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층의 악당>은 정신줄 놓은 여자와 그녀 때문에 제정신을 못 차리는 남자의 이야기다. 김혜수가 맡은 연주는 남편을 잃고 찾아온 우울증과 지독한 사춘기를 겪는 딸에게 시달리는 중이다. 영화 속의 김혜수는 상당히 귀엽고, 그래서 조금은 낯설다. 그녀는 우울하되 <열한번째 엄마>처럼 어둡지 않고, 사랑에 빠지지만 <모던보이>의 난실이나, <스타일>(TV)의 박기자처럼 주도면밀하지도 않다. “완전히 맹한 여자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맹한 줄도 모를 만큼 맹한 여자다. (웃음)” 그동안의 캐릭터상 빈틈을 드러내지 않았던 김혜수는 연주를 통해 ‘완전한 빈틈’을 보여주고 있다. 떠들썩했던 열애설의 주인공,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그리고 드라마 <즐거운 나의 집>의 정신과 의사 진서와도 대조적인 ‘빈틈’일 것이다. 그 모든 경험에 대해 물었다. 그녀의 대답에는 빈틈이 없었다.
-평소 코미디 연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이층의 악당>은 오랜만에 출연한 코미디영화다.
=내가 유머 센스가 없는 편이다. 성격이 밝긴 하지만 그렇다고 코미디랑 맞는 것 같지는 않다. 코미디영화의 카테고리 안에서 전형적으로 움직이는 나를 내가 못 봐주는 게 있다. 코미디영화 속의 내 목소리가 너무 싫은 것도 있다. 말할 때는 저음인데, 소리 지를 때는 톤이 너무 높다. 관객도 듣기 싫어하지 않을까? 내가 가진 고유의 색이자 핸디캡인데, 그게 캐릭터의 단점으로 드러나는 것 같더라. 하지만 <이층의 악당>은 손재곤 감독이 먼저 코미디를 의식하지 않은 연기를 원했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어땠나.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지, 내가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더라. 감독님은 날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는데, 나의 어떤 모습을 염두에 뒀는지 몰랐다. 배우로서는 용기를 내볼 만한 작품인데 디테일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극중 연주는 근작 속 캐릭터와 상당히 다른 여자다.
=그렇게 맹한지 연기를 하면서 알았다. (웃음) 보편적인 리액션을 배반하는 게 있었다. 연기를 하면서 그런 성격을 계산하지는 않았다. 워낙 자기 인생에 집중할 수 없는 컨디션이고, 감정적으로 지친데다 본인을 현실에 끌어올려놓고 살기는 버겁고. 게다가 주변 상황은 다 못마땅하고,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감정을 분출해놓고는 다시 후회하고. 그런 맥락만 가져갔다.
-극중에서 한석규가 연기한 창인이 상수라면 연주는 변수다. 이런 캐릭터를 연기한 김혜수를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없었지. 결과물을 보니까 더 그렇게 된 것 같다. 창인은 너무 쉽게 생각하고 이 집에 들어온 건데, 하필이면 계략적이고 똘똘한 여자가 아니라 아예 평균 이하의 심리상태에 놓인 상대를 만난 거다. 그런 화학반응이 이 영화의 포인트로 보였다.
-그런 만큼 <이층의 악당>은 한석규와 김혜수가 맞붙는 장면이 매력적인 영화다. 김혜수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라면 한석규는 대중이 사랑했던 한석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석규 오빠는 내가 인간적으로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다. <닥터 봉> 이후에는 같이 할 기회가 있었는데, 사정이 잘 맞지 않았다. 극중에서 창인이 연주에게 “당신은 사파이어고 크리스털이고 에메랄드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 대사를 다른 배우가 했으면 진짜 전형적인 코미디가 됐을 거다. 석규 오빠가 하니까 다르더라. 임기응변에만 능할 뿐인 이 남자에게 진심이 생겼다는 느낌이었다.
-조금은 다른 김혜수의 모습을 찾고 싶은 생각도 있었나.
=그동안 내가 일부러 센 역을 찾은 건 아니었다. 편한 캐릭터를 찾자는 생각도 없었다. 그런 지 오래됐다. 배우의 숙제가 변신이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나라는 시장도 좁고 콘텐츠도 부족하다. 배우가 원하는 대로 딱 맞춰 스탠바이되는 게 없다. 예전에는 변신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런 강박이 없다. 내가 배우로서 어떤 캐릭터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중요한 건데, 머리 길렀다가 자르고, 화려한 옷을 입었다가 평상복을 입는다고 해서 그게 변신은 아니지 않나. 관객도 동의할 수 없을 거다.
-<이층의 악당> 개봉 앞두고 드라마 <즐거운 나의 집>이 방영을 시작했다. 인물구도상으로는 일일드라마처럼 보였는데, 알고 보니 미스터리더라.
=원래는 올해 드라마를 할 생각이 없었다. 마음이 동하는 작품도 없었고. 그런데 <즐거운 나의 집>은 대본을 본 순간 “이런 게 다 있나” 싶었다. 진서뿐만 아니라 윤희도 하고 싶고 윤여정 선생님이 하시는 은숙이도 연기하고 싶더라. 배우가 자신을 자극하는 작품을 만난 이상 안 할 이유가 없더라. 다만 방영 시점이 <이층의 악당>이 개봉할 즈음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스탭들 입장에서 주인공이 다른 작품으로 먼저 짠 하고 등장하면 시무룩해질까봐. 고맙게도 손재곤 감독이나 제작사나 배우가 원하는 작품을 만났으면 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해줬다.
-사실 시청률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같은 시간대 경쟁작도 센 편이고.
=매니지먼트쪽에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런 감이 없는 사람이다. <타짜> 같은 영화도 난 시사회 때 보고 너무 영화적이어서 좋았는데, 흥행은 잘 안될 줄 알았다. 흥행이 잘돼도 좋은 줄 모르겠고, 그냥 결정해서 촬영하는 게 다다. 예전에 파트너였던 박성혜씨는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자기 진짜 괜찮아? 진짜 괜찮아? 어떻게 괜찮을 수 있어?” 이러더라. 난 괜찮더라고. 내가 담담한 척, 대범한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아무렇지 않아서 웃고 있으니까, 그게 정말 미웠다고 했다. 어떻게 배우가 돼서 승부 근성이 없는지 배신감이 들더래. 그런데 내가 부담을 느낀다고 해서 시청률이 좋아질 것도 아니고, 상을 받는다고 해서 연기력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지 않나. 만약 그렇다면 기를 쓰고 하겠지.
-악역인 모윤희를 김혜수가 연기하면 어땠을까 싶었다.
=드라마가 시작하고 나니 그런 이야기들도 있더라. 신혜 언니에게는 미안한 나만의 생각인데,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1인2역을 해봐도 재밌지 않을까 했다. 그러니까 쌍둥이인 거지. 엄마와 아빠가 어릴 때 이혼했고, 난 병원집 딸로 잘산 거다. 윤희는 엄마가 술주정뱅이 남자 만나 개가를 했고, 나중에 두 여자가 상황이 바뀌게 되고. 내 체형이랑 비슷한 배우를 데려다가 뒷모습 찍고, CG 같은 거 활용해서 만들면 정말 연기할 맛이 날 것 같았다. 아마 텀블링하고 다녔을 거다.
-올해 활동 중 가장 눈에 띈 건 역시 <W>다.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W>는 언니가 추천해줘서 봤는데, 촬영이 없을 때는 꼭 찾아봤다. 지지난해인가, 매니지먼트쪽에 개인적으로 그런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는데 <W> 제작진 좀 만나보면 안되냐고 한 적도 있다. 혼자 생각이지 뭐. 내가 만나고 싶다고 그분들이 만나주겠나. 그러다가 굿네이버스 봉사활동 때문에 해외를 가게 됐는데, <W>팀이 같이 온 거다. 그들에게 너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했다. 그때 같이 간 PD가 <W>팀에 이야기를 한 거다. <W>는 개편 때마다 위기를 겪었던 프로그램이라 절박한 상황이었고. 나로서는 <W>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취재하는 사람들과 인연이 생긴다는 게 기쁜 일이었다.
-프로그램명이 <김혜수의 W>로 바뀔 정도로 사실상 이 프로그램의 구원투수였다. 하지만 결국 폐지됐다.
=처음에는 그냥 <W>로 하는 게 좋다고 했다. 김혜수 이름이 뭐라고 거기에 붙이겠나.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유지하려면 필요하다고 하더라. 김혜수가 개뿔도 아니지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오해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 출연료가 제작비에 문제를 일으킨다면 아예 안 할 생각도 있었다. 아니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맞추거나. 어떤 분들은 비싼 출연료를 줘가면서 왜 연예인을 데려다 쓰느냐고 했지만, 사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건 폐지설이 나온 뒤였다. 폐지 논의가 들어갔을 때는 그런 기사도 뜨더라. MBC가 김혜수에게 사과하라고. 물론 1년을 계약했으니까, 걸면 걸릴 거다. 그런데 그게 내 인생에 뭐가 중요한가. 난 이 사람들을 만난 게 너무 소중할 뿐이다. 폐지 확정된 뒤에도 취재를 열심히 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프로그램의 방향이나 취재 아이디어도 다 공유했다. 나는 신나서 아이디어를 많이 냈는데, 작가들은 좋아했지만 PD들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마지막 회식 자리에서 CP가 그러더라. “김혜수씨가 작가였으면 PD들이 되게 불편했을 거라고.” 어쨌든 나에게는 그런 사람들을 만난 게 인생의 복이었다.
-올해, 대한민국의 시작은 김혜수가 장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경험이었나.
=원하지 않았던, 불필요한 이슈였다. 그게 그 정도까지 이슈가 돼야 하나? 정말 그렇게 대단한 건가? 나이 사십이 돼서 물론 그때는 삼십대였지만. 아무튼 불혹의 나이에 연애하는 게 그 정도로 이슈가 될 일인지. 그래야만 하는 건지. <W>도 드라마 때문에 인터뷰할 때, 말 한마디한 게 편집이 희한하게 돼서 나오지 않았나. 나도 모르는 의미를 너무 잘 잡아주시는 것 같다. 연예인이기 때문에 나의 본질과 다른 게 어필되고, 그게 다시 언론에서 난리가 나는 게 당황스럽다. 연예인이 그런 거 아니냐고 하면 할 말 없지만.
-김혜수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이슈의 대상인 배우였다. 이번에는 무덤덤하게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나보다.
=옛날에는 거의 신경을 안 썼는데, 지금은 안 보고 싶어도 안 볼 수 없을 정도로 과해졌다. 배우가 배우로 바로 서고, 배우로 평가받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알겠는데, 일을 오래 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떤 때는 본인의 영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듣는다. 아니, 내가 무슨 영향력이 있다고. 실질적인 영향력이 없는데 그게 영향력이라고 하면 정말 우울하지. 나는 가십에 관심도 없고, 관심받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대중과 매체를 영악하게 상대할 능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못 느낀다. 만약 이제 와서 그렇게 하면 오히려 더 큰일나지 않을까?
-<즐거운 나의 집>과 함께 <이층의 악당>까지 공개되면 결국 올해 1년 동안 김혜수와 관련된 뉴스가 연초부터 끊이지 않은 셈이다.
=뉴스가 날 좋아한다. 없는 뉴스도 만들어낼 판이니. 연예인들 랭크시키는 거에도 꼭 끼어 있더라. 이 나이에도.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