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펑펑 쏟아지던 며칠 전 한 감독님의 차를 얻어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니, 사고를 냈다고 하는 편이 올바를 것이다. 교차로에서 우리가 탄 승용차의 브레이크가 듣지 않아 중형 트럭의 옆구리를 받은 거니까. 이쪽 차는 앞부분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저쪽 차는 멀쩡했던 탓에 양쪽 운전자가 연락처를 교환하는 정도로 사고처리가 마무리됐고 때마침 교차로를 지키고 있던 보험사 직원의 도움으로 집까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게다가 다음날 확인한 결과 그 감독님이나 나나 몸에 별 이상이 없었다. 그야말로 불행 중 다행이랄까. 감독님의 승용차가 ‘독박’을 쓰고 우리 모두를 위기에서 구한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사고를 겪고도 외려 기분이 좋아진 이상한 경험이었다. “2011년을 위한 액땜으로 생각하세요.” 한 영화사 직원의 트윗을 보고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러고 보면 ‘액을 땜질한다’는 말은 매우 한국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에서 연유한 것 같다. 오늘의 불행을 내일의 행복으로 간주하려는 의지가 담긴 이 말처럼 모두 2010년의 나쁜 일들을 액땜으로 떨치고 2011년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한국영화에 대한 바람도 비슷하다. 한국영화산업은 꽤 오랫동안 불행을 겪고 있다. 수익성 악화-투자 위축-제작 부진-스탭 처우 악화로 이어지는 연쇄반응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 갑갑하고 짜증나는 이 모든 상황을 액땜으로 간주하게 될 날이 왔으면 싶다. 어쩌면 2011년은 그 씨앗을 뿌리는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지난주 예고했던 ‘한국영화계 희망의 근거’는 바로 올해 만들어져 공개될 영화들이다. 7년 만에 귀환한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드러낼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 특유의 신들린 ‘구라’를 보여줄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 쉼없이 새 영화를 만들고 있는 홍상수 감독의 신작 등등등. 커지는 궁금증만큼이나 2011년 한국영화에 대한 기대감도 부풀게 된다.
물론 지난 불행을 액땜으로 치부한다고 망각의 단계까지 가선 안될 것이다. 그날 사고도 결국 눈길에서 부주의하게 주행한 운전자의 책임(감독님, 죄송!)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훌륭한 영화들이 쏟아진다 해도 현재의 산업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현재의 암흑기를 ‘그런 날이 있었지’라며 돌아볼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2011년이 진정 희망의 한해가 되려면 산업 각 주체의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고 이 테이블을 만들 영화진흥위원회의 쇄신이 절실하다. 그러니 차기 위원장은 제발….
P.S. 윤성호 감독의 칼럼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가 윤 감독의 개인 사정으로 마치게 됐다. 독자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고 개인적으로도 팬이었는데 진심으로 아쉬운 마음이다. 수차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가 칼럼을 중단한 건 영화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의지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윤성호 감독 또한 2011년 가장 기대되는 인물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