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풍속화는 지독하였으나
2011-01-13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과하고도 부족한 영화, 나홍진 감독의 <황해>

*이 글은 스포일러로 가득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구남(하정우)이 죽는 장면이 아니다. 경찰의 추격을 피해 산에 숨어든 구남은 자신의 팔에 난 상처를 보며 순간적으로 놀란다. <황해>의 그 어떤 장면보다 하정우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바로 이때다. 온 세상이 자신을 잡기 위해, 또는 죽이기 위해 몰이사냥을 해올 때, 구남은 그런 상황에까지 내몰린 자신의 처지를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운명의 수레바퀴에 깔린 이의 소리없는 비명. <황해>의 절망적 정조는 구남의 목을 조이는 가학적 상황보다 비극적 운명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는 최소한의 희망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황해>에는 세명의 남자가 등장하지만 궁극적으로 <황해>는 구남의 영화다. 이는 <황해>가 죽음에 이르는 길 외에는 그 어떤 길도 허락하지 않는 허무주의적 정서로 팽배한 작품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구남은 승자의 전리품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죽음에 이르는 길을 연장하기 위해 뛰고 또 뛸 뿐이다.

최후는 예고되었다

<황해>는 그 시작에서부터 구남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다. 면 선생(김윤석)은 구남에게 사람 하나 죽이는 대가로 그가 진 빚을 탕감할 수 있는 금액을 제안한다. 구남이 바라는 것은 대변과 차변의 셈이 제로가 되는 출발선에 서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전부다. 구남이 몰랐던 것은 패자부활전은 이미 오래전에 박물관의 유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비관적 비전은 그리 낯설지 않다. 낙관보다는 비관을 즐기면서 악몽의 세계에 머물려 하는 것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반복되는 경향이다. 나는 이미 <부당거래>와 <초능력자>와 관련한 글에서 이러한 경향에 대해 지적한 바 있고(<씨네21> 780호), 굳이 그 내용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황해>는 최근의 한국영화 중 가장 비정한 세계관을 앞세운 작품이다. 이러한 비정함은 인물이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길을 봉쇄한 뒤, 예정된 운명의 길을 따라가도록 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부당거래>의 경우 선택에 대한 가능성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최철민(황정민)의 죽음은 구남의 죽음과 구별된다. 최철민의 죽음은 운명의 힘보다는 그의 행위(선택)에 의해 파생된 것처럼 보이고, 이는 ‘그 선택만 아니었다면’이라는 가정의 여지를 남긴다. 하지만 구남의 죽음은 동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구남이 죽음을 맞는 원인이 그의 잘못된 선택(청부살인에 응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은 이미 예정된 운명 같은 느낌을 주면서 (최철민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것과 같은) 또 다른 가정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해>의 ‘개병이 돌고 있다’로 끝맺는 구남의 첫 내레이션, 즉 개병에 걸려 물어죽일 수 있는 건 모조리 물어죽이다가, 죽어서는 푹 삶겨져 누군가의 입에 물려야 했던 개 이야기는 너무 직접적으로 이후 내용을 요약하는 느낌을 준다. 죽어가는 구남, 또는 죽은 구남의 읊조림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내레이션의 직접적 효과는 구남의 발목에 결코 벗어날 수 없을 운명의 족쇄를 채워버린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에서 황해는 두번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영화는 바다에 버려지는 시체를 보여준다. 구남이 한국으로 밀항할 때, 배 안에는 누군가의 사진을 든 채 시름시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황해를 끝내 건너지 못한 채 바다에 버려진다. 구남의 시점숏처럼 포착된 이 장면에서, 그는 버려지는 여인을 통해 자신을 운명을 봤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구남 역시 유사한 숏의 배치와 구도를 통해 바다에 버려진다. 하지만 <황해>는 자신에게 부여된 가혹한 운명과 싸우는 영웅적 인물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인물의 의지도, 암담한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라는 일말의 희망도 없이, 근 세 시간에 육박하는 시간 동안 물려죽을 운명을 신탁받은 구남의 생존기를 지켜봐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허망하고 지치는 일이다. 영화의 인물이 실험실의 쥐가 아닌 이상, 운명의 족쇄를 채운 채 그 행동을 가학적으로 지켜보는 일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그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황해>가 구남에게 가해지는 가학적 운명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하는 것에 의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생존의 문제 앞에서 단지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구남의 처연함은 조선족이라는 단순한 위치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물론 그는 어디까지나 조선족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관객이 연민을 느끼는 이유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의 시작에서 끝까지 구남의 편은 아무도 없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고, 아무도 그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구남을 표상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은 조선족의 역사적 위치를 가리키는 경계인보다는 한국사회에서 그들의 위치를 함축할 수 있는 (조르주 아감벤의 표현을 빌리자면) ‘벌거벗겨진 인간’(Homo Sacer)일 것이다. 가령 소나 양은 희생 제물로 바쳐질 수 있는 반면, 지렁이나 작은 벌레들은 죽인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무가치한 존재다. 현실적으로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는 말은 수사로서만 가능하다. 현실적으로는 존귀한 생명과 그렇지 못한 생명을 가르는 경계가 존재하고, 그 경계선 너머에는 잉여 인간이라는 딱지가 붙은 버려진 자들이 존재한다. 죽여도 죄가 아니며,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질 수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들, 그들이 바로 벌거벗겨진 인간들이다. 이는 구남이 한국사회의 조선족과 (영화에서 스치며 보여주곤 했던) 제3세계 노동자뿐만 아니라, 금세 벌거벗겨질 위험에 처한 인간들까지 환기시키는 힘이 있다는 뜻이다.

<황해>는 생존하는 것 자체가 버겁기만 한 구남의 체험을 통해 벌거벗은 인간들에게 막다른 골목을 강요하는 한국사회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생존을 삶의 유일한 목표로 던져준 채, 그 이상의 어떤 희망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황해>에 담긴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그것은 타자의 시선에 비친 세계가 아니라 타자가 체험한 세계에 가깝다. 최근 한국영화에서는 구축숏(롱숏)의 역할을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경우를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황해> 역시 그러한 경향이 있지만 영화 전반적으로는 꽤 중요한 미학적, 주제적 효과를 창출하는 것으로 보인다. <황해>가 롱숏을 생략하거나 짧게 처리한 뒤 미디엄숏과 클로즈업으로 인물에 집중할 때, 관객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대신 인물이 체험하는 세계를 함께 호흡하게 된다. 구남이 막다른 골목에서 또 다른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릴 때, 구남이 절망적으로 체험하는 세계는 고스란히 관객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황해>가 드러내는 한국사회

<황해>는 한국사회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려는 작품은 아니다. 이방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에서 자주 반복되는 세계의 상투적 묘사(일상적인 것을 이질적으로 경험하는)도 거의 없을뿐더러, 한국사회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몇몇 장면들은 현실적이기보다는 영화적인 느낌을 준다. 실제로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추격자>와 유사하지만, 전작에서 이러한 태도가 극 속에 녹아 있었던 반면, <황해>는 구남의 도주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또는 좀더 직접적으로 냉소하기 위해서) 그 무능함을 과장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황해>가 한국사회의 절망의 기운을 포착하고 있다면, 이는 (한국사회 전반을 구현하지는 않는다 해도) 벌거벗은, 또는 벌거벗을 인간들이 온몸으로 체험한 한국사회의 풍속화로서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가 ‘쫓는 자’가 아닌 ‘쫓기는 자’에 대한 영화여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구남과 함께 면 선생의 존재를 고려하면 <황해>의 조선족에 대한 입장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구남은 ‘경험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족 인물이다. 구남에게 몇푼의 돈을 건네는 김승현(곽병규)의 행동에서 잘 드러나듯, 우리는 일반적으로 조선족을 우리의 호혜를 기꺼이 받아야 하는 존재로 여긴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같은 민족이라 해도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성을 지닌 그들을 익숙한 이미지로 길들이려 한다. 면 선생은 익숙함 속에 억압되었던 낯섦, 혹은 익숙한 조선족 이미지의 이면을 구현한다. 즉 한편으로 우리가 구남을 익숙한 이미지로 환원하려 한다면, 그 반대쪽에 위치한 면 선생은 이를 차단한다는 것이다. 면 선생과 그 일당은 자신들의 타자성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들이 한국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더 당당한 존재로 그려놓는다. 가장 압권은 호텔 커피숍에서 면 선생이 김태원(조성하)에게 손을 내밀며, “한식구가 됐는데”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이 순간, 한국과 조선족간의 일반적 관계가 역전된다. 면 선생이 공포의 대상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족발로 사람을 때려잡아서가 아니라 익숙함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타자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왜 엔딩에 힘이 실리지 않았을까

구남은 아내가 딴 남자와 놀아나는 악몽에 시달린다. 구남은 첫 번째 악몽 뒤에 빚쟁이에게 시달리고, 두 번째 악몽 뒤에는 면 선생을 찾아가 제안을 받아들인다. ‘돈’과 ‘치정에 얽힌 아내’, 그것이 구남이 황해를 건넌 이유고, 이는 이후 면 선생과 김태원이 각각 황해를 건너는 이유로 재등장한다. 면 선생은 돈이 될 만한 냄새를 맡고 황해를 건너고, 김태원은 치정 때문에 (상징적 의미에서) 황해를 건넌다. 그러니까 김태원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돈에 얽혀 움직이고, 면 선생을 제외한 이들은 치정에 얽매어 있다. <황해>는 살인극으로 시작해 사회비판적 영화를 경유한 뒤 치정극으로 끝맺는 영화다. <황해>는 사건의 원인에 비해 결과(와 그에 이르는 과정)가 너무 파국적이거나 과잉된 것처럼 느껴진다. 또는 그 파국적 결말에 비해 그 원인이 너무도 초라하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초 원인(행위)에 비해 과도한 결말이나 의도와 달리 걷잡을 수 없이 꼬이는 사건과 인물을 다루는 최고 대가는 코언 형제이고, 실제로 <황해>는 코언 형제 영화의 하드보일드 버전(또는 하드고어 버전)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우리가 경험했던 비정한 악몽이 치정의 결과였다는 사실이 진실의 탈을 쓰고 밝혀질 때, 이는 최대한 좋게 말한다면 코언 형제식의 삶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세계(인물 위로 보이던 아름다운 하늘)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무력한 개인을 무심히 바라보는 응시의 주체이지, 결코 개인을 잡아먹겠다고 아가리를 벌리는 가학적 운명의 세계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결말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장르가 스릴러이고, 치정만큼 얽키고설킨 인물관계를 보여주는 설정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 지독한 풍속화에 어울리는 적절한 선택인지는 의문스럽다. 더군다나, 구남에게 의뢰한 자가 김태원이 아니라는 사실과 또 다른 살인의 의뢰자인 은행원과 교수 부인의 치정까지 덧입혀지면서, <황해>의 계속되는 반전은 삶의 아이러니를 부각하기보다는 반전을 위한 퍼즐 게임으로 영화를 축소한다. <황해>가 적나라하게 보여준 가혹한 세계는 아이러니한 삶의 결과나 “여기에 부부가 몇이나 될 거 같니”라는 식당 주인의 말에 담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쩌면 치정에 얽힌 문제는 치정 자체보다 그와 얽힌 모든 진실을 반전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치정에 얽힌 진실은 반전의 형식으로만 그 실체를 드러낸다. <황해>의 스펙터클에 대한 강박은 자본의 힘이 더해지면서 스케일의 스펙터클을 제대로 발휘한 반면, 반전에 대한 강박은 내러티브의 결점을 만들고 자신이 그렸던 풍속화를 스스로 손상하는 결과를 낳는다. <황해>는 그 엔딩에서 죽은 줄 알았던 부인의 귀향을 덧붙인다. 이 장면은 내러티브적인 동기부여로 봤을 때는 현실이고, 전반적인 분위기로 봤을 때는 상상에 가깝다. 그것이 꿈이든 현실이든 간에, 아마도 나홍진은 그것이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구남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 엔딩 자체는 존중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는 반전의 연쇄 속에 제시됨으로써 감독의 의도만큼 힘을 갖지는 못한다고 느꼈다. 이러한 면에서 이 엔딩은 어디까지나 환상으로 머물고 만다. 구남이 아닌 감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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