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을 받은 박정범의 장편 데뷔작 <무산일기>는 이미 언론으로부터 꽤 상찬을 받았다. 나도 이 영화가 올해 나온 신인감독들의 작품 가운데 우뚝 솟은 봉우리라고 생각한다. 탈북자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독립영화 진영에서 하나의 흐름을 이룰 만큼 나와 있지만 <무산일기>는 그중 거의 유일하게 주인공의 내면을 격렬하게 건드린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다. 박정범 감독이 탈북자 출신은 물론 아니지만 그는 자신이 잘 아는 소재를 토대로 연출의 정직성이 무엇인지 새로운 모델을 보여준다. 주인공이 처한 현실에 수평적으로 접근해가는 것은 당연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납득하고 심지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등장인물의 내면을 건드린다. 이 영화가 지독하게 등장인물의 외적 행동만을 좇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현대적인 영화언어 수법으로도 당최 이루기 힘든 성취일 것이다.
<무산일기>의 주인공 전승철은 탈북자이며 남한사회 최하층민으로 살고 있다. 여기저기 정식 직장을 알아보는 듯하지만 탈북자 신분에 전문기술이 없는 처지라 쉽지 않고 시급 2천원짜리 일들로 겨우 살아간다. 영화 초반 이 보잘것없는 남자에게 일상적으로 닥치는 일들은 이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차별이 만연한 남한사회의 실상을 보여준다. 전승철은 구직 면담자리에서도, 포스터 전단 붙이는 일의 감독 앞에서도 ‘열심히 하갔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주문을 걸 듯이 말하지만 상대방의 반응은 싸늘하고 심지어 모욕적이다. 우리가 보기에 그는 열심히 살고 있지만 그를 일용직으로 고용한 사람들은 그가 남한사회가 요구하는 부지런함의 덕목이 갖춰지지 않은 게으른 탈북자라는 딱지를 노골적으로 붙인다. 그가 당하는 차별은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 있어서, 동네 깡패들에게 전단지를 붙이러 얼쩡거린다는 이유로 린치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함께 사는 탈북자 친구에게도 공연히 무시당한다.
발화되지 않는 탈북자의 욕망을 보여주다
탈북자들의 남한 밀입국을 주선하는 전승철의 동거인 친구는 남을 등치고 먹고사는 수법을 익혀 이물감없이 남한사회에 적응하고 있다고 스스로 뻐기는 친구인데 전승철을 위하는 척하면서 그를 업신여기고 이용하려 든다. 겉으로는 전승철을 돕는 듯 굴면서 실은 그를 무시하는 이 이중성은 그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거의 식물인간처럼 보이는 이 전승철에게도 욕망이 있다는 것을 영화는 처음부터 보여준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다소곳한 양갓집 규수 같은 처녀를 흠모하는 전승철은 그녀 모르게 그녀 뒤를 밟기도 하고 교회나 동네 근처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두근거리는 것만으로 생활의 유일한 즐거움을 삼는다. 사실 전승철이 당하는 탈북자에 대한 남한사회의 전형적인 차별을 보여주는 것은 이 영화에서 새롭지 않다. 그것은 여타 언론에서도 추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현실적 지표들의 단면이다. <무산일기>에서 가장 독특한 것은 발화되지 않는 전승철의 욕망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는 겉으로 표시하지 못할 뿐이지 분명한 욕망이 있다. 욕망이 있다는 것, 이걸 보여주는 게 특이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대다수 이런 유형의 영화들은 그걸 보여주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런데 여기서는 보여준다.
물론 전승철의 욕망이 발화되지 못하는, 거의 폐소공포증을 느낄 만큼 갑갑한 그를 둘러싼 주변 현실의 묘사는 영화가 진행되는 상당시간 동안 할애된다. 그는 굴욕당하고 얻어터지고 설교를 듣고 도대체 나아질 기미가 없는 자신의 삶을 고요히 견디고 있다. 함께 사는 동거인 친구를 비롯해 건들거리며 남한사회에 적응하려 애쓰는 다른 탈북자들과도 그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엄혹한 경쟁체제 사회에 들어온 그들은 모두 날카롭게 신경더듬이를 켜고 자신이 혹시 당할 불이익을 경계하느라 두터운 인격의 갑옷을 쓰고 산다. 그에 반해 전승철은 곧이곧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거짓말이나 사기를 치지 않고 어떻게든 살길을 도모하려 애쓰지만 그의 이런 생활방식은 동료들의 비웃음을 사는 것 같다. 말수가 적은 그가 가끔 순간적으로 강하게 반발할 때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몰아붙일 때나 어리석게 살고 있다고 비웃을 때이다.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오로지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발견하고 데려온 백구를 키우는 데만 열심인 듯이 보인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다른 한편으로는 놀랍게도 그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짝사랑하던 여자가 사장인 아빠 대신 일을 봐주고 있는 노래방에서 그는 여신처럼 우러러보던 여자의 속물적인 면모를 직접 겪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녀가 보여주는 모순적인 언행에도 불구하고 언뜻 보기에 그의 일편단심은 변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노래방 도우미들을 함부로 대하는 남자 취객의 행동에 반발한 그가 손님과 시비를 일으키고 노래방에 더이상 나오지 말라는 통고를 짝사랑하던 여자에게서 듣고 난 뒤, 그에게 연달아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들이 그를 변화시킨다. 전승철의 친구가 탈북자들을 등쳐먹었던 게 들통나고 짝사랑하던 여자의 가게에서 쫓겨나고 낮일로 긴요하던 전단지 붙이는 일을 더이상 하지 못하게 되는 변화들이 계속되면서 이 조용한 남자의 드러나지 않았던 욕망에 불이 댕겨지는 것 같다. 전승철은 늘 엊어터지기만 하던 동네 깡패들을 그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돌발행동으로 제압하고 짝사랑하던 여자가 다니던 교회에 나가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탈북동기가 된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것도 여자 앞에서. 사기꾼 친구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자 전승철은 그게 자신을 이용하려는 또 다른 수작인 걸 알지만 그걸 감내하는 척하면서 역으로 친구의 뒤통수를 친다.
연출의 정직성 보여주는 마지막 10분에 감동
<무산일기>의 후반부는 종내 짓눌려 있던 이 남자의 내면에 격렬한 공격성이 용솟음치는 것을 흥분하지 않는 스타일로 그려낸다. 들고 찍는 카메라는 조심스럽게 걷는 듯한 발걸음과 유사한 호흡으로 이 남자와 이 남자의 주변을 따라다니는데 그 한결같은 호흡과 반비례해 영화 후반에 주인공이 뭔가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극적 호흡은 보는 사람을 좀 숨가쁘게 만든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지막 10여분에 이르는 대단원이다. 주인공의 격한 변화와 맞물리며 그의 주변에서도 격한 일들이 일어난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감독의 대단한 뚝심을 느꼈다. 박정범 감독은 물론 멜로드라마적 결말을 겨냥하지는 않는다. 그가 직접 연기하는 전승철이 멜로드라마의 행복한 주인공이 되는 것과 그가 실은 남한 자본주의 사회에 곧 적응할 수 있을 괴물이 되는 것은 종이 한장 차이다. 어쩌면 동전의 양면처럼 필수적으로 겹치는 캐릭터의 특징이 될지도 모른다. 강인하고 영웅적인 주인공, 게다가 사랑까지 이룰 가능성이 높아지는 주인공으로 그가 변해가는 것은 그가 이제까지 꺼내지 않았던 괴물성을 발휘하면서부터다. 마냥 순하고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는 아주 힘겹게,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공세적으로 드러낸다. 그러자 주변의 모든 것이 달라진다.
전승철은 여하튼 행복해질 수 있을까, 라고 관객이 다소 안심하면서 지켜보는 동안 <무산일기>의 마지막 장면은 다른 사람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 전승철에게는 커다란 비극이 되는 사건을 그의 앞에 던져놓고 끝까지 그를 지켜본다. 이 카메라의 윤리는 무시무시할 만큼 정직하고 단호하다. 모든 극성(劇性)을 배제하면서도 극적 주름을 잡아냈고 감정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렀으면서도 카메라는 동요하지 않는다. 이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박정범 감독이 대단한 감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무산일기>는 타자의 고통을 묘사하는 방법론 면에서 예리하고 정직한 모델이 왜 감동적일 수 있는지 타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