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기억하면 다인가
2011-03-10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죽음의 비극성만을 강조하는 <아이들…>
<아이들…>

몇해 전부터 ‘아이들’이라는 단어에서 새싹, 희망 따위의 긍정적인 기의들이 탈락되고 범죄, 빈곤, 폭력과 같은 부정적인 기의들이 본격적으로 접합되기 시작했다. 박찬욱의 영화들이 아동들을 납치, 살해했을 무렵만 해도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범죄였지만, 지금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범죄로 인식된다. 누구나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어왔던 ‘아이들’이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무지막지한 범죄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 믿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무차별적으로 폭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이 더 암담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런 범죄들이 계층에 따라 차등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아주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을 다시 일깨우며 ‘아이들’을 지금, 여기로 소환한다. 분명히 그 ‘아이들’은 지금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어른들에게 해줄 말이 많을 듯한데, 이 영화는 이상한 방식으로 침묵시키고 서둘러 위로하려 한다.

사건 발생 당일이 지역의 기초선거가 있는 날이었다는 사실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자막을 통해 고지되고 이후 영화의 반 이상을 이끌어나가는 황우혁 교수(류승룡)의 이론에서도 중요한 단서로 활용된다. <살인의 추억>을 통해 정치적 상황이 민생 치안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미 학습한 관객에게 그것은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의 한 귀퉁이를 열어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심어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맥거핀’이다. 투표율을 떨어뜨리거나 선거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았으리라는 황 박사의 논리가 오히려 사건을 본래의 실체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몰고 가는 역할을 한다.

진실을 밝히는 ‘촉’과 오류에 도달하는 ‘팩트’

<아이들…>에는 이 사건에 임하는 세 가지의 태도가 제시된다. 첫째는 피해자 아동 부모들의 태도이다. 그들에게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아이들이 살아 있으리라는 믿음과 그 증거로서 수사가 계속되는 것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살인자로 몰리거나 진범을 잡지 못하는 상태가 되더라도 믿음이 지속되는 것이 중요하다. 종호의 부모가 자신의 화장실과 방 구들장이 샅샅이 파헤쳐지는 것도 감수하고 거짓 제보를 흘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두 번째는 강지승 PD(박용우)와 황 박사의 태도로, 사건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그것을 해결함으로써 자신이 얻게 될 명예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세상이 원리원칙대로 그렇게 아름답기만 합니까?’(강지승)라며 의문을 제기하고 ‘여러 가지 이론에 의해서 이 동작을 설명할 수’(황우혁) 있다며 지식과 이성을 빌려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 마지막은 그 둘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으며 증거보다는 ‘촉’이 우선하지만 공권력이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박 형사(성동일)의 태도이다. 그는 강 PD와 황 박사가 생쇼를 벌이고 있을 때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내며 부모들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균형감각의 소유자다.

이 영화가 지지하는 것은 첫 번째와 세 번째 태도이며, 두 번째 태도는 일종의 광기와 허영으로 치부한다. 이를 통해 오로지 선정주의만을 추구하는 ‘황색 저널리즘’과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지식인의 편집증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이 사건이 미제로 남게 된 데에는 사회적 귀책 사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반성적 사고 자체를 무색하게 만든다. 의문을 제기하고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이 피해자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이라는 메시지가 은연중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맥거핀’의 존재는 결과적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해서 가슴을 부여잡고 울거나 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잡히지 않은 범인을 미워하는 감정에만 몰두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적어도 이 영화 안에서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을 밝히거나 시각을 바꾸어 접근하는 것은 공명심과 자기만족일 뿐이기 때문이다.

울고, 증오하고, 안도하라

소년들의 시신이 발견된 뒤 강 PD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취재를 시작한다. 이때 취재는 사회에 고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죄책감을 치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다. 그는 여전히 두 번째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황우혁에게 원색적인 욕설을 퍼붓고, 혼자 법의학자와 박 형사를 찾아가 용의자의 실루엣을 알아낸다. 하지만 그가 범인의 집을 방문한 이후부터 자신의 딸을 잃어버렸다 되찾고 범인을 추격하는 일련의 시퀀스들에는 현실감이 부재한다. 20년 전 살인사건의 용의자라고 하기에 화면 속 배우의 마스크는 너무 젊고, 시신 발굴 현장 취재에서 중년이 되었던 강 PD 역시 여기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모습으로 회춘한다. 증거라고는 일자매듭과 소 잡을 때 쓰는 ‘정’뿐인데, 그것을 통해 용의자를 범인이라고 확정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급작스럽게 등장한 범인과 추적과 유괴 위협 그리고 추격신과 격투장면들은 현실과 분리된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시퀀스들은 원인불명으로 지하에 누워 있을 아이들의 영혼을 위무하기 위해 마련된 소란스러운 지노귀굿처럼 보인다.

살아 있어야 할 아이들은 시체로 돌아왔고, 아들을 기다리던 착한 아비 역시 죽었다. 슬픔과 분노를 투사해야 할 대상으로 급조된 용의자는 성급하게 범인의 자리에 세워진다. 소를 잡는 데 전통적 방식인 정을 쓰는 ‘폭력성’(?)이 결정적 근거로 제시되며, 그는 ‘이제 살인의 맛을 알아가는’ 사이코패스로 분류된다. 언젠가부터 ‘사이코패스’는 한국영화에서 이유없는 살인과 폭력을 스크린 위에 전시하고 그 정당성을 일시에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아이들…>이 시각적 선정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를 활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죽음 혹은 이후의 사인 규명 실패와 졸속 수사 등에 대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 함구하기 위해 사이코패스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유전적 돌연변이 같은 이 범죄자 유형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분노하고 경악할 것만을 요구할 뿐 보는 이의 윤리의식을 자극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극악무도한 범죄를 활용해 갈등을 유발하면서도 그 갈등에 어떤 사회적 함의가 포함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아주 편리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좌천되어 내려온 강지승에게 후배가 내뱉는 ‘아~들이(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기까지는 현재진행형이지요’일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 ‘아이들’의 죽음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애석함과 어딘가 살아 있을 범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이미 만료된 것에 대한 원망과 그 ‘아이들’이 잊혀지지 않고 다시 애도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그 대사 안에 다 녹아 있다.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을 통해 삶의 가능성이 닫히고 존재의 흔적이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종호의 부친이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자신이 살인자로 오해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의 죽음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들의 태도 때문이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소중한 존재를 망각하게 만드는 죽음은 살아 있는 이들을 가장 슬프게 한다.

그러나 ‘아이들’을 기억하는 것만이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 과연 그 ‘아이들’의 죽음을 단지 기억하겠다는 의도만으로 스크린 위로 소환하는 것이 ‘아이들’이라는 기표 위에 온갖 얼룩들을 만들어낸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윤리적으로 타당한 태도인가? 가공의 용의자를 만들어 그에게 분노하고 그의 마수에서 다행스럽게 벗어난 자신의 아이를 끌어안으며 안도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불편하다. 그가 뒤늦게 텅 빈 도축장에서 살인자에게 소리 지르며 덤벼든다고 해도 의미없는 제스처 혹은 자기 위안을 위해 만들어낸 판타지처럼 느껴질 뿐이다. 21년 전의 그 ‘아이들’이 현재의 아이들과 맞닿는 지점,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진 어른들의 역할을 환기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부활과 다시 죽음은 현재성을 획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죽음의 비극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이들’을 스크린 위에서 부활시키지 못하고 다시 박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김지미 평론을 하며 대학에서 영화와 문학, 글쓰기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평생을 이미지와 언어, 그 언저리에서 어정거리며 살아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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