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야심찬 여왕, 그 위험한 불꽃, <디 아워스>의 니콜 키드먼
2002-01-02
글 : 김혜리

카바레 물랭루주를 엑스터시로 출렁이게 한 오펜바흐의 <천국과 지옥> 서곡은, 니콜 키드먼(35)의 2001년 주제곡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10년을 동반한 톰 크루즈와의 결별, 소송과 유산(流産)으로 어질러진 그녀의 거실은 지옥이었지만, <디 아더스>와 <물랑루즈>로 이어진 은막의 삶은 한없이 천국에 가까웠다. 11살 때부터 텅 빈 극장의 연기 연습으로 고독과 열등감을 해소해온 니콜 키드먼에게, 상상을 통해 더 강인한 존재로 거듭나는 일은 익숙한 치유법이었으리라. 무거운 커튼으로 잿빛 정적을 가둔 실내를 맥베스 부인처럼 거니는 <디 아더스>의 그레이스와 100만 와트의 빛을 스스로 발하는 <물랑루즈>의 새틴. 두 여자 사이에 놓인 깊은 간극을, 본인의 표현대로 “10년만에 마음놓고 하이힐을 신을 수 있게”된 니콜 키드먼은 사뿐히 건너뛰었다.

한 사람의 스타를 십수년쯤 보고 있자면, 그를 둘러싼 웅성거림 가운데 어떤 말은 바람과 비에 깎여 사라지고, 어떤 말은 완고하게 남는다. 니콜 키드먼에 관해 점점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면 가톨릭인 그녀가 일에 관해서만큼은 독실한 청교도라는 점이다. 해리 포터의 깍쟁이 친구 헤르미온느처럼 친구들의 대사까지 모조리 외워버리는 야무진 꼬마 배우로 경력을 시작한 키드먼은, 요즘도 신작에 들어갈 때마다 개강을 앞둔 여학생처럼 독서 목록을 만든다. 키드먼의 엄격한 절제- 혹은 탐욕- 는 때로 자학의 수위를 넘나든다. 촬영 내내 아예 코르셋을 조이고 생활하다 탈진한 <여인의 초상>, 무릎 연골을 너덜너덜하게 만든 <물랑루즈>, 불면증의 고통을 자처한 <디 아더스>의 무용담은 다 같은 속내를 지닌 일화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최고로 못생긴 여자애”를 보았던 빨강머리 꺽다리 소녀의 초조함으로 여지껏 자신을 채찍질하는 키드먼이지만, 할리우드가 지금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여왕’의 역할인 것처럼 보인다. 세상을 굽어보는 신장과 스포트라이트를 위해 빚어진 듯한 육체, 거기에 ‘격조 높은’ 불행의 향기까지.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클래식 스타들이 두르고 다니던 빛이 난다. 그리고 그건 할리우드가 영원히 목말라하는 광채다.

그러나 니콜 키드먼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아름다운 여왕이기보다 강한 보스가 되는 편을 택할 야심가다. 하물며 <디 아더스>의 저택만큼이나 많은 방을 가진 배우혼을 막 탐험하기 시작한 지금에야. 자신이 품은 불꽃의 열기와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니콜 키드먼은, 새 하인을 맞은 엄격한 안주인 그레이스가 그랬듯, 스스로를 차갑게 타이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먼저 열었던 하나의 문을 완전히 닫기 전에는 또다른 문을 열지 말라고.

<디 아더스>는 관객에게 공포와 충격을 주는 영화다. 객석의 반응을 즐겼나?

그처럼 극적인 반응은 처음이었다. 나 역시 배우로서나 관객으로서나 심리 스릴러를 즐긴다. 단순히 유혈을 보여주기보다는 관객을 뒤흔들어놓는 게 좋다.

그레이스는 복잡한 캐릭터다. 강한 사랑을 품고 있으나 표현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1945년이라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겠다. 그녀의 아이들이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환자라는 사실도 무관하지 않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레이스의 애정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박적인 사랑으로 변질된다. 또다른 이유는 남편이 떠난 것, 아니 그녀를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레이스가 되기 위해 어떻게 준비했나.

그녀를 진정 느끼고 이해하기 위해서, 그녀가 되기 위해서 내 자신을 그레이스의 구두 속으로 밀어넣어야 했다. 내가 했던 일 중 하나는 자신으로부터 잠을 빼앗는 것이었다. 영화 제작기간 내내 매일 4시간 이하로 잠을 줄인 덕분에 심리상태가 매우 예민하고 약해졌다. 마치 그레이스처럼.

감독으로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에 대해 말해달라.

아메나바르는 정말 예측불허다. 그는 우리의 피부 밑으로 기어들어와 휘저어놓는다. 그것은 쇼크 이상이다. 아메나바르의 전작 <오픈 유어 아이즈>는 ‘모던한’ 스릴러였고 <디 아더스>는 ‘클래식’ 스릴러다. 그는 <디 아더스>를 약간은 동화적인 말머리로 시작한다. 그리고는 꽝! 이 영화의 처음은 종말의 서두라 할 만하다. 대단하다.

가족에 대해 말해달라

나는 부모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대의 공포는 두분을 잃는 일이다. 두분은 내게 언제나 “그만하면 충분하다…. 이제 집에 좀 와라”라고 말씀하신다. 부모님은 내가 땅에 발을 붙일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힘이다.

여가를 어떻게 보내나.

나는 면허를 따기 위해 헬리콥터 조종을 연습해왔다. 비행의 센세이션을 사랑한다. 모든 컨트롤을 벗어난 듯하고 꿈을 꾸는 것과도 비슷하다. (웃음) 나는 몽상가인데다 가능할 때마다 잠자는 것도 좋아한다. 그러나 일없이 백사장에 앉아서 시간 보내는 것은 싫다.

차기 프로젝트는.

알려졌듯이 라스 폰 트리에의 새 영화 <도그빌>에 출연한다. 그와 일할 수 있다니, 흥분된다. 심오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유희를 벌이고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그의 방식을 좋아한다. <도그빌>은 세트에서 인공광으로 조명을 밝히며 ‘안티 도그마’ 스타일로 촬영할 예정이다. 제인 캠피온과도 계속 신작을 협의중이다. 아마도 에밀리 디킨슨이나 제인 오스틴의 원작을 각색한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바는 없다. 그 프로젝트에서는 내 구실은 제작자다. 출연도 할 수 있지만 여부는 전적으로 작품을 위한 최선이 무엇이냐에 달렸다.

(이상 인터뷰는 수입사 미로비전을 통해 2001년 9월6일 마드리드에서 진행된 <디 아더스> 정켓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진 제공 미로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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