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하건대 <파수꾼>은 당신이 올해 만나게 될 한국영화 중 베스트 리스트에 오르고야 말 것이다. 서로를 잘 알기에 그만큼 서로에게 잔인해질 수 있었던 세 소년이 돌이킬 수 없을 지경까지 부서져간다. 보는 내내 눈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세명의 주인공인 기태, 동윤, 희준을 연기한 배우 이제훈, 서준영, 박정민을 만났다.
소년의 옷을 입기까지
이제훈_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에서 옐로카멜레온상을 받은 단편 <겨울이 온다>에서 내가 고등학생으로 출연한 걸 보셨다며, 기태 역 리딩을 시켜보셨고 결국 기태를 연기하게 됐다.
박정민_내가 출연한 단편 <세상의 끝>을 보고 희준이와 이미지가 잘 맞는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는 다른 배우들보다 좀 늦게 캐스팅됐는데, 리딩한 다음 ‘내가 잘못 봤구나’ 싶었던지 엄청난 훈련을 시키셨다. (웃음)
서준영_난 작품에 들어가면 완전히 푹 빠지는 스타일이다. 장건재 감독님의 <회오리바람>을 찍으면서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많이 찌질하게 살았다. (웃음) 이번에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고, 동윤이가 친구들 사이를 두루두루 오가며 조율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동윤 역을 하고 싶었다.
이제훈_이거 분명 재밌긴 한데, 세세한 부분에 들어가면 이 대사 위주의 텍스트를 내가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어렵고 자신없었다. 다같이 모여 리딩을 시작할 때도 다른 친구들은 캐릭터에 대한 이해나 표현이 매끄러웠는데, 나에 대해선 감독님이 계속 갸우뚱했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기태의 어떤 특징적인 모습이 있는데, 내가 그 방향을 잡지 못하거나 너무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주니까 감독님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동료 배우 중에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아서 우물쭈물 힘들어하는 게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지만 그땐 그게 문제도 아니었다. 여기서 해결하지 못하면 촬영 들어갔을 때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니까 어떻게든 정면돌파를 해야 했다. 감독님과 동료들에게 끊임없이 조언을 구했다.
박정민_오디션에 처음 갔을 때 감독님께서 “네가 하고 싶은 역이 뭐냐”라고 물어보셨는데, “동윤이가 참 멋있어요. 하지만 전 희준이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웃음) 학창 생활을 돌이켜봤을 때 난 분명 기태나 동윤이와는 좀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단편 작업할 때도 계속 희준 비슷한 역을 많이 했다. 하지만 희준 대사를 읽으면서도 기태와 동윤이가 멋있으니까 상대적으로 희준이가 너무 짜증나고 싫었다. (일동 웃음)
이제훈_기태 역은 감독님이 고등학생 때 알던 친구가 모델이라고 들었다. 그 동네에서 가장 유명하고 싸움도 잘하는 친구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인상 자체는 흐릿한데 눈빛은 확실히 기억난다고 하셨다. 고등학생이라고 믿을 수 없는 살기를 느꼈다고. 그리고 감독님이 기태 연기를 가끔 직접 해 보이셨는데, 그때 어떤 포인트 요소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상대방 말을 말없이 듣다가 툭 내뱉는 그런 것들. 이를테면 “X발”이라는 단어를 내뱉더라도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그 욕의 뉘앙스를 표현하길 바라셨다. 그게 뭘까, 그 뉘앙스를 찾는 게 고난의 시간이었다. 감독님의 디렉션이 너무 어려웠지만,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결국 극복할 수 있었기에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찍고 있는 장훈 감독님의 <고지전>에서도 그때의 경험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서준영_감독님이 <파수꾼> 전체의 룩에 대해서 <로제타>나 <밸라스트> 같은 영화를 얘기하셨고, 감독님 집에 다같이 모여서 봤다. 정말 훌륭했다.
박정민_감독님이 원하는 연기랑 비슷하다고 추천해주셔서 옴니버스영화 <티켓>도 봤다. 셀틱 유니폼 입고 카메라 앞에서 노는 배우들을 보니 어떤 연기인지 알 것 같았다.
이제훈_참고용은 아니지만, 감독님이 좋아하는 영화라고 해서 같이 본 건 <엘리펀트>.
대본과 애드리브 사이
박정민_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기본적인 말투는 다 잡고 갔다. 윤성현 감독님은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테이크를 가장 선호하는 편이다. 우리에게 특정한 말투를 원하는 게 아니라 초반 테이크 때 튀어나오는 생동감을 살리고 싶어 하셨다.
이제훈_경험하지 않은 무언가를 원하셨다. 가끔 테이크를 여러 번 가더라도 세밀한 대사는 신경쓰지 말고 그냥 말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도 하셨다. 예를 들어 기태가 희준에게 “보경이의 눈을 쳐다보다가 걔가 마주 쳐다보면 얼른 얼굴을 돌려라”라고 조언하는 장면은 애드리브였다. 원래 대사보다 그 애드리브를 더 마음에 들어하셔서 그 장면을 쓰게 됐다. 기태가 동윤에게 세정이의 과거를 얘기하는 장면에서도, 원래는 대사와 리액션의 정확한 틀이 있었다. 그런데 대사가 많았고, 모든 대사를 정확하게 외우고 인지한 상태에서 촬영하면 너무 만들어진, 예상 가능한 장면이 될 위험이 컸다. 그래서 테이크가 거듭될수록 어물쩍 다른 대사를 만들어 연기했다. 개인적으론 기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다소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는데, 감독님께선 그 애매모호한 걸 더 마음에 들어하셨다. 그런 의외성이야말로 우리가 같이 만들면서 발견할 수 있는 영화적인 순간이었던 것 같다.
박정민_재호가 꽃집에서 일한다고 수다 떠는 장면도 애드리브였다. 지문에선 그냥 ‘애들이 떠들고 있다’였는데, 반 친구들을 연기한 배우들이 너무 잘해주니까 난 그냥 사이사이 툭툭 끼어들기만 하면 됐다. 이걸 어떻게 받아야지 하고 계획하는 순간 그 안에서 깨져버리는 것 같다.
서준영_첫 촬영날, 제훈이 형의 집중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아, 이 형하고 할 때는 오히려 내가 준비를 해오면 안되겠다 싶었다. 내일 촬영장면이 뭔지 확인하고 시나리오를 읽은 다음, 굳이 촬영장까지 들고 오지 않았다. 대사가 입에 익어버리면 너무 외운 대사의 티가 날까봐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리딩 연습도 많이 하지 않았다. 다 놓고 갔고, 상대방이 주는 대로 받았다.
우리들의 클라이막스
박정민_기태 아버지와 만나는 장면이 가장 아쉽다. 프리 프로덕션 때부터 가장 부담을 느낀 장면이었다. 희준이가 왜 거짓말을 할까, 진실을 말해도 피해볼 게 없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했고 어떤 답이 나오긴 했는데, 내 안에서 그걸 완전히 습득을 못한 거다. 그런 상황에서 대사를 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서준영_그래서 더 좋지 않았을까? 어색해서.
박정민_확신이 들지 않는 장면에선 목소리가 작아진다. 촬영할 때 사운드 기사님이 유일하게 “목소리 크게 내라”라고 주문한 것도 그 장면이었다.
서준영_동윤이가 기태 아버지 만나는 장면은 밤새 찍었다. 동윤이가 울고 기태 아버지에게 맞는 장면도 있었다. 그런데 완성본에선 다 잘렸더라. 감독님께서 격정적인 부분은 다 들어냈다고 하셨다. 혼신을 다한 장면이 없어지니까 이래서 영화가 무섭구나 싶다. (일동 웃음)
이제훈_사실 기태도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장면을 찍었는데, 그것도 편집됐다.
박정민_그 장면 참 좋았는데. 예쁘고 몽롱했다. 보경이 문제로 기태와 희준이 주스 마시면서 얘기하는 장면은 거의 새벽이 다 되어 찍었고, 체력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 부탁으로 테이크를 많이 갔다. “도둑이 제 발 저린가 보지”라는 대사를 제대로 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제훈_영화상에서 내 목소리가 가장 작은 장면인 것 같다. 희준이가 기태에게 처음으로 낯선 모습을 보여주니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당황하는 리액션인데, 목소리가 자꾸 기어들어갔다. 그때도 사운드 기사님이 그 작은 목소리에서 숨쉬는 뉘앙스라든가 성대를 끄는 느낌 같은 걸 잘 잡아주셨던 것 같다. 중요한 장면들이라고 해서 윤성현 감독님이 유달리 디렉션을 크게 주시진 않았다. 이 장면 전에는 어떤 상황이었지, 정도의 인식만 강조하셨다. 이 장면 이후의 상황은 절대 생각하지 말고 움직이라고 하셨다.
박정민_복도에서 기태한테 처음으로 맞는 장면을 찍을 때, 한대 맞고 울었다. (웃음) 제훈이 형이 애드리브로 내 머리를 잡고 흔들면서 욕을 하는데 그 순간 치고 올라오는 희준의 감정이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서준영_또 다른 친구 재호 역을 연기한 배제기군한테 참 많이 맞았다. 얘가 그런 준비를 너무 많이 해오는 편인데, 감독님은 옆에서 “이왕 때릴 거 제대로 때려” 하고 부추기고. (웃음) 이 장면도 영화에는 안 나오는데, 동윤이가 기태한테 맞은 다음 집으로 돌아오다가 재호 패거리한테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는 장면이 있다. 보호대를 착용했는데 그 보호대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만 골라가면서 때려서 NG나고. 또 제기 본인은 자기 몸을 소중하게 생각해서 자기가 맞을 땐 보호대를 완전 많이 차고 온다. (일동 웃음)
영화에서 흘린 눈물
박정민_결국은 이 모든 일이 희준이 때문에… 나 때문에…. 시나리오 처음 볼 때부터 얜 참… 싶었는데. (웃음)
서준영_아니 나 때문에….
이제훈_아니 나 때문에…. (웃음)
박정민_시나리오 읽으면서 이게 누구의 잘못일까 생각은 했는데 답을 못 내렸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니 셋 모두의 미성숙함이 문제였던 것 같다. 모두가 조금만 양보하면 됐는데 그게 안되니까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다.
서준영_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청소년이 죽으면 언론에 딱 한줄, ‘성적 비관 자살’이라고 나오는 게 너무 싫다고. 영화를 찍을 땐 몰랐는데, 얼마 전에 성적 비관과 왕따문제로 고민하던 여고생이 자살했다는 ‘한줄짜리’ 기사를 보고, 감독님 얘기가 생각났다. 이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흘러가네. 우리 영화에서처럼, 그 학생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을 텐데.
이제훈_어떤 관객이 그러더라. 기태가 선택하는 결말이 너무 과하지 않냐고. 하지만 동윤과 희준이야말로 기태에겐 전부였고, 그 친구들과 막혀버렸을 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곳이 없었던 거다. 편집된 장면 중에 기태가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학교 잘 다녀왔니?” “예, 식사하셨어요?” “난 먹었다.” “전 좀 늦게 와서 아직 안 먹었어요.” 이게 사실, 대화가 아니다. 그 안에 아무런 알맹이가 없다. 기태와 아버지의 관계는 그런 거였다.
박정민_촬영감독님이 배우들이 편하게 연기할 수 있게 배려해주셔서, 카메라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낄 정도였다. 이렇게 움직이지 말아라, 라는 지시가 한번도 없었다. 정말 감사드린다.
서준영_TV 브라운관에 타이트하게 잡힐 때는 온갖 감정을 구구절절 설명해줘야 한다. 그러다가 <회오리바람>을 찍을 때 그 연기를 나도 모르게 되풀이했던 것 같다. 장건재 감독님이 “지금 네 연기에서 1초도 쓸 게 없다”라고 호되게 나무라셨다. 많이 섭섭했는데, <파수꾼>을 찍으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영화 스크린은 정말 크다. 이만큼만 보여줘도, 거기에 모든 감정이 다 실릴 수 있다.
이제훈_아직까진 오히려 클로즈업이 좋다. 어떤 감정만 갖고 있으면 클로즈업을 통해 그게 다 드러나는 것 같다. 오케이 사인 나고 모니터를 보면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 보인다. 오히려 카메라가 멀어질수록 똑같은 장면이라도 클로즈업보다 표현해야 하는 게 더 크니까 어렵다.
서준영_그리고 마지막 대사. 음악이랑 겹치면서 그게 잘 안 들릴 수 있다. “친구야”다. 그 말은 원래 대본엔 없었다. “그래, 네가 최고다”까지만 있었는데, 촬영할 때 뭔가 그것만으론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말을 덧붙였다. 오케이 사인이 났는데 그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제훈이 형이 앞에서 원맨쇼를 하는 걸 쳐다보다가, 형 눈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 없는 사람이 거기 서서 날 보는 거니까. 음…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친구가 있다. 그때 그 친구 생각이 났다. 내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니까 감독님도 놀라셨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