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5일
“올해의 영화 베스트10을 내놓으시오.” 이즈음 연통이 날아오면 나는 해마다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하얘진 머릿속을 헤집으며 괴로워하다가, 일찌감치 지난 세기부터 엑셀 프로그램으로 본 영화들을 관리해온 L선배가 부러워 어쩔 줄 모른다(“저야, 벌써 다 뽑았죠”라는 그 흐뭇한 목소리!). 남들은 어떻게 사나 웹서핑을 하다가 “톱10 뽑기의 규칙 톱10”이라는 제목의 글에 깊은 감명과 가책을 받았다. 팀 그리어슨과 윌리엄 라이치라는 평론가가 짜증을 참다 참다 쓴 투가 역력한 연말결산 십계명을 좀 거칠게 옮겨보자.
1. 주제와 소재가 비슷한 영화라고 뭉뚱그려서 한 순위에 올리지 마라. 엄연히 다른 상황에서 만들어진 다른 영화다. 2. 공동순위 남발 마라. 당신이 무슨 고차방정식으로 평점을 산출한 것도 아니고 어디서 동점질인가? 댁은 그냥 철저히 비평적 사고를 밀어붙이지 않았을 뿐이다(여기서 소심한 반론. 고차방정식을 쓰지 않으니까 기어이 동점이 나오는 것이다). 3. 케이블로 직행한 미개봉작을 포함시키려거든 TV평론가라고 명함을 파라. 4. 다른 연도의 영화를 슬쩍 끼워넣지 마라. 5. 당신이 올해 칸영화제에 다녀왔다니 축하한다. 무척 있어 보이긴 하지만 독자가 볼 수 없었던 영화는 넣지 마라. 6. 옴니버스의 한편 혹은 연작 전체를 하나로 취급하지 마라. 7. 되도 않는 아이러니 금지. “10위는 관객 여러분!”, 이런 재치는 옳지 않다. 당신이 무슨 E.T.를 올해의 인물로 뽑는 <타임>인가? 8. 수정주의 역사관 엄금. 개봉 당시 당신이 별 셋 반 준 영화를 연말 순위에서 별 넷 준 영화보다 위에 두면 반칙이다(재관람할 경우 평점의 수정을 인정하되 공식사과와 피치 못할 사정에 대한 진단서를 첨부하라고 요구했다). 9. 올해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나 중요한 영화가 아니라 당신이 제일 좋게 본 영화를 뽑고 있음을 명심하라. 10. 순위 매기는 풍습에 저항한답시고 ‘무순’으로 10편을 나열해서 가르치려 들지 마라.
그리어슨과 라이치의 냉철한 직업 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영화에 등수 매기기가 곤란한 작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본인이 동의하기 힘든 영화 베스트10을 보면 화를 내고, 전적으로 납득이 가는 순위를 내놓으면 또 필자에게 실망한다. 더불어 한점 구름처럼 어른대는 공연한 불안. 만약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가려진 채로 남겨두고 싶은 나의 일부를 알아차릴지도 몰라.
12월17일
연말 결산의 교훈은 흔히 ‘이삭줍기’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좋은 예감을 품고도 미처 보지 못한 영화들을 DVD, VOD 등등으로 따라잡는 것이다. 지각 관람한 <필립모리스>(2009)는 좀더 대접받을 만한 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픽션이 되기엔 너무 터무니없는 실화’의 표본인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 스티븐 러셀(짐 캐리)의 인생은 급커브의 연속이다.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악착같이 모범시민으로 살다가, 교통사고 뒤 게이로 커밍아웃하더니 누구보다 게이다운 라이프 스타일을 부양하느라 돈을 펑펑 쓰다 사기꾼이 된다. 감옥에서 만난 평생의 연인 필립 모리스를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다 사기의 스케일은 불어나고 스티븐은 투옥과 탈옥을 거듭한다. <필립모리스>는 아슬아슬해야 마땅한 계략과 적발의 사슬로 연결되지만 이상할 만큼 서스펜스는 없다. 그러나 이는 영화의 결점이 아니라 개성으로 이해된다. 사건을 통해 인물이 진화하는 대신 인물 안에서 사건이 풀려나오는 경우라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때문이다.
한바탕 웃고 난 <필립모리스>의 여운이 쓰라린 것은 스티븐의 열렬한 사랑에 관객이 곧이곧대로 감동할 수 없어서다. 그의 인생은 항상 뜨겁게 무엇을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다른 무엇을 필사적으로 잊기 위한 질주는 아닐까 하는 의심의 찌꺼기를 남긴다. 스티븐이 100%의 이성애자를 연기하는 데에 만족을 얻고, 다음에는 100%의 게이로 사는 데에 성취감을 느끼고, 그 다음은 100%의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낀 남자라면? <필립모리스>처럼 불균질한 영화에 호감을 느끼는 이유를 음악에 빗대자면 치약 CM 같은 쾌활한 선율로 슬픈 가사를 읊조리는 노래에, 빠른 비트에 쓸쓸한 멜로디를 얹은 댄스뮤직에, 바리톤과 소프라노가 각자의 독백을 동시에 노래하는 이중창 아리아에 끌리는 까닭과 일맥상통한다.
이층침대에 걸터앉은 스티븐을 필립이 물끄러미 올려다볼 때, 밖에선 폭동이 한창인데 둘이서 아랑곳없이 천천히 춤을 출 때, <필립모리스>는 2인실 감옥을 지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소로 둔갑시키는 눈속임을 천연덕스럽게 해낸다. <필립모리스>의 연기에 관한 평은 주로 “짐 캐리가 또 한번 해냈다”로 모아졌지만 나는 스티븐의 얌전한 연인으로 분한 이완 맥그리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도벽, 허언증, 강박증, 부상과 투병 등등 굵직한 과제가 주어진 짐 캐리의 스티븐은 화려하게 연기할 카드로 중무장하고 있지만, 그의 맞은편에 있는 필립은 그냥, 좋은 사람일 뿐이다. 맥그리거의 연기는 절제됐다고 표현하기에도 망설여질 만큼 순순하다. 요란하게 시선을 끌어당기는 짐 캐리 옆에서 그냥 바스락거린다. 자기 안의 뭔가를 ‘거세’해버린 것 같은, 그 단호한 도려냄이 섬뜩하다.
12월19일
임순례 감독이 대표로 일하고 계신 시민단체를 따라 경기도 한 동물보호소에 다녀왔다. 300마리를 헤아리는 개들은 크게 두 부류다. 지칠 줄 모르고 사랑을 간구하거나, 사랑 따위 이젠 경멸해버리고 우리 깊숙이 틀어박혀 있거나. 영화가 그리는 인간도 모든 제스처를 소거하고 나면 결국 둘 중 하나일까.
12월20일
<드래곤 길들이기>를 보다. ‘애니팔’(anipal)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영화학 교수 하워드 쉬버에 의하면 <스타워즈>의 츄바카나 <오즈의 마법사>의 강아지 토토처럼 주인공에게 웃음을 주고 상심하면 위로하고 위기에 빠지면 구해주는 영화 속 동물 파트너를 통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드래곤 길들이기>의 용 투슬리스도 그 범주를 넘어서진 않는다. <릴로 & 스티치>의 스티치, <마녀의 특급비행>의 검은 고양이 지지를 닮은 투슬리스는, 확실히 내가 아는 용은 아니다(상상의 동물을 안다고 말해봤지만). 애완동물이며 의지대로 훌륭히 움직여주는 기계다.
12월21일
오리지널 <트론>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놀라다. 1982년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영화의 명단에는 <괴물>(The Thing) <코난> <매드 맥스2> <리치몬드 연애소동>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가 있다. 그해 영화인들의 컬트 유전자를 활성화시키는 운석이라도 캘리포니아에 떨어진 걸까? <옥희의 영화> 대사를 빌리자면, 할리우드에 누가 약을 쳤나?
12월22일
<인셉션> <소셜 네트워크> <트론: 새로운 시작>. 올해 많은 말을 낳은 영화들을 돌아보다 우연히도 기업을 통해 맺어지는 인간관계와 모종의 사기술을 그린 이야기라는 점에 눈이 간다. 바야흐로 우리는 젊은 주인공이 기업 경영 일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하며 끝나는 영화를 보고 있다. 언급한 세편의 영화 안에서 정점에 서 있는 것은, 창조하는 자- 예컨대 예술가- 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는 인물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2010년 영화가 제시하는 젊은이들의 영웅은 IT 산업의 CEO인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