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초능력자>와 <부당거래>를 연달아 보며, 문득 2010년의 한국영화는 어떻게 기억될까, 라는 의문을 가졌다. 2010년, 한국영화는 대립하는 두 남자 이야기로 넘쳐났다.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는 의문스럽지만 분명한 것은 남성 인물들이 서로에게 거미줄을 쳐놓고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한국영화는 환경의 병리학과 행동주의의 이상상태를 그리는 일에 빠져 있지 않은가? 그 과정에서 한국영화는 공동체를 꿈꾸기를 포기했거나,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악몽의 세계만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범죄 상품의 교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초능력자>의 당황스러울 만큼 순진한 엔딩을 뒤로하고 <부당거래>의 악몽 속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지금의 한국영화가 현실의 악몽 속에서도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 방법을 아직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2010년의 한국영화는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공동체의 꿈을 상실한 채 악몽에 허덕이던 시기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영화에서 필요한 것은 꿈에서 깨어나라는 각성의 요구일까? 눈을 뜬 대가가 악몽에 허덕이는 것이라면, 차라리 우리는 좀더 이상적인 꿈을 맛보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이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초능력자>는 공동체의 환상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버티고 서려 하고, <부당거래>는 그 반대로 그 환상을 해체해버린다. 물론 <부당거래>에서 보여준 내용들은 우리가 몰랐던 것들이 아니다. <부당거래>는 이미 각종 시사프로그램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던 사건들을 극의 형태로 재연하면서, 최종적 결과보다는 그에 이르는 과정의 더러운 커넥션을 디테일한 ‘세밀화’로 그려낸다.
<부당거래>에서 중요한 것은 범죄를 단죄하는 자들이 오히려 범죄를 저지른다는 단순한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우리가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을뿐더러 심지어는 현실의 일부로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범죄를 하나의 상품처럼 교환하는 지경에 이른 한국사회에 대한 세밀한 묘사다. 최철기(황정민)와 주양(류승완)을 보라. 그들은 상대방의 범죄를 거래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밀고 당기는 흥정을 벌인다. 그러니까 <부당거래>는 범죄가 거래되는 좀 요상한 시장에 대한 영화인 셈이다. 물론 그 시장에서 범죄의 상품 가치는 범죄의 질보다는 그 소유주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사소한 범죄가 질적으로 더 나쁜 범죄보다 더 큰 상품 가치를 지닐 수도 있는 게 이 시장의 논리다.
<부당거래>는 범죄-상품을 소유하는 것이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그 누구도 쉽게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그 상품의 소유주들은 자신이 그 주인임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쓴다. 범죄시장은 애초에 은밀히 상품이 거래되는 암시장의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그런데 <부당거래>는 여기서 의도적으로 관객의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중지시키려 한다.
<부당거래>가 주양에 비해 최철기를 관객에게 밀착시키는 방식은, 둘 중 누가 더 질적으로 나쁜 범죄를 저질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생계형 범죄에 가까운가, 그리고 누가 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죄를 저질렀는가, 하는 것이다. <부당거래>는 가진 자가 더 가지려 하는 것에는 냉소를 보내지만, 못 가진 자가 조금이라도 갖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그 죄를 부정할 수 없다 해도) 동정의 여지가 있지 않겠냐는 ‘불공정한’ 태도를 보인다. 류승완은 여전히 사무실의 ‘머리’보다는 거리에서 부대끼는 ‘몸’을 더 사랑하며, 이러한 이유에서도 주양보다 최철기에게 더 호의적이다.
그런데 <부당거래>에서 이 암시장의 세밀한 묘사가 가능했던 것은 최철기와 주양이 자신들에게 벌어지는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장 역시 그리 공정하지 않아서 누가 더 권력에 가까운 위치에서 거래를 제안하는가, 하는 것에 좌우되긴 하지만 그것이 주양이 상황을 통제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당거래>는 범죄를 하나의 상품으로 거래, 또는 교환하는 과정에서 서로 무관해 보였던 인물들이 관계 맺음을 보여주는데, 그 이후부터 이러한 ‘관계’는 인물을 둘러싼 환경이 되면서 그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한다. 때문에 두 인물 모두는 주어진 상황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상대편이 만들어낸 상황에 반작용하는 입장에서 행동의 제약을 겪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부당거래>는 (이후에 좀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초능력자>가 상황에서 행동으로 이행함으로써 상황을 ‘변화’시키려 하는 것과 다르게, 인물을 포위한 채 숨을 옥죄는 상황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려 한다. 즉, <부당거래>는 상황(S)이 행동(A)을 낳지만, 그 행동이 단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분투에 머물면서, 상황(S)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다(SAS). 물론 혹자는 더 최악의 상황에 도달한 것처럼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SAS'').
이러한 세계 속에서 개인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뿐더러 잘해봐야 같은 상황에 머물 뿐이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인물의 행동은 기껏해야 눈을 가린 채 달리는 것만큼이나 맹목적으로 보일 뿐이다. 마치 ‘못 먹어도 고’를 외치는 객기어린 심정이랄까. <부당거래>의 최철기는 이러한 인물의 대표 격이다. 주양 역시 그다지 다르지 않지만, 최철기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끝까지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그는 자신이 거래했던 암시장에서 사형을 선고받지만, 판결 내용을 온전히 듣지 못한다.
최철기의 죽음에서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송강호)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이 왜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다 알지 못한다. 그는 눈이 먼 채 행동했고 그렇게 죽음을 맞는다. <부당거래>는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물들에 대한 영화다. 승리한 것은, 그리고 여전히 동일한 위력으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인물이 아니라 인물에게 주어졌던 상황이다. 인물은 상황을 변화시키겠다는 그 어떤 의지도 없이 오직 살아남기 위해 싸우며, 그를 둘러싼 환경은 그러한 인물의 몰락을 싸늘하게 바라본다. 이러한 면에서, 마치 <디파티드>의 엔딩을 연상시키는 듯한 영화의 엔딩에서, ‘쥐’에게 ‘인간의 몸’을 되돌려주면서 인물이 아닌 상황에 방점을 찍는 카메라의 시선은 영화를 정확하게 마무리한다.
<초능력자>, 엔딩의 비약
<초능력자>의 초인(강동원)과 규남(고수)이 짝패 같은 관계 속에 한 인물을 둘로 쪼갠 듯한 느낌을 준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내러티브를 이끌고 가는 것은 초인이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자신의 목적을 앞세우며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역할은 악인이 주로 떠맡는다. 악인들은 그것이 동의할 만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상황을 위기로 몰아넣는 반면, 그와 대립하는 인물은 그 행위에 반작용하는 수동적 기능에 머무는 데 그친다.
<초능력자>의 인물 관계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다크 나이트>였다. <다크 나이트>에서 광기어린 힘으로 세계를 무너뜨리며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조커였고, 배트맨은 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늘 한발 늦게 움직일 뿐이다. <배트맨>이 (영웅의 탄생을 공모함으로써) 공동체를 떠받치는 꿈과 환상을 완성하면서도, 이 과정을 자기 반영적으로 들춰내 그에 대한 믿음(꿈)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려 했던 반면, <초능력자>는 텍스트 자체가 훼손되는 한이 있어도 공동체의 꿈과 환상을 버티고 서려는 자세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초능력자>의 낙관적이다 못해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엔딩은 이러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초능력자>는 그 잠재적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초인과 규남간의 다양하고 다층적인 관계가 꽤 흥미롭고 영화 속 몇몇 대사는 정곡을 찌르는 힘이 느껴지지만, 그것이 내러티브에 단단히 박혀 있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영화의 엔딩은 그 순진한 세계관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실제로 영화가 끝난 뒤 출구로 향하던 몇몇 관객이 이 엔딩에 실소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내 관심은 이 엔딩이 적절했는지 여부를 가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엔딩을 ‘비약된 것’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지금의 한국영화가 봉착한 문제를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최근 한국영화는 꿈꾸기를 잊어버렸다. 아니, 꿈을 꾸긴 하는데 악몽의 연속일 뿐이다. 상황(S)에서 행동(A)으로 이행함으로써 상황을 변화(S')시키는 도식(SAS')은 <초능력자>가 그 엔딩까지 견지하려는 내러티브적 태도이다. 김민석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행동이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더 나은 가능성을 잉태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이 엔딩을 의아스럽게 느꼈던 이유는, (김민석이 어떻게 판단했든 간에) 이 엔딩이 최근 한국영화의 트렌드뿐만 영화 전체와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초능력자>가 두 남자의 대결이라는 한국영화의 큰 흐름에 편승해 있으면서도, 그로부터 이탈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물이 행동을 통해 상황을 변화시키는 SAS'도식은 현재 주류 한국영화에서는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하다. 주류 감독들이 오히려 비주류의 감수성을 발산하는 상황에서, 한국영화의 인물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지팡하고 있으며, 자신의 행동을 통해 악몽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는커녕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 머물거나(SAS), 결과적으로 질식할 것 같은 더 끔찍한 상황에 이르기 일쑤다(SAS''). 지금의 한국영화는 주어진 상황이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공동체의 환상(믿음)을 꿈꾸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한다. 아직 한국영화는 악몽의 우물 속에 빠져버린 공동체의 꿈을 건져올릴 만한 도르래를 갖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초능력자>가 그것을 해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초능력자>는 유아기적 환상에 가까운 것을 인위적으로 삽입하는 데 머물고 만다.
현실을 휘발시킨 대가
<초능력자>에서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한데, 왜냐하면 이 엔딩으로 인해 영화에서 빛을 발하던 매력마저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초능력자>가 판타지 장르이긴 하지만 초인과 규남의 캐릭터 설정이나 그 주변 인물의 배치, 도시 공간의 활용, 그리고 몇몇 설정과 대사는 영화의 뿌리가 현실에 단단히 박혀 있다는 느낌을 주는 장점이 있다. 특히 냉전의 시대 속에서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불안을 형상화했던 <신체 강탈자의 침입>을 인용하는 듯한 장면들, 즉 초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기계처럼 움직이게 된 사람들을 묘사하는 몇몇 순간은 원본의 답습 수준에서 벗어난 독창성을 보여준다. 가령, 초인의 명령을 받고 사람들이 맨홀 구멍 안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 넣는 장면이라든가, 도시의 낡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을 두고 초인과 규남이 대립하는 장면 등은 (그것이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해도) 감독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어울리는 상황을 빚어낼 줄 아는 능력을 증명한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은 마치 자신이 알레고리적으로 묘사했던 현실을 등짐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인 양, ‘비약적으로’ 그 자리에 나타난다. <초능력자>는 그렇게 현실을 휘발시킨 대가로 완전한 판타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초능력자>는 엔딩의 자리에 그러한 공동체의 꿈을 인위적으로 삽입하기만 할 뿐, 왜 그것이 그 자리에 위치해야 하는지 개연성있는 이유를 제시하는 데 실패한다. <초능력자>의 엔딩에 나타난 그 비약은 한국영화가 공동체의 환상을 꿈꿀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는 역설적 징표이자, 현실의 악몽 속에서 자신의 꿈을 건져올릴 수 있는 방법을 아직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부당거래>의 정확한 엔딩처럼 악몽에 머물거나, 아니면 <초능력자>의 엔딩처럼 비약하거나.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뮤얼 풀러의 <충격의 복도>보다는 존 포드가 보여줬던 서부영화의 세계가 아닐까?
안시환 몇 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영화 비평에 학위와 지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면서 정작 본인은 역사영화 연구로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