화의 정교한 완결성, 형식적으로든 내용적으로든 우아하고 웅장하게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영화적 성취,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칭하는 역사성에 대해 감탄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가 정교한 퍼즐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데에는 동의해도, 그 퍼즐의 맞춤에서 무언가 정서적으로 어긋나고 비어 있고 불충분한 느낌을 받는다. 이 느낌은 위의 무모한 물음과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다.
<대부> 이후 유사한 뼈대의 영화들이 이 시리즈를 장르의 전형으로 여기고 모방, 변주할 때, 그들은 이 영화가 실은 그런 계보에서 가장 비전형적인 영화라는 점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달리 말해, <대부>가 위대한 건, 아버지-아들, 그리고 복수의 서사에 의존하는 이후 장르물의 모범답안이어서가 아니라 웅장하고 비장한 장르의 전형들을 사력을 다해 조합한 다음에 결국 자기 토대를 무효화할지도 모르는, 너무도 근본적이라서 불가능한 질문과 마주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는 이 영화가 미국 역사의 근원을 다시 쓰고 있다, 는 식의 내용적 차원에 대한 흔한 지적과는 그 맥락이 좀 다른 것이다. 30년 묵은 영화에 대고 이런 표현을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2010년 가을에 다시 본 코폴라의 <대부> 시리즈는 무섭게 도전적이고 신선하다.
주관적인 인상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대부1>에는 왠지 매끄러운 표면만 존재하는 것 같다. 이야기의 두께를 따라간다기보다는 유려한 영화적 리듬을 타고 간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데, 그렇게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감탄하며 보다가, 문득 뭔가 비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에 대한 그 어떤 폄하의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런 인상이 시리즈의 시작으로서 1편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콜레오네가의 서사에는 설명이 없고 오직 장르적 선택이 있다. 이 영화의 감흥은 인물들의 내면, 그들이 내린 결단의 심적 근거가 아니라, 장르 그 자체의 운동과 움직임에서 온다. 이 영화에서 콜레오네가의 역사에는 그것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만한 충분한 과거, 현재, 미래의 내용물이 없다. 코폴라는 그 내용물을 굳이 채우지 않아도, 장르가 자기 힘으로 완성되게 만들었다. 혹은 콜레오네가의 아버지와 아들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물론 영화를 보는 동안은 지나쳤어도 보고 나서 궁금해할 수는 있다. 아버지와 가장 다른 길을 걸을 것만 같았던, 패밀리의 대부가 되기에는 어쩐지 정직하고 순진해 보이던 마이클(알 파치노)이 아버지가 상대 패밀리의 공격을 받자, 형들을 제치고 아버지를 지키는 역할을 선뜻 도맡을 때 이상하다. 아버지에 대한 방어가 너무 쉽게, 짧은 시간에 상대에 대한 복수로 이행하는 것도 납득하기 쉽지 않다. 이것은 콜레오네가의 본성인가? 혈연적 필연성인가? 혹은 그저 장르적 관습에 따른 설정인가? 어느 쪽도 가능한 대답일 것이다. 영화가 그걸 결함으로 보이지 않게, 오히려 장르적으로 능숙하게 밀고 갔다는 점에서 우리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2>에 이르자 뭔가 달라진다. 다른 시각이 필요해진다. 그저 코폴라의 서사적 욕망이 좀더 치밀하게 발휘된, 1편보다 나은 속편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있다.
<대부2>는 1편의 장르적 표면을 설명할 근거, 내용으로 채워진다. 장르를 지탱하는 역사를 구조화하는 데 목적을 두는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는 1편에서 그냥 지나쳤던 마이클의 선택에 대한 질문들로 다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 아니, 영화가 그렇게 만든다. 마이클은 도대체 왜? 그걸 말하기 전에 이 영화의 현란한 몽타주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대부가 된 마이클의 얼굴이 시작과 끝을 감싸고 그 사이에 1편에서는 설명되지 않았던 아버지의 과거와 마이클의 현재가 교차된다. 말하자면 현재의 마이클보다 젊었던, 미국 땅을 막 밟은 소년, 비토 콜레오네의 전사가 등장한다. 가난한 이탈리아 가족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온 가족이 억울하게 몰살당하는 것을 목격한 소년 비토는 미국행 배에 오른다. 자기 이름조차 제대로 말할 줄 모르는 어딘지 모자라 보이는 소년이 홀로 이민국 심사대를 거쳐, 홍역에 걸렸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머무르게 된다. 그때 창밖, 미국 땅의 어딘가를 바라보는 소년의 뒷모습을 카메라가 가만히 바라본다. 가녀린 소년의 어깨, 그 앞에 펼쳐질 무궁무진한, 그러나 홀로 견뎌내야 할 미래, 아메리칸 드림. 이 더없이 순수해 보이는 기원에 연민과 향수를 느끼지 않기란 어렵다. 그런 다음 영화는 어른이 된 소년이 자신의 가족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행하는 선택들을 보여준다. 그가 손에 피를 묻히기 시작한 계기가 등장하는데, 그는 범죄자가 아니다. 아니, 그는 도덕적으로는 죄가 있으나 윤리적으로는 죄가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는 무엇보다 착한 시민이며 공동체의 착한 이웃이다. 그의 어쩔 수 없는 폭력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다. 그리고 그가 이탈리아로 돌아가 가족을 몰살한, 이제는 너무 늙어버린 권력자를 처단할 때, 그 복수는 난폭한 권력이 아닌 정당한 권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런 과거 사이에 교차되는 아들의 현재에는 감정을 이입할 그 어떤 지점도 없다. 폭력은 그저 더 잔혹한 폭력의 원인일 뿐이며, 복수는 때때로 방어를 앞선다. 그렇게 각각의 시퀀스를 분리해서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과연 똑같은 대부일까, 묻게 된다.
문제는 영화의 편집이 종종 과거의 아버지와 현재의 아들이 각자 맞이하는 삶의 특정 국면을 필연적인 관계 안에서 연결시키는 것처럼 보일 때다. 이를테면 위험에 처한 가족들을 보며 복수를 다짐하는 마이클의 표정이 아픈 아이를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의 슬픈 얼굴로 겹쳐진다. 마이클의 무자비한 선택과 행위 다음이나 이전에 가족과 터전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결단이 연결된다. 아버지의 과거와 아들의 현재가 교차하는 연결고리는 거의 대부분 그런 방식으로 맺어져 있다. 영화가 그렇게 믿고 있기보다는, 아들의 환상이 만들어낸 몽타주라고 보고 싶다. 비동시대적인 것을 동시대적으로 만드는 아들의 환상은 아버지의 기원을 자신의 행위의 근거와 일치시키려고 한다. 다시 질문해보자. 마이클은 왜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는가? 1편이 그걸 제대로 설명하지 않을 때, 나는 그걸 장르적 관습에 근거해 이해했다. 그런데 2편에 이르자 아들이 아버지의 역사를 반복하는 이유가 등장한다. 아들은 도덕적으로 범죄일지라도 윤리적으로 그걸 회복할 수 있었던 아버지의 시대, 아버지가 지키려고 애쓰던 가치, 즉 1편의 아버지를 대부로 있게 한 기원을 자기 현재의 원인으로 여기려고 한다. 정확히 말해 행위의 이유를 자기 내부에서 찾지 못하는 아들의 혼란, 그것이 그를 이 환상으로 이끈다. 우리가 영화를 보며 아버지의 과거에는 내심 안도하고 위안을 얻으면서 아들의 현재에는 불안을 느낀다면, 그건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환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기원과 (아들의) 행위는 불일치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부2>의 표면적으로 물 흐르듯 미끈한 몽타주는 실은 균열을 내재한, 가장 불안한 몽타주다. 내게 이 영화의 감흥은 그 간극에서 오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해도 될 것 같다. 아들의 복수, 폭력, 행위의 근거, 심지어 새로운 대부로서의 존재의 기원 같은 건 없다. 화려한 몽타주의 의미망을 지나 영화의 마지막 마이클의 얼굴이 대면하는 건 결국 무(無)다. 그 얼굴은 반성하거나 회한에 젖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잘못된 건지 알지 못하는 자에게 반성이란 불가능하다. 알 파치노가 로버트 드 니로(젊은 비토)나 말론 브랜도에 비해 정서적으로 부족하고 어딘지 기계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연기의 미숙함이 아니라, 그런 캐릭터의 상황에 근거할 것이다. 행위의 원인을 모르는, 아니 없는 인간에게 어떻게 파토스가 존재하겠는가.
1편과 2편,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틈을 사유하라
결국 <대부> 시리즈의 미학적 성취를 논할 때 가장 많이 말해지는 교차편집, 이를테면 영화가 아버지/아들, 신(선)/범죄(악), 기원/행위를 정교하게 조직할 때, 거기 담긴 의미는 보이는 바와 달리 명확하지 않다. 영화는 위의 두 항들이 결과적으로 같다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의 나쁜 반복이라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급진적인 척하지만, 실은 냉소적인 코멘트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각 항의 실체가 아니라 둘 사이의 틈을 보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 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행위를 물신화하거나 원인을 절대화하지 않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가? 영화는 그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가 그걸 보여줄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다만 반드시 질문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그게 <대부>의 무시무시한 점이다. 아버지와 아들, 기원과 행위, 선과 악은 두 항 사이의 틈을 사유하지 않고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로 존재할 수 없다. 요컨대 아버지를 한쪽에 아들을 다른 한쪽에 두고 양편을 과잉된 장르적 형식으로 넘치게 하지만 실은 둘 사이의 간극이 빈 채로 남겨지므로 완전히 장르적으로 해소될 수 없다는 것. 어느 쪽이 기원이고 행위인지, 혹은 선/후인지, 혹은 실체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이의 누락된 시간, 과정을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대부>의 역사성이다. 이 영화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다. <대부2>가 끝나기 전, 아직은 아버지가 생존하던 시절, 젊은 마이클은 아버지 생일에 모인 식구들에게 미군에 자원입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합법적인 미국 시민의 삶의 꿈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형들은 그를 비난하며 자리를 떠나고 홀로 남은 마이클은 긴 생각에 잠긴다. 이미 우리는 마이클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이 짧고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대부> 1, 2편을 통틀어 유일하게 마이클에게 온전히 주어진 장면으로 여겨진다. 그의 마음에서 어떤 요동이 쳤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바로 그 안에 이 영화의 질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장르의 허구성을 현실의 역사로 보완해서 좀더 총체적인 역사, 혹은 가치를 복구하고 창조하거나 장르의 정당성을 ‘진짜’ 현실에 기대어 찾는 식으로 장르와 역사가 만나는 흔한 예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대부> 시리즈에서 코폴라가 그 둘을 직조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는 장르로 하여금 현실 역사(그것이 미국의 역사든, 아버지-아들의 서사든)의 허구적 측면, 환상을 구축하도록 한다. 영화라는 몸이 구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리듬으로 그 세계를 구축한 다음, 그 몸 전체를 결국 자신의 가장 앙상하고 근본적인 뼈대를 향하는 물음으로, 커다란 구멍으로 만든다, 허무한가? 아니, 가혹하다. 전제 그것이 불러온, 그 이후의 서사에 대해 질문하는 법에 익숙해져왔던 우리에게, 이제 그 전제 자체를 상대해야 할 순간이 왔다.
남다은 글을 쓰는 내내 무모한, 혹은 아무것도 아닌 질문에 매달리는 건 아닌지, 의심과 싸웠다.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을 믿었다. 물론 영화를 보면서, 어떤 반작용으로 요사이 한국영화계를 뒤덮은 아들들의 조악한 복수물, 사회드라마를 떠올린 건 사실이다. 억지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게 꼭 내 탓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