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1일
영화가 아니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했다. 협곡에서 실족해 바위에 팔이 끼는 바람에 닷새 동안 극한상황에 고립된 남자를 1시간 반 동안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트레인스포팅>과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이미 입증한 바대로 대니 보일은 폭력적이고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소재를 활기찬 형식으로 찍어내는 틈새시장(?)을 점령한 듯하다. <127시간>의 가장 큰 충격은 짐작과 달리 사고의 끔찍함도, 옴짝달싹도 못하는 단 한명의 인물을 놓고 장편을 찍는 영화적 곡예도 아니었다.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든 것은 주인공 아론 랠스턴이 보여준 가공할 만한 낙천성과 합리성이었다. 누구나 언급하는 스스로 팔 자르기 장면에는 역시 신음이 새어나왔지만, 정작 내가 멍해진 순간은 최초의 패닉이 지나간 직후 아론이 자기 팔을 뭉갠 바위 위에 소지품들을 하나씩 늘어놓고 그들을 조합해 살아날 방도를 궁리하는 장면이었다. 물론 엔지니어이자 응급구조대 자원봉사자 경험이 있는 이 청년을 일반적 조난자로 여길 수야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아론이 “살아야 한다”는 지상 명령 앞에서 취하는 극히 논리적인 일련의 행위는 무시무시했다. 발 디딜 단단한 바닥조차 갖지 못한 상황에서 그는 나름의 일과를 만들어간다. 아침마다 햇빛으로 샤워를 한다고 상상하고, 매일 오전 8시17분에 날아오는 까마귀를 기다린다. 필요한 물건의 목록- 도르래와 20m의 로프, 동력드릴과 여덟명의 장정- 을 머릿속에 적어본다. 심지어는 살아남아 토크쇼에 초대된 가상 상황을 캠코더에 녹화하며 킬킬거린다. 인간은, 지독하다. 이러한 기막힘이야말로 실화에 토대를 둔 영화가 누리는 프리미엄이 아닐까. 유사한 상황을 픽션으로 그린 생매장 스릴러 <베리드>의 경우, 주인공에게 연쇄적으로 닥치는 상황은 심리적 긴장을 조였다 푸는 기승전결의 그래프에 종속되었다.
<127시간>의 영향력 아래 위기탈출 매뉴얼을 숙지하겠다고 결심한 귀 얇은 나. 도서관 컴퓨터에 ‘생존’과 ‘서바이벌’을 키워드로 입력했다. 검색된 책들을 서가에서 찾아보니, 어라, 그중 다수가 생존이 아니라 성공에 관한 책이다. 30대에 집 장만하는 법, 직장에서 승진하는 법, 남부럽지 않은 이성 친구 사귀는 법. 그러니까 지금 나는 성공이 곧 생존인, 실패는 곧 소멸을 의미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뜻일까?
2월12일
<블랙 스완>은 공연예술가인 주인공을 통해 완벽주의의 치명성을 보여준다. 사실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에게 완전성을 추구하는 인간은 거듭되는 주제다. 감독의 전작 <파이>는 수학을 빌려 온 우주를 끌어안는 언어를 찾아내려는 자의 이야기였고 <천년을 흐르는 사랑>의 주인공은 시공간을 점령하기를 원했다. <블랙 스완>의 니나(내털리 포트먼)는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와 흑조의 연기를 공히 최고도로 완성하기를 열망한다. 그로써 못다 이룬 꿈을 투사하는 엄마를 만족시키고, 발레단 예술감독의 호감을 지키고, 본인과 전혀 다른 자질을 가진 우상과 라이벌을 흡수해 완전체 발레리나가 되려 한다. 하지만 이상하다. 자아의 통합성을 유지하는 한 백조와 흑조 중 어느 한쪽을 완벽하게 연기한다면 다른 한쪽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 아닐까? 술집에서 어울리게 된 낯선 청년은 니나에게 묻는다. “당신이 누군지 아직 말 안 해줬어요.” “난 댄서예요.” “아니, 당신 이름 말이에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니나는 즉각 자신의 이름을 답으로 떠올리지 않는다. 끝없는 결핍감의 원천이 여기에 있다. 급기야 상상의 자아를 완결시키기 위해 나를 파괴하는 사태가 온다. 실제로 죽지는 않으면서 죽음에 한없이 가까이 날아가는 행위. 이는 ‘작은 죽음’이라 불리는 섹스만큼 에로틱하다. 요컨대 <블랙 스완>은 임사(臨死)체험의 공포와 쾌감에 관한 영화다.
완벽주의는 일반인 사이에서는 특정한 심리 증세로 간주되지만 예술가에게는 직업적 일상이다. 잠깐.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래야만 참된 예술을 할 수 있을까? 비단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노력과 구매력에 따라 얼마든지 생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환상은 만연해 있다. 자연을 포함해 인간에게 부여된 조건을 뜻대로 가공하는 테크놀로지는 전능해 보이고, 자본주의 시장의 큰 몫은 우리가 품은 육체에 대한 불만족을 상품의 수요로 전환해 굴러간다. 아름다운 몸, 성적 만족, 직업적 성취, 심지어 이상적 인간관계까지 당신이 충분히 근면하고 성실하면 가질 수 있다는 속삭임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불행은 자연스러운 사태가 아니라 나의 불찰이 돼버린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찰나의 느낌에 ‘불과한’) 행복은 과대평가되고, 목표를 달성 못한 사람들은 매우 간단히 좌절이나 절망이란 단어를 입에 올린다. 그러나 비탄은 멜랑콜리와 구별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인간은 결핍이라는 이름으로 뚫린 공동(空洞)의 가장자리를 어루만지며 즐길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닌가? 멜랑콜리아(melancholia)가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동력이 됐는지 우리는 잊고 있다.
<블랙 스완>의 앙상하게 마르고 손발에 못이 박인 내털리 포트먼의 연기에는 확실히 영웅적인 구석이 있다. 그녀는 어쩌면 연기가 삶을 잠식해버린 <색, 계>의 왕치아즈(탕웨이)와 비슷한 체험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레옹>과 <뷰티풀 걸스>의 요정은 어느새 가운데가 뻥 뚫린 나이 든 여자의 눈매까지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시사회가 끝나고 나오는데 뒷줄에 앉은 관객이 소감을 나눈다. “<오만과 편견>(키라 나이틀리가 엘리자베스 베넷으로 분했다)에서도 잘하더니, 저 배우 연기 좋지 않니?” 아무튼 조지 루카스 감독님, 새삼스런 칭찬입니다만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의 아미달라 여왕(내털리 포트먼)과 대역 시녀 사베(키라 나이틀리)의 캐스팅은 적절했군요.
2월14일
올해 나의 밸런타인 영화는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단편 <나 여기 있어요>(I’m Here). 연결할 대상이라곤 충전기밖에 없었던 로봇 쉘든이 어느 날 사랑을 만난다. 다친 연인에게 부속을 나눠줄 수 있어서 그는 행복해진다.
밸런타인데이의 화사하게 북적이는 신촌 지하철역. 데이트를 마치고 작별 중인 어린 연인 뒤를 우연히 걷게 되었다. 일부러 들으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한껏 성숙하게 차려입은 아가씨는 입학을 앞둔 대학 신입생이고, 손에 초콜릿 상자를 받아든 남자는 재수생활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소년은 나와 동시에 시내 방향 2호선 개찰구를 통과했고 소녀는 저편에 남았다. 막 플랫폼으로 내려가려는 소년을 불러 세운 소녀가 칸막이 너머로 윗몸을 기울여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총총히 돌아섰다. 소년은 아무 말도 못했다. 기차를 기다리는 2분 동안 나는 혼자 남은 소년의 뒤쪽에 서서 그의 귓불에 떠올라 사라지지 않는 어여쁜 홍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이런 순간들을 보기 위해 자꾸만 영화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2월17일
원고마감이 늦었다. 몸에 익은 갈등의 시간. 편집기자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게 나을까. 독촉을 받은 다음 변명하는 쪽이 나을까. 제 발이 저리다 못해 쑤신다. 용케 침묵하고 있는 휴대폰을 곁눈질하며 자판을 두들기는데 기어코 울리는 문자 메시지 알람. 허둥지둥 “곧 갑니다!”라고 답문을 날리고, 아차 싶어 확인해 보니 “★정품★후불제★ 약국납품용! 비아그라 판매(사은품 증정)”란다. 판매자도 당황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