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영화, 올해의 감독은 선정하는 게 당연하다. 그건 중요한 것이고 또 그 때문에 매번 잊지 않고 선정된다. 하지만 공식석상에 오르지 못하는 나머지도 많다. 자질구레하고 중요치 않은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요모조모로 재미있는 부문들. 그것들을 골라 ‘올해의 제멋대로 시상식 20’을 꾸몄다. 그러니까 올해의 영화 중 가장 독창적인 컬트영화는 무엇이었을까. 올해의 영화 주인공 중 가장 재수없는 인물은 누구였을까. 올해의 가장 절절한 대사는 어떤 영화에 있었을까. 올해 손수건을 적신 가장 아름다운 작별의 장면은 어디에 있었던가. 항상 궁금해하진 않아도 한번 궁금증이 들면 참을 수 없는, 소소하고 기묘한 영화와 장면과 인물 20을 선정했다.
올해의 멘토 - <방자전>의 마 영감
通하는 여자가 없다
<방자전>은 하찮은 몸종 방자의 계급적 인정투쟁극이다. 춘향의 자태에 넋을 놓았을 때만 해도 그는 가슴앓이하는 남자일 뿐이었다. 방자의 결단은 그의 주인인 몽룡이 계급적 지위를 무기삼아 춘향을 탐할 때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가 가진 건 멀쩡한 외모가 전부다. 이때 마 노인은 무협영화 속 은둔고수처럼 나타나 방자에게 여심을 얻을 수 있는 비기를 전수한다. 상대의 민감한 부위를 건드리는 ‘툭’. 상대의 옆에 누워 무작정 바라보는 ‘뒤에서 보기’ 등등. 만약 마 노인의 스승인 장판봉 선생이 실체로 드러났다면, 올해의 멘토는 바뀌었을 것이다. 마 노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여심을 읽을 줄 알았고, 발기가 되면 입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성기를 지닌 전설의 전라도 한량이다. 김대우 감독에게 <방자전>의 스핀오프로 <장판봉 뎐>을 부탁하는 바다.
올해의 된장녀 -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리즈
돈걱정 없이 살 수 있다니
미국에서 잡지에 칼럼 하나 기고하면 <섹스 & 시티>의 캐리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거 웃기는 거라고 미국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글쟁이가 그러더라. 그런데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리즈는 예외인 것 같다. 좋은 집에 돈걱정 없이 자기 능력도 인정받으며 무한질주로 살던 그녀는 그것만도 부러운 우리를 뛰어넘어 갑자기 웬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다며 자기의 삶을 찾아나선다. 직장도 그만두고 몇 개월씩 여행을 다니는데 돈 모자라는 표정을 찾아볼 수 없다. 로마에서 그녀가 한 일은 배터지도록 피자 먹는 것, 먹고 나서 인도에 가면 우아하게 명상하는 것, 그리고 마음을 청소한 뒤에는 다시 환상의 섬 발리에서 사랑으로 채우는 게 그녀의 일년 일과다. 이 정도니 소인배인 우리가 시기와 질투로 이죽거리지 않을 수가 있나! 올해의 된장은 <김복남…>의 그 된장이지만, 올해의 된장녀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그녀다. 된장, 부럽다!
올해의 생존본능 - <내 깡패 같은 애인>의 면접실 장면
취업만 된다면 뭐든지
이 땅에서 취업을 향한 꿈은 생명연장에 대한 소망과 동급이다. 세진처럼 지방대학을 나온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사실상 그녀가 원하는 건 취업 이전에 질문이다. “이 회사에 왜 들어오려고 하나요?” “이 업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하지만 면접관들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다른 사람하고 시간이 남으면 그때 물어보겠다”고 하거나, “마지막으로 연애한 게 언제냐”고 묻거나, 아예 질문 대신 춤과 노래를 요구할 뿐이다. 세진이 면접장에서 춤추며 <토요일 밤에>를 부르는 장면은 88만원 세대의 절실함과 이를 비웃는 사회의 시선을 여실히 드러냈다. 올해 보았던 가장 슬픈 춤이자 밥벌이의 고단함을 보여준 명장면이었다.
올해의 컬트 - <불청객>
싸구려지만 연출력과 유머는 최상급
저예산이지만 기발하고 재기 넘치는 장르영화에 관한 입소문은 수도 없이 많다. 대개 보고 나면 실망하기 일쑤다. 그런 건 사실 아예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할 무렵, 불쑥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허튼소리”를 지껄이며 <불청객>이 방문했다. 좁다 못해 갑갑한 골방 촬영이나 어색하기 짝이 없는 배우들의 연기에도 아랑곳없고, 눈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헐벗은 특수효과와 조악한 소품들로도 절대 주눅들지 않는 이 막무가내 SF영화! 그럼에도 이 영화는 손에 땀이 밸 만큼 긴장감 넘치는 연출과 요절복통할 만한 우스개와 비장의 정치적 야유로 우리를 한방에 보내버린다. 장르영화의 재능을 알아보는 충무로의 눈 밝은 제작자라면 벌써 점찍고도 남았겠지. 아… 그나저나 궁금하다. 나머지 두 어린 백수를 살리기 위해 저 멀리 블랙홀에 추리닝 바람으로 논개처럼 뛰어든 우리의 가장 나이 든 백수, 사법고시 만년 낙방생 진식이 형은 어떻게 됐을까.
올해의 왕재수 - <소셜 네트워크>의 마크
하버드대학생 잘났어 정말
처음에는 그냥 다정한 데이트로만 보였는데 그렇지가 않다. 주인공 마크가 10여분간이나 앉은자리에서 속사포 같은 대사를 쏟아내는 <소셜 네트워크>의 이 첫 장면에 목적이 있다면, 이 녀석이 둘도 없는 왕재수라는 걸 알리는 것이다. 그는 제 고등학교 때 성적 자랑질에도 성이 안 찼는지 대학의 엘리트 클럽에 들어갈 방법을 혼자 궁리하다가 불쑥 여자친구에게 말한다. “너는 고작 보스턴대학에 다니잖아.” 이 녀석은, 그러니까 하버드대학에 다닌다. 그러니 돌아오는 말이 고울 리 있나. 여자친구가 이렇게 아찔하게 충고하고 이별을 고한다. “네가 컴퓨터 분야에서 크게 성공하더라도 넌 절대 좋은 여자를 못 만날 거야. 네가 멍청이라서? 아니! 너는 재수없는 새끼니까!” <소셜 네트워크>의 이 첫 장면은 영화의 주인공인 마크에 관하여, 그의 관심과 성격에 관하여 한눈에 요약 설명해준다. 캐릭터 구축의 뛰어난 예다. 다만 그가 여전히 왕재수일 뿐!
올해의 공직자 - <부당거래>의 검사, 주양
이 사회의 지도층으로 산다는 것
<부당거래>의 주양 검사는 공직자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갖춰야 할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법조계의 실력자가 장인이고, 굴지의 재벌을 스폰서로 두었으며 기자 한명쯤은 술친구인 폭넓은 인간관계를 축으로, 직장상사에게 ‘사랑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강한 비위와 아랫사람들을 알아서 기게 만드는 묘한 카리스마가 공직자로서 그가 가진 무기다. 뿐만 아니라 주양은 어린 시절 딴 짓 안 하고 공부만 하다가 겪었던 왕따의 애환을 사회적 성공으로 극복한 인물들을 대변한 캐릭터이기도 했다. 결국 살아남는 건, 그리고 이 사회의 지도층으로 살 수 있는 건 그들뿐이다. 주양과 달리 공직자 주제에 신뢰와 덕망으로 성공한 영화 속 공직자로는 <인빅터스: 우리가 꿈꾸는 기적>의 만델라 대통령, <밀크>의 하비 밀크 등이 있다.
올해의 대사 - <시>
가슴 막막한 그의 말
미자씨는 왜 울고 있었을까. 60대 후반의 여성인 그녀는 이제 막 단어를 잃어버리기 시작했지만, 그와 동시에 시에 아름다움을 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역시 동시에 딸 대신 키우던 손자가 집단 성폭행의 가해자가 됐다. 미자씨의 비극은 손자의 범죄를 감춰줘야 하는 한편, 아름다운 시를 써야 하는 열망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울고 있는 그녀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콕 짚어 물었다. “누님 왜 우세요? 시 때문에서 우세요? 시 못 써서?” 미자씨의 세상에서 ‘시’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화 밖의 세상에서는 ‘시’를 쓸 수 있을까? 남자의 대사는 세상의 모든 우는 이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막막하다.
올해의 헤어 - <아저씨>의 원빈
섹시한 당신의 머리
올해는 영화에서 두명의 배우가 제 손으로 머리를 깎았다. 한명은 빡빡 깎았고 또 한명은 예쁘게 살짝 깎았다. 전자가 <심야의 FM>의 유지태, 후자가 <아저씨>의 원빈이다. 극중으로 치면 빡빡 민 쪽이 더 강렬해 보이긴 했지만 예쁘게 깎은 쪽이 역시 인기는 훨씬 많았다. 원빈이 웃통을 벗고 상체를 드러낸 다음 바리캉으로 자기 머리를 깎는 이 장면이 여성 관객 사이에서 올해의 가장 섹시한 장면으로 뽑힐 거라는 소문도 간간이 들려온다. 그러니 사실 원빈은 갑자기 짧게 머리를 깎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깎기 위해 그전까지 긴 머리로 나온 것일 뿐이라고 말해야 맞다. 영화 찍다 말고 뜬금없이 왜 화보 촬영하냐고 핀잔을 줘봐도 어쨌든 올해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스타와 그의 대표장면이라는 건 인정해야 할 모양이다. 어디선가 볼멘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화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머리칼이 길면 어떻고 짧으면 어때. 깎는 게 원빈인데… 라고? 뭐… 그럼 그러시든가.
올해의 위인 - <하하하>의 이순신
유쾌한 장군 납시오
성웅(聖雄). 지성과 덕망을 갖춘 영웅을 뜻한다. 과연 그런 영웅이 있겠냐는 의심은 금물이다. 통영의 문화관광해설자인 성옥씨는 “영웅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우리 맘속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경멸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현실도피를 계획한 <하하하>의 문경도 영웅의 현신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꿈에서 만난 성웅 이순신 장군 앞에서 그는 다짜고짜 울며 사랑을 고백한다. 이순신 장군은 문경에게 “좋은 것만 봐라. 어둡고 슬픈 것을 조심하라”라고 말했다. 영화를 본 뒤에도 잊혀지지 않을 말씀을 남기셨다는 이유로, 지금껏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나타난 이순신 장군 가운데 가장 유쾌하고 재밌는 캐릭터라는 이유로 그가 올해의 위인이다.
올해의 의상 - <초능력자>의 초인
이기적인 기럭지 같으니라구
<초능력자>의 초인이 영화에서 입는 의상은 두벌 정도다. 아마도 강동원이 연기한 캐릭터 가운데 가짓수에서 가장 단조로운 의상일 거다. 하지만 관객은 “강동원 초능력자 의상”, “초능력자 강동원 옷” 등의 검색어로 의상의 협찬처를 찾아다녔다. 당연히 명품 브랜드가 먼저 언급됐다. 누군가는 프라다 제품이라고 했고, 또 누구는 디올 옴므라고 했다. 진위 여부를 따지기 전에 의상감독이 직접 만든 의상이든 협찬을 받은 것이든 간에 이탈리아 장인이 한땀 한땀 정성들여 만든 옷처럼 보이게 만드는 강동원의 기럭지가 놀라웠다. 올해의 의상은 디자인이 어땠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옷이든 강동원이 입으면 그게 올해의 의상이다. 그러니 내년도 올해의 의상은 당연히 군복이다.
올해의 작별 - <토이 스토리3>
굿바이, 앤디-우디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장난감에 대한 예의를 이야기해왔다. 이 세계에서 장난감을 친구로 대하지 않는 자들은 가차없이 응징을 당한다. 1편의 씨드는 장난감을 분해하는 걸 즐겼고, 2편의 장난감 수집광인 알은 장난감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으며 3편의 곰인형 랏소는 장난감들을 지배하려 했다. 3편에 이르러 <토이 스토리>는 장난감과 주인의 관계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작별을 고민한다. 버리지 않고 다락방에 넣어둔다고 해서 그것이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토이 스토리3>의 마지막 시퀀스는 대학으로 떠나는 앤디가 장난감들의 새 주인을 찾아주는 장면이다. 관객은 남겨진 우디를 보며 글썽이는 앤디의 표정에서 울컥한다. 아마도 앤디는 그제야 어린 시절을 함께한 그들의 존재를 체감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작별이었다.
올해의 어리둥절 - <인셉션>
뭐가 꿈이고 뭐가 생시지?
남의 꿈을 훔치고 설계하는 사상 초유의 대도들의 이야기, 라고만 하는 건 <인셉션>의 이야기에 대한 주마간산이 된다. 꿈에서 깨면 꿈이고 그 꿈에서 깨면 또 꿈이라는 식의 이야기 구조는 재미있으면서도 어리둥절한 영화로 <인셉션>을 기억하게 했다. 전문가들도 <인셉션>을 말하면서 루빅스 큐브, 미로 등의 표현을 자주 쓴다. 복잡하고 정교한 이야기인데 역시 어리둥절하다는 그런 뜻이다. 그런데 잠깐! 이 영화가 올해의 개봉 외화 중 최고 관객 수를 기록한 영화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계신지? 얼마나? 자그마치 583만명! 우와, 이렇게 복잡한 스토리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다니, 한국인의 평균지능은 얼마나 높은 걸까?(Tip-미국의 영화연예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독자에게 <인셉션>의 명장면을 물은 적이 있다. 1위는? 빙빙 도는 복도에서의 격투신. 그럼 여러분은?)
올해의 자막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타이탄>
자막만 3D로 둥둥
<아바타> 이후 ‘3D’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인증마크가 됐다. 문제는 진짜 3D영화를 만들려고 한 게 아니라 <아바타> 광풍시대에 가까스로 막차를 탄 블록버스터들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2D로 만들어서 3D로 변환하려는 팀 버튼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제임스 카메론의 경고를 무시했고, <타이탄>은 예정된 개봉일을 일주일가량 늦추면서까지 3D 컨버팅을 감행했다. 3D 마케팅으로 관객을 낚은 덕분에 흥행에는 나름 성공했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3D는 팀 버튼만의 미술적 감흥을 떨어뜨렸고 <타이탄>은 공간감이나 입체감 어느 것도 살려내지 못했다. 제대로 된 3D 효과는 한글자막으로만 나타났다. 2D에 비해 약 5천∼6천원을 더 주고 3D 버전을 관람한 관객이 ‘자막만 3D’라며 비난한 건 당연한 일. 2010년 극장에서 본 자막 중 가장 입체적일 뿐만 아니라 가장 비싼 자막이었을 것이다.
올해의 연상연하 - <검우강호>의 양자경, 정우성 부부
이모와 조카 사이?
<검우강호>의 한국판 포스터는 정우성 뒤로 서희원과 양자경의 얼굴을 배치해놓았다. 영화에서 정우성이 한 여자와 사랑을 한다면 당연히 서희원일 줄 알았다. 웬걸, 영화 속 정우성은 양자경의 마음을 얻으려 구애의 몸짓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이런 마음이 나쁜 마음인 거 아는 데, 솔직히 영화를 보는 내내 낯설었다. 양자경은 1980년대부터 보았던 액션스타다. 정우성은 1990년대 청춘의 상징이었고 2010년에도 멋의 상징이다. 사랑에 나이가 상관없는 것도 알고, 세상에는 10년이 아니라 20년의 나이 차를 극복한 연상연하 커플이 있을 것도 같지만 막상 영화로 보고 있자니 이모와 조카 사이로밖에 안 보이더란 얘기다. 두 배우의 실제 나이 차는 11년이지만 아마도 관객이 체감하는 나이 차는 약 20년이었을 것이다.
올해의 ‘그것’ - <페스티발>의 딜도
작아지지도, 지치지도 않아요
‘그것’으로 명명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 좀더 고상한 표현으로는 올해의 가장 인상적인 소품 정도가 되겠다. <페스티발>의 지수는 요즘 들어 부쩍 시들해진 애인의 ‘그것’에 실망해 작아지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는 딜도를 주문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애인 장배는 지수가 거대한 딜도를 타며 엑스터시를 만끽하는 꿈을 꾼다. 장배의 꿈은 점점 작아지는 남자들의 악몽이고, 로켓을 꼭 닮은 지수의 딜도는 그들의 심란한 마음에 퍼붓는 지대공 미사일이다. 촬영이 끝난 뒤 이 딜도는 제주도 성박물관에 기증됐다는 후문이다. 남자친구의 그것에 실망했으나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이들은 박물관을 함께 찾아가는 것도 좋겠다.
올해의 하모니 - <방가! 방가?>의 ‘카밀라 송’
이주노동자들과 하나 되는 노래
영화 <하모니>가 아니다. 다른 하모니다. 회식자리에서 가라앉은 분위기 띄워보겠다며 엉망진창으로 불러본 적은 있어도 제대로 음미하며 불러본 적은 없는 편승엽의 <찬찬찬>이다. 게다가 합창으로 불러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철창에 갇힌 이주노동자들이 말 그대로 하모니를 이뤄 아카펠라로 부를 줄 누가 알았을까. 그들이 부르자 이 노래가 좋아졌다. 하지만 진짜 하모니가 이거라면 좀 심심하다. <방가! 방가?>의 하모니의 백미는 <찬찬찬>이 아니고 ‘카밀라 송’이다. ‘카밀라 송’이 무슨 내용이냐 하면… 사실 우리도 잘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몰라도 상관없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공장직원이 전화기에 대고 그의 아내 카밀라에게 늘 불러주던 노래라고 해서 우린 그걸 ‘카밀라 송’이라고 부른다. 음악은 공통어라고 하던데 맞는 것 같다. 이제 곧 강제 출국당할 각국의 이주노동자들이 ‘카밀라 송’을 함께 부르는 걸 듣자니, 가슴이 저절로 콩닥콩닥 뛴다. 천상의 하모니다.
올해의 삼각관계 - <이클립스>의 에드워드-벨라-제이콥
소녀와 흡혈귀와 늑대가 만나
인류의 형성 이래 사랑에 관한 가장 흔한 고민 중 하나가 삼각관계 아니던가. 하물며 하이틴 로맨스영화에서는 그것이 그냥 전부인 경우도 있다. 이 시대의 하이틴 로맨스물 <이클립스>에서도 사태는 마찬가지. 간간이 영화 속 미모의 여주인공들이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마음을 나눠주거나 다 나눠주기를 주저한 나머지 역사가 바뀌는 것처럼 <트와일라잇> 시리즈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여주인공 벨라, 그녀는 늑대를 택할 것인가 흡혈귀를 택할 것인가. 고를 상대가 늑대 아니면 흡혈귀뿐이라니 뭐 내가 벨라가 아닌 게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여하튼 미국의 십대 소녀들의 마음을 통째로 흔들어놓은 이 관계가 당신의 가슴마저 간질거리게 하고 볼을 상기시켰다면, 이들을 올해의 삼각관계로 꼽아도 창피하진 않겠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이 삼각관계, 유독 달콤한 데가 있다.
올해의 사이코 -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
그냥, 이유없이, 그런 짓을
사이코. 정신병자. 대개는 미친XX라고 불린다. 하여간 무엇 때문에라도 정신줄을 놓아버린, 영화의 장르를 넘나들며 초대받는 늘 인기있는(?) 인간들. 후보는 너무 많다. 민간인 중에는 <하녀>의 가족처럼 집단적으로 무시무시하게 미쳐버린 인간들도 있다. 하지만 기왕이면 전문범죄자 중 한명을 뽑기로 했다. 미모의 라디오 DJ와 아바타 놀이를 하자며 그녀를 괴롭히던 녀석(<심야의 FM>의 스토커), 오디오 하나 사겠다고 납치 및 살해도 서슴지 않는 녀석(<파괴된 사나이>의 납치범)을 다 물리치고 누가 뽑혔는가 하면, 그냥 이유없이 아무 짓이나 다 하는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최민식)이 뽑혔다. 다시 생각해도 단단히 미친 놈이다. 물론 설득력있는 반론도 있었다. 이놈보다 더한 사이코는 이놈을 잡았다 풀어줬다 하는 수현(이병헌)이라는 설. 듣고 보니 그것도 일리는 있다. 어쨌거나 이 영화 보다가 미칠 뻔했다고 하는 사람 많이 봤다.
올해의 만병통치약 -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의 된장
바르기만 하면 죽은 자도 살려?
짐승만도 못한 아버지는 딸이 죽자 그래도 아버지랍시고 말한다. “된장만 바르면 다 나아.” 벌에 쏘인 아내에게 남편 이랍시고 했던 말 역시 “된장 발라라”였다. 영화 속 복남의 남편 만종에게 된장은 책임회피의 매개체다. 모든 상처와 죽음이 된장으로 치유될 거란 그의 말은 사실상 별로 신경 쓸 문제가 아니란 뜻으로 통한다. 아내가 자기 동생에게 강간을 당해도, 마을 사람들에게 온갖 노역을 당해도, 아내 앞에서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해도, 어디까지나 만종은 이 섬의 유일한 (남자다운) 남자이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 남편에게 복수를 감행한 복남이 된장을 퍼붓는 장면은 올해 등장한 복수극 가운데 가장 밀도 높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올해의 소녀 - <킥애스: 영웅의 탄생>의 힛걸
어리지만 끌리는 걸 어떻게
당연히 <아저씨>의 칼부림이 먼저 떠올랐지만 그의 액션도 10살짜리 꼬마 여자아이의 난도질과 욕설만큼 센 에너지를 품고 있지는 않았다. <킥애스: 영웅의 탄생>의 힛걸이 펼치는 액션은 일단 당황스러웠고, 보다보니 매혹적이었으며 급기야 섹시하기까지 했다. 물론 미성년자, 그것도 여자아이의 액션에 열광하는 건 윤리적으로 꺼림칙한 일이다. 하지만 입꼬리 한쪽이 살짝 올라가며 짓는 잔인한 미소에 관객은 즉사했고, 힛걸을 연기한 크로 모레츠는 할리우드 소녀시대의 선봉장으로 등극했다. 힛걸은 현실세계의 윤리적 판단을 잊게 만든 2010년 액션영화의 종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