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정말 해피엔딩일까?
2011-02-24
글 : 이현경 (영화평론가)
<윈터스 본>에 내재된 양면성을 들여다보다
<윈터스 본>

<윈터스 본>은 딸이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엄마가 아들을 찾고(<체인질링>) 아버지가 딸을 찾는(<테이큰>) 경우가 일반적이므로 딸이 그것도 소녀가 아버지를 찾는 건 이례적이다. 다소 이례적인 이런 설정보다 정작 놀라운 이 영화의 독특함은 장르적 구조에 있다. 병든 엄마와 두 동생을 돌보는 17살 소녀 리 돌리가 실종된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마을을 돌아다니는 영화 초반, 관객은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과 <트윈 픽스> 같은 ‘마을 미스터리’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윈터스 본>은 평범해 보이는 마을에 도사리고 있는 추악한 음모가 점차 드러나는 마을 미스터리 공식에 어긋날 뿐 아니라 정반대의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스릴러로서 이 영화의 플롯은 익숙한 마을 미스터리 관습을 활용하지만 스토리는 낯선 목적지를 향해 전진한다. 아버지를 찾으려는 리와 그녀의 행동을 막으려는 마을 사람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 속에 서스펜스가 구축되는 영화의 분위기와 예상을 뒤엎는 일종의 해피엔딩은 서로 이질적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질적이지만 영화 전체는 통일성을 잃지 않으며 자기 길을 가고 있다. 장르영화의 효과를 십분 활용하면서 자신만의 주제의식을 건져내는 데브라 그래닉 감독의 연출력이 빛나는 부분이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리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가족을 지킨다. <윈터스 본>의 진짜 미스터리는 이 따뜻함이다. 정녕 이 소녀 가장은 마을의 호의 속에 가족을 지키며 살 수 있을 것인가? 장르든 주제든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양면성에 주목해 읽어보려 한다. ‘세상과 맞선 소녀의 사투를 다룬 미스터리’라는 말로 요약되지 않거나 반대로 읽을 수 있는 여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미국인에게도 낯선, 신화적 마을의 여자들

리 돌리는 여러 가지 의미로 경계선에 있는 인물이다. 몸과 마음이 이미 성숙했지만 법적으로 미성년이라는 점도 그렇고 마을의 정체를 대충 알지만 진정한 일원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처지를 보아도 그렇다. 마치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 서 있는 웨스턴의 주인공처럼 리도 고독한 싸움을 벌인다. 리를 제외하고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배경은 미주리주 오자크 지역의 낙후되고 가난한 산악 마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마약을 제조하고 자신들만의 룰을 만들어 생활한다. 리는 더 큰 공동체인 국가의 법과 자신이 속한 작은 공동체인 마을의 룰 사이에 끼어 있다. 리는 보안관이나 가석방 보호감찰관에게 마을에 관한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마을 사람들의 충고나 협박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즉, 리는 아직 국가의 법과 마을의 룰 어느 것도 내면화시키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현실은 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아버지가 재판에 출석하지 않자 국가는 보석금 담보로 잡혀 있는 리의 집과 땅을 빼앗아가려 하고,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는 일을 방해한다. 한 다리 건너면 일가친척인 작은 마을에서 리 가족은 온전히 융화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내부 밀고자로 죽임을 당한 리의 아버지, 외톨이 같은 리의 큰아버지,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리는 마을의 일원이면서도 마을 속 타자다. 리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아버지의 친구, 친척 등을 차례로 찾아다니다 마을의 어른 텀프 밀튼에게 간다. 커다란 가족 같은 마을 공동체에서 소외된 개인은 생존하기 어렵다. 본능적으로 그 점을 느낀 리는 ‘가족’, ‘어른’을 들먹이며 텀프에게 보호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텀프는 리를 상대하지 않는다. 텀프 대신 그의 아내는 리에게 “집에 남자는 없니?”라고 묻는다.

리가 아버지의 존재든 부재든 증명하기 어려웠던 것은 여자이기 때문이다. 완고한 가부장적 공동체에서 아직 미성년인 여자는 마을의 룰을 건드릴 자격이 없다. 이 마을에서 룰을 정하고 집행하는 건 남성의 몫이다. 무자비하게 얻어맞은 조카를 찾으러 온 큰아버지가 마을 남자들에게 누구 소행인지 묻는 장면이 있다. 그때 텀프의 아내가 자신과 여동생이 한 일이라고 나선다. 이런 행동은 여자들끼리의 일로 무마하기 위함이다. 자칫하면 몸싸움이 벌어질 위기를 넘긴 다음, 텀프는 리를 데려가는 조건으로 큰아버지에게 보증을 요구한다. 더이상 말썽을 일으키지 않게 책임을 지라는 것인데 이 거래 역시 남자들끼리 주고받을 뿐 당사자인 리는 빠져 있다.

남성 중심의 오지 마을을 그린 이 영화에서 여성의 역할은 흥미롭다. 리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건 여자들이다. 리의 절친한 친구는 남편 트럭을 빌려주고 위험한 길에 동행이 되어준다. 리가 아버지의 시신을 찾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도 리를 돕는 건 여자들이다. 집과 땅이 경매에 넘어가기 직전 텀프의 아내가 리를 찾아온다. 텀프의 아내는 아버지 시신이 있는 곳으로 리를 데려가고 리가 아버지 죽음을 증명할 수 있도록 시신의 손목을 잘라준다. 이토록 중요한 순간 리를 도와주기 위해 여자가 나선 것은 무슨 의미일까? 마을 남자들은 룰을 어긴 리의 아버지에게 합당한 형벌을 내렸다. 리의 아버지 시신을 공식적으로 돌려줄 수는 없는 건 국가의 법을 위반하는 위험한 일이며 이미 집행한 공동체의 룰을 번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텀프 아내의 행동을 통해 룰의 예외조항을 집행하는 일은 남자가 아닌 여자들의 몫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남녀의 위계를 따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강고하고 단순한 룰의 균열 지점을 여성이 메우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절제된 이 영화에서 감정이 가장 고조되는 부분은 리가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고 손목을 자르는 장면이다. 차가운 겨울 호수에 손을 넣어 가라앉은 아버지 시신을 끄집어 올리거나, 죽은 아버지 손목이 전기톱에 잘려나가는 걸 보는 참혹함을 견디며 아마도 리는 동생을 타이르기 위해 했던 “겁나는 일도 해야만 한다”는 말을 되새겼을 거다. 이토록 끔찍한 장면이지만 영화에서는 생각만큼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람쥐 가죽을 벗겨 고기를 먹어야 할 정도로 절박한 리의 현실을 알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리가 잡고 있던 아버지의 손목이 잘리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아버지의 부재로 잠시 가장 역할을 했지만 여전히 제섭 돌리의 딸로서 존재했던 리 돌리에게서 아버지가 거세되는 순간이다. 리 돌리가 진짜 가장이 되는 순간이며, 배신자인 제섭 돌리라는 짐을 벗어던지는 순간이고, 마을의 비밀에 동참하여 진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순간이다. 이로 인해 리는 마을과 화해하고 법적인 압박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집과 땅도 지키고 보석금 일부도 돌려받았으니 해피엔딩이랄 수도 있다. 큰아버지가 리의 동생들에게 병아리 두 마리를 가져다주는 마지막 장면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훈훈한 인정마저 느끼게 된다. 그런데 마음이 찜찜하다. 리가 귀속되어 살아야 할 이 공동체를 어떻게 볼 것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마을의 룰은 국가 입장에서는 불법이거나 범법이지만 척박한 땅에서 생존하기 위한 그들만의 논리이기에 함부로 재단하기 힘든 면이 있다. 미국인에게도 낯선 이 마을은 현실적인 공간이라기보다 차라리 신화적인 공간이다.

생존의 해법을 찾아

본래 미스터리는 진실을 밝히는 이야기다. 미스터리의 전형적인 서사구조는 범죄가 발생하고 사건을 조사하고 범인을 찾는 것이다. <윈터스 본>은 형식적으로 이런 구조를 갖추고 있는 듯 보이나 이것은 영화를 밀고 가는 동력원일 뿐이다. 미스터리 구조는 사실상 맥거핀(MacGuffin)인데도 미스터리 장르의 효과가 끝까지 지속되는 점이 이 영화가 낯설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다. <윈터스 본>은 실존하는 아버지의 행방이 아니라 부재의 증거를 찾아다니는 이야기며 범인을 잡는 게 목적이 아니라 생존의 해법을 푸는 게 목표다. 주제로 보면 오히려 웨스턴과 닮아 있다. 국가의 법과 마을의 룰이라는 두 종류의 법칙이 맞부딪히는 지점에 선 한 소녀가 생존을 위해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라고 이 영화를 읽자면 그렇다. 지역의 생리로 보아 리 돌리는 마을 공동체에 편입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이 영화를 공동체에 융화되는 개인의 입사담(入社談)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현경
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강의하고 글을 쓴다. 인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해서 심리학, 문학, 영화를 두루 기웃거리다 현재 영화에 안착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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