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에서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김석윤 감독으로 통하지만 방송계에서 그는 김석윤 프로듀서다.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KBS 방송국 주변을 잠시 거닐 때 지나는 사람마다 그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는 걸 보니 그는 확실히 이 분야의 오래된 사람이다. 그는 각종 쇼 프로그램과 드라마 등을 연출해왔다. 영화인이면서 방송인,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그가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건 자신이 연출한 시트콤 드라마 <올드미스 다이어리>가 큰 인연이 됐다. 같은 연출자가 드라마를 만들고 나서 동명의 제목으로 내처 극장판까지 만들었는데, 국내에서 그런 시도 자체가 전무후무했을 뿐만 아니라 개봉 당시 이 영화는 흥행성적과 무관하게 무시하지 못할 소수의 골수팬을 낳았다. 때문에 언젠가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가 돌아온다면 ‘올미다’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 올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그는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왔다. 조선시대의 탐정과 그의 심복을 데리고 요절복통의 사극 세상을 꿈꾸며 온 것이다.
-방송과 영화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한 건 아니고…. 본사에서 배려해주어 파견 발령식으로 영화제작 업무를 하고 다시 돌아온 셈이다. 일반 회사가 아니고 방송국이다 보니 제약이 덜했다. 방송과 영화 사이에 어떤 공통점은 있는 것 같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라면 시청자, 영화라면 관객, 공통적으로 수용자가 있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우울한 분위기를 일소해주는 웃음. 말하자면 예능이란 수용자에게 그런 즐거움을 주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영화도 그런 형식이다.
-영화는 대략 4년 만인데, 일단 촬영 초반이 어땠을까 궁금하다.
=전략적으로 보면 첫회는 스탭과 배우가 호흡도 맞추고 해야 하는데… 받쳐주지 않는 게 많았다. (웃음) 첫회에 첫신을 찍었는데, 헌팅 갔을 때는 파랬던 수수밭이 가서 보니 벌겠다. 잎사귀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커져 있었고. 일단 접근이 용이하질 않았다. 특히 날씨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 원래 영화의 배경은 여름인데 가을 들어 찍기 시작했으니 촬영 중에 단풍이 들고 눈이 오면 큰일이었다. 개봉 일정은 맞춰져 있었고. 그러다 보니 세트 촬영을 전부 뒤로 미뤄놓을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로케이션, 오픈 세트부터 찍어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공간’을 중심으로 찍다보니 이야기상으로는 뒤죽박죽 찍게 됐다. 첫 장면 찍고 마지막 찍고 이야기가 미처 전개되기도 전에 절정을 찍기도 하고. 나보다 연기자들이 많이 헷갈렸을 거다. 이 톤이 맞나 저 톤이 맞나 하면서. (웃음) 그래서 연기자들에게 꼼꼼하게 편집을 보여주면서 했다. 그러고 보니 편집 과정 중에 큰 방향 전환도 한번 있었다.
-어떤 전환이 있었나.
=추리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라 자세히 말하긴 어렵지만 그게 관객에게 좀 어렵게 받아질 거라는 의견들이 많이 나왔다. 단서는 충분히 만들어놨지만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어려울 수 있다는 거였다. 그보다는 좀더 편하게 갔으면 하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자고 했다. 12세 이상 관람가라면 쉽게 가는 게 맞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는 단서를 찾아나가며 벌이는 추리극 부분에서 맛깔나는 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설명을 많이 하다 보니 그건 좀 줄었다. 그게 장점이 된 것도 같고 아쉬운 점인 것도 같다. 하지만 오락적으로 즐기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스토리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오락적인 포인트를 전달하는 건 더 어려울 거라고 판단했다.
-설 시즌 오락영화로서 포인트를 명확히 잡았다는 뜻으로 들린다.
=꼭 설 시즌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처음 시나리오 초안을 받았을 때는 영화하겠다는 생각없이 그냥 봤다. “읽어나 보세요” 하기에 “나 사극 안 좋아하고 잘 모릅니다”, 하면서 봤다. 2007년부터 말이 나왔던 작품이라던데 돌다돌다 나에게까지 온 건가 하는 생각도 했고. 읽어보니 오락적으로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만들면 오락적으로 갈 것 같은데 괜찮겠나.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나”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더라. (웃음) 명절을 노렸다기보다 그렇게 오락적으로 만들겠다는 지향점을 갖고 시작한 거다.
-원작이 김탁환의 <열녀문의 비밀>이다. 각색하는 과정에서 신경 쓴 부분은.
=원작 소설을 재미있게 봤다. 하지만 소설 자체가 영화적이지는 않았다. 원작을 읽고 나니 시나리오 초고가 원작을 영화적으로 바꾸려 한 결과였다는 걸 알게 됐다. 말한 대로 오락적인 요소를 많이 가미했다. 미스터리 부분들이 추가됐고. 반전 포인트랄까 강도를 높이는 작업도 했다.
-현장에서의 즉흥적인 선택도 있었나.
=지금 생각나는 건 목소리 굵은 사또가 나오는 장면. 그건 원래 정보 전달 이상의 의미가 없었던 역할이다. 그런데 사또로 나올 연기자의 동영상 클립을 보는데 목소리가 너무 좋더라. 그러고 보니 김명민도 목소리 톤이 좋잖아, 그럼 이걸 두 사람의 목소리 톤 대결로 한번 가보면 어떨까, 해서 넣은 거다. 나뿐만 아니라 어느 시기가 되니까 김명민의 머리에서 아이디어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더라.
-어떤 것들이 쏟아져 나오던가.
=예를 들어 땅콩장수로 분장을 하고 나서 다른 분장은 다 지워도 점 하나는 남겨놓고 가자거나, 미인 한객주(한지민)를 보고 땅콩을 떨어뜨린다거나 하는 것들. 분장 아이디어도 본인이 많이 냈다. 김명민이 연기한 탐정에는 수염이 달려 있기 때문에 이것저것 변장하는 데 어떤 한계가 있었는데도 본인은 그 한계를 넘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오달수는 어땠나.
=물론 잘했다. 배우 오달수를 좋아한다. “난 당신을 좋아하니까 영화에서 길게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본인한테는 아마 그게 부담이 됐을 거다. 싫증나지 않게 하면서도 길게 끌고 가는 역할에 대한 부담. 오달수 특유의 톤도 원하지만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영화 전에 오달수가 출연하는 <오구> 공연을 봤는데 그 안에서 이미 자연스럽게 관객을 끌어내는 걸 하고 있었고 그게 좋았다. 오달수가 맡은 서필의 톤이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촬영 당시에는 평이하게 끌어가는 톤에 불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리얼하고 좋더라. 합이 안 맞거나 톤이 안 맞는 부분은 현장에서 잡아가며 더 자연스러워졌다. 생동감있는 결과물이 나온 것 같다.
-두 배우의 코믹한 장면이 많다. 베스트를 뽑아볼 수 있을까.
=김명민과 오달수 두 사람이 연기한 것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저장고에서 둘이 목매다는 신. 김명민은 김명민대로 오달수는 오달수대로 잘했다. 김명민 혼자 하는 장면을 꼽자면 정자에서의 장면. 그리고 아까 말한 사또와의 저음 대결. 그리고 한객주에게 홀려 넘어갔을 때의 표정도 좋다. 정자 장면에서는 당당한 척하다가 스윽 다시 걸어들어가는 약간의 비굴한 모습이 좋고, 사또와 있을 때나 한객주와 있을 때는 그 짧은 동안의 표정 변화가 좋다. 그리고 오달수 때문에는… (웃음) 오히려 내가 현장에서 NG를 내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연출자로서 모니터보다는 좀더 배우들 근처에 있자는 주의이고 그래서 카메라 옆에 잘 서 있는데 아무리 예상을 한다고 해도 오달수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웃음을 참기 어렵다. 영화에서 오달수가 미친 것처럼 혼자 “배고파, 배고파” 하는 것 있지 않나. 원래 대사는 그냥 단순하게 배고파를 말하는 거였다. 그걸 해보자니까 본인도 처음엔 뻘쭘하지. 하지만 그게 오달수식으로 되더라. 사실 영화에 담긴 건 NG컷인데 좋아서 잘라 쓴 거다. (웃음)
-김명민에게는 한객주, 정조, 개장수 등 상대 인물들을 대할 때마다 톤을 달리하라고 했다던데, 이유가 뭔가.
=인물의 톤을 놓고 보면 그의 스펙이 보이지 않겠나. 톤은 몇 가지가 있었다. 가장 남자다운 톤, 속물 같은 톤, 정통 사극에 어울리는 톤, 서필과 있을 때는 고등학생 때 친구들끼리 노는 그런 톤, 노비들을 대할 때는 마음속 인본주의가 엿보일 수 있는 그런 톤.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톤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배우와 감독 사이에 의견 조율이 필요할 때도 있겠다.
=현장에서 의견이 부딪칠 때는 서로 맞다고 논쟁하지 말고 누가 맞는지 무조건 주변 호응으로 결정하자고 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밀린 경우도 있지만! (웃음) 김명민이 오달수에게 “이런 개 같은 놈이” 하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그 대사가 정말 욕하는 것처럼 들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김명민은 약간 장난스럽게 가자고 했다. 그래? 그럼 내가 얼마나 쿨한 연출자인지 보여주겠어 하며 두 가지 버전으로 찍어보자고 했다. 당연히 내 버전이 더 어울릴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현장기사가 두개 중에 떡하니 김명민 버전을 골라서 최종으로 붙여놓은 거다. 게다가 스탭에게 보여주자 다른 스탭들, 그러니까 조금 더 내 편일 것 같은 사람들마저 김명민 버전이 좋다고 하더라. 그럴 땐 당연히 내 걸 버리는 거다. (웃음)
-오달수의 연기를 좋아하는 관객 중 한 사람으로서 그의 연기를 오래 보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콤비 플레이에 정말 능한 배우다. 극중 서필 역으로 여러 배우 이름이 거론됐지만 오달수 이야기가 나온 순간 한순간에 다 정해졌다. 시나리오상으로 보면 서필 역은 사실 약간 촐싹거리는 그런 캐릭터다. 그런데 오달수가 하니까 오달수만의 설정이 잡힌다. 연기자가 확실히 자리매김하면서 캐릭터가 재구축된 것이다. 나도 오달수의 팬으로서 만족스럽고 재미있었다.
-사극을 안 보는 편이라고 말했는데 그건 사극이 대체로 뻔해 보여서 평소 재미없어 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사극이라면 다 본다는 사람도 있는 반면 나는 한복을 입고 나오면 이상하게 무조건 잘 안 보게 된다. 물론 근거없는 선입견이지만 나는 그랬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나처럼 선입견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장면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영화에는 유독 인물들이 달리는 장면이 많다.
=스피디하고 역동적이고 오락적인 스케일. 그런 걸 해봤으면 싶었다. 예를 들면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서 보이는 그런 느낌. 처음엔 무조건 달릴까, 잘만 달리면 재미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마치 지뢰를 헤치고 가는 느낌을 생각했고 그런 장치를 해놓고 달리자고 결정했다. 달리는 장면 중에는 편집된 아까운 장면도 있다. 장면 자체가 일단 많았으니까. 마라톤 경기를 패러디한 것도 있었다. 속도감있는 사극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반면 전반적으로 좀 어수선하다는 평도 있다.
=그런 점이 있었다면 스토리 자체는 단순한데 그걸 추리극식으로 보여주면서 생긴 부작용이라고 하겠다. 뒷부분의 대미를 장식해야 하는데 단선이 아닌 이 복합 라인을 어떻게 소화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다. 가령 8가지 스토리를 8가지로 짜맞춘 것이 아니라 다섯 가지 스토리를 8가지로 짜맞추다보니 생긴 부작용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여하튼 일반적인 독법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속편을 약속하는 것처럼 끝난다.
=김명민의 입에서 속편 이야기가 나와서 불이 붙은 거 같은데(웃음), 사실 편집상에서는 지금의 그 투숏이 엔딩은 아니었다. 영화적으로 속편을 상정했던 적은 없다. 19년 가까이 방송을 해서인지 영화가 내게 안 맞는 구석도 있긴 하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글쎄, 다시 영화를 하게 될까? 안 할 것 같은데? 이러고 나서 나중에 또 말 바꿀 수도 있겠지. (웃음) 여하튼 지금은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