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세계를 세 등급으로 나눴다. 그에게 최상의 실재는 역시 이데아의 세계였다. 이 세계가 현실의 모범이고, 우리가 사는 현실의 모든 것은 이 원본의 (다소 불완전한) 복제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엔 원본의 복제만이 있는 게 아니다. 이 복제를 다시 복제한 놈들도 있다. 이렇게 ‘원본의 복제’들 틈에 슬쩍 끼어서 마치 진짜 복제인 양 행세하는 가짜 복제, 즉 ‘복제의 복제’를 ‘시뮬라크르’라 부른다. 어감에서 이미 느껴지듯이 그 말은 ‘사이비’, 즉 진짜 비슷해 보이는 가짜란 뜻이다.
시뮬라크르의 척결
이데아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에, 진짜와 가짜를 구별한다 함은 곧 참된 복제(‘원본의 복제’) 중에서 가짜 복제(‘복제의 복제’)를 솎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당시 예술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시각적 트릭을 예로 든다. 가령 그리스의 조각가들은 신상을 제작할 때 머리를 실제 인체비례보다 좀더 크게 만들곤 했다. 그래야 아래서 올려다볼 때 비례에 맞아 ‘보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를 비판한다. 그것은 비례에 맞아 ‘보일’ 뿐 실제론 비례에 어긋난다는 것. 한마디로 그것은 가짜 복제, 즉 시뮬라크르라는 얘기다.
플라톤은 이 관념을 정치학에 적용시킨다. 참된 정치인은 그래도 이데아(=이상적 정치인 혹은 정치인의 이상)를 좀 닮았다. 반면 가짜 정치인은 이데아를 닮은 것처럼 보일 뿐 이데아와 아무 관계도 없다. 이런 자들을 솎아내는 게 바로 플라톤의 과제. 그의 <대화편>에는 그가 그런 가짜로 생각했을 법한 인물들이 나온다. 가령 ‘고르기아스’는 그저 말을 잘한다는 이유에서 자기가 정치가로 선출될 거라 자랑하고, 시인 ‘이온’은 자기가 서사시의 전투장면을 완벽히 음송하므로 자신을 장군으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자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짜 철학자란 당시의 맥락에서 소피스트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마치 지혜를 사랑하는 자처럼 행세하나 실은 교묘한 궤변으로 대중의 주머니나 터는 사기꾼일 뿐이다. 그럼 진짜 철학자란? 아마도 소크라테스 혹은 그의 인형 뒤에서 말하는 복화술사(=플라톤)를 가리킬 거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소피스트’라는 말은 아예 사이비 철학자를 가리키는 경멸어가 된다. 오늘날엔 교묘한 현학적 궤변을 늘어놓는 것을 흔히 ‘소피스트리’(sophistry)라 부른다.
수천년 묵은 이 낡은 사고방식에 균열을 낸 것은 발터 베냐민. 그 유명한 논문에서 그는 복제의 존재 자체가 원본의 개념을 위협하는 경향을 띤다고 지적한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은 아마도 그런 경향의 극단적 시나리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복제는 먼저 원본에서 떨어져 나와 자립하고, 이어서 사라진 실재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다. 들뢰즈는 <플라톤과 시뮬라크르>라는 텍스트에서 시뮬라크르의 존재가 어떻게 플라톤주의 자체를 해체시키는지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플라톤의 문제는, 원본의 속성을 실제로 가진 ‘복제’와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시뮬라크르’를 구별하는 것. 하지만 그게 과연 가능할까? 가령 정치인들은 저마다 ‘자기가 진짜이고 타인은 가짜’라 믿는다. 어느 놈이 진짜이고, 어느 놈이 가짜인지 가려줄 객관적 기준은 없을지도 모른다. 플라톤이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은 ‘그것이 이데아의 속성을 함유하느냐’ 여부였다. 따라서 정치인의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객관적 기준이 없다는 얘기는, 곧 이데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 여기서 플라톤주의는 붕괴한다.
좌파 위장척사운동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인이 정치인의 이데아를 닮은 진짜라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당시 대다수의 그리스인들은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야말로 진짜 철인이며 소피스트들은 사이비라 믿었을 거다. 하지만 그의 동시대인인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유명한 희곡 <새>에서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의 대표로 제시한 바 있다. 만약에 진짜 철인과 가짜 철인을 가르는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철학자의 이데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이로써 플라톤주의는 무너진다.
플라톤이 위대한 것은 그의 생각이 꼭 옳아서가 아니리라. 틀린 생각이라도 그 영향력은 심원하고 영원할 수 있다. 그리하여 21세기에도 이 플라톤주의의 복고 취향이 존재한다. 가령 우리 사회엔 ‘좌파’에 등급을 매기는 이가 있다. A급 좌파는 모든 이들이 마땅히 닮아야 할 좌파의 모범상(이데아). 하지만 플라톤의 이데아가 그러했듯이 A급 좌파 역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념상일 뿐이다. 혹은 플라톤에게 이상적 정치인이 아득한 황금시대에나 존재했듯이, A급 좌파는 아마도 저 멀리 혁명기에나 존재하지 않을까?
원본의 복제와 복제의 복제, 즉 참된 복제와 시뮬라크르를 구별하는 게 플라톤의 문제였듯이, 여기서도 문제는 A급을 실제로 닮은 B급 좌파와 이 B급 좌파를 흉내내는 C급을 솎아내는 것이다. C급 좌파는 실은 좌파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시뮬라크르 좌파, 즉 사이비 진보로, 속으로는 좌파가 아니면서 겉으로는 좌파인 척하며 폴리스의 대중을 기만한다. 이 위장 자유주의자들은 ‘좌파’를 참칭하며 실제로는 진보운동 전체를 부르주아에 갖다바치는 진보정치의 해악일 뿐이다. 대강 이런 논리다.
하지만 여기서도 다시 문제는 B급과 C급을 구별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 가령 이제는 구태 정치인의 대명사가 된 이회창도 처음엔 ‘대쪽판사’ 이미지를 가진 원칙주의자로 통했다. 노무현은 어떤가? 한때 그는 정치인의 이데아에 근접한 이로 여겨졌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가령 ‘B급 좌파’에게는 어차피 이명박이나 노무현이나 “그 밥에 그 나물”이 아니던가. 상황이 이러할진대 좌파 위정척사운동은 진보의 B급과 C급을 가르는 데에 이보다 더 객관적 기준을 사용하고 있을까?
전복과 반전
오늘날 “나 혼자 이데아를 독점했다”고 주장하면 비웃음의 대상이 될 거다. 모두가 하나의 진리, 하나의 이데아를 공유한다면 좋겠지만 가치관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사회에서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쟁이를 거짓말쟁이라 부름으로써 거짓말쟁이가 더이상 거짓말쟁이가 아니게 되는’, 혼란한 역설을 허용하는 체제다. 민주주의란 이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제 입장을 상대화하면서도 제 견해를 관철시키려 드는 어떤 평등한 태도의 이름이리라.
이 혼란이 두려웠던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혐오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외려 플라톤이 솎아내려던 소피스트와 더불어 발달했다. 그 혼란이 두려웠던 플라톤은 저 혼자 이데아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정치를 이데아의 속성을 분유한 철인들에게만 맡기려 했던 플라톤의 관념은 오늘날 ‘진보정당에 개나 소나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좌파 철인정치론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진보의 이데아를 독점한 것처럼 구는 이들이 실은 진보의 시뮬라크르, 즉 플라톤 뺨치는 반동으로 드러나는 역설. 흥미로운 반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