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임권택과 박중훈] 때론 아버지와 아들처럼 때론 스스럼없는 친구처럼
2011-03-07
글 : 주성철
사진 : 오계옥
임권택과 박중훈, <달빛 길어올리기>로 마침내 만나다

“진짜 아들하고는 저렇게 사진 찍은 적 없어요.” 임권택 감독의 부인 채령 여사가 흐뭇하게 두 사람을 바라본다. 정말 그 진짜 아들이 봤다면 샘을 낼 정도로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 같다. 카메라 위치가 바뀌거나 의상을 갈아입을 때면 또 박중훈은 친아들처럼 임권택 감독의 옷매무새를 만지고 단추를 풀어준다. 단추를 푸는 그 손길을 보고서는 어디선가 ‘야하다!’라는 소리까지 들린다. 너무나 즐겁고 화기애애한 풍경이다.

임권택 감독의 어깨를 꼭 끌어안고 활짝 웃는 박중훈의 천진한 눈웃음, 그리고 믿음직한 아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는 임권택 감독의 아이 같은 웃음. 두 사람 모두 오랜 세월 한국영화를 대표해온 감독과 배우지만 이번 <달빛 길어올리기>가 첫 번째 만남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물론 함께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그게 그들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만남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영화는 한지과에서 일하며 한지 복본화 사업을 담당하게 된 공무원 필용(박중훈)과 한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감독 지원(강수연)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렇게 영화는 두 사람이 한땀 한땀 공들여 한지를 만들 듯 촬영한 작품이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와 박중훈의 40번째 영화가 하나로 만나게 된 사연이 바로 여기 있다.

(씨네21) 두분이 예전에도 함께 작업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영화들이었나요?

(박중훈) <깜보>를 막 끝내고 임권택 감독님의 <티켓>(1986)에서 극중 전세영에게 돈 얻어 쓰는 못된 대학생 남자친구 ‘민수’ 역할을 제의받은 적 있어요. 그런데 사정상 출연하지는 못했죠.

(임권택) 오래전부터 같이 영화를 해보고 싶은 배우 1순위였어요. 그런데 스케줄이 잘 안 맞고 그랬죠. 가장 아쉬운 건 <태백산맥>(1994)의 염상구 역할이었고요. 중훈씨가 꼭 해줬으면 했던 작품이었는데. (웃음)

(박중훈) <태백산맥>의 염상구 역할은 <게임의 법칙>(1994)과 겹쳐서 못하게 된 건데 지금 생각해도 가장 안타까운 경우예요. 배우라면 모두 탐낼 만한 역할이었거든요. 그런데 그전에 또 있어요. <장군의 아들>(1990)을 준비할 때 태흥영화사에서 김두한 역할로 박중훈이 어떠냐는 얘기가 오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사실 내심 기대를 했었거든요. (웃음) 그런데 나중에 대규모 신인 오디션으로 새로운 얼굴을 발굴하셨죠. 나중에 <하류인생>(2004) 때는 극중 조승우의 선배 역할로도 제의가 왔는데 그것도 잘 안됐고요. 이상하게 감독님 영화하고는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았죠. 반면 강수연은 감독님 영화로 해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도 받고요. 그래서 사석에서 “감독님, 강수연은 ‘씨받이’ 했는데 저는 어떻게 ‘씨돌이’라도 안되겠습니까?” 하고 말한 적 있어요. (웃음) 그러니 <달빛 길어올리기>에 출연한 게 꿈만 같은 일이죠.

(임권택) 워낙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다 보니 둘이서 영화를 여러 편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정말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리고 사실 배우 캐스팅을 하다 보면 스케줄 때문에 안되는 경우가 많지만 중간에서 괜한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속상한 적도 있었고요. 게다가 같이 일을 해본 적이 없다보니 ‘내가 지금 이런 영화를 준비하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사적으로 전화할 처지도 아니었고요. 그러다 마침내 함께할 수 있어서 뛸 듯이 기뻤죠.

노련한 배우와 농담을 좋아하는 감독

(씨네21) 배우 박중훈의 영화들 중에서 어떤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셨나요?

(임권택) <투캅스>(1993)요. 정말 너무 재밌게 봤어요. 물론 그전에 <칠수와 만수>(1988)도 보고 했지만 오락영화 안에서 그렇게 멋지고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놀라웠죠. 그때 아마 <투캅스>가 프랑스영화 <마이 뉴 파트너>를 표절했다 하는 얘기도 나왔어요. 평론가협회 모임인가에 가서는 내가 한마디 짚었어요. 우리 영화가 할리우드영화에 형편없이 밀려 숨도 못 쉬던 때인데 칭찬할 거리는 못 찾고 그런 것부터 보냐고 했죠. 표절이 아닐 거다. 설정이 비슷할진 몰라도 분명히 감독과 배우들이 자기만의 창의성을 표현했을 거라고 했죠. 얼마 전에 강우석 감독을 만났을 때도 나더러 자기 영화 중에 뭘 좋아하냐고 묻기에 “<투캅스>와 <글러브>, 두편을 꼽겠다”고 했어요. 불교에서 인생을 ‘고’(苦)라고 하지만 괴로움보다는 좀더 즐거움과 따뜻함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씨네21) 함께한 적은 없어도 워낙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임권택 감독님과 오랫동안 작품을 했던 안성기, 강수연씨와 박중훈씨가 워낙 친하기도 하고요. 그런 상황에서 두분이 감독과 배우로서 어떻게 작업을 해나가셨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임권택) 박중훈은 워낙 노련한 배우죠. 그래서 <달빛 길어올리기>에서는 그걸 믿고 전부 열어놓고 싶었어요. 노련한 배우들은 ‘즉흥’을 요구한다고 해서 중심을 잃는 법은 없거든요. 그래서 기왕에 해왔던 연기자 박중훈의 패턴을 바꾸는 쪽으로 해봤으면 싶었어요. 워낙 유머가 넘치는 캐릭터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샐러리맨의 드라마를 따라가고 싶었어요.

(박중훈) 저한테는 좀 그런 게 있어요. 너무 어려우면 안 어려워요. (웃음) 임권택 감독님 대할 때 안성기 선배는 참 어려울 수 있죠. 근데 저는 함께 작업한 적은 없어도 캐스팅 등 너무 어려운 일들 몇개를 지나고 보니까 이젠 안 어려워요. 오히려 ‘아니 왜 사람들이 임권택 감독님이 어렵다고 그러지?’ 그랬다니까요. (웃음) 영화에서 제 아버지 역할로 나오시는 분이 임권택 감독님하고 <티켓> <만다라> 등 무수히 많은 작품을 함께한 송길한 작가님이시거든요. 감독님보다 6살 정도 어리신데 그렇게 어려워하시더라구요.

(임권택) 아 6살 정도면 어려워할 수밖에 없지. (일동 웃음)

(박중훈) 하하. 그런데 송 작가님이 저한테 “어이 중훈이, 내가 임 감독님하고 수십년 봐왔는데 자네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는 배우는 처음이야” 그러시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방법이 있어요. 임 감독님은 정말 농담하는 거 좋아하시거든요.

(씨네21) 어떤 농담을 주고받으시기에?

(박중훈) 지금 생각해도 진짜 웃긴 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한번은 스팸문자로 대출이자 어쩌고 하는 문자가 왔어요. 그걸 보시더니 “내가 돈 없는 영화감독인 거 어떻게 알고 보냈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한번은 촬영하던 한정식 집 밖에서 싸움이 났거든요. 주인하고 손님이 하도 싸우니까 제작부 중 누가 알아보러 갔다가 “5분 정도면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들이 5분 뒤에 딱 싸움을 그만두겠다고 정해진 거라도 있냐”고 하시는데 왜 그리 웃긴지. (웃음) 그리고 감독님은 문자를 자유자재로 보내시는 거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으세요.

(임권택) 전에 좀 나이가 있는 한 일간지 기자가 전화가 와서는 무슨 인사말 같은 걸 문자로 보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보냈더니 임권택도 문자를 보내는데 나보다 어린 자기가 문자 못 보낸다는 사실에 굉장히 쇼크를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럼 처음부터 부탁은 왜 했는지 원.

(박중훈) 전에는 또 내가 감독님 뵐 때마다 웃으면서 “감독님, 이 영화가 잘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그러니까 바로 “아 좀 불길했으면 좋겠네” 그러시더라고요. 그런 농담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바로 받아치세요. (웃음)

(임권택) 아무튼 일하는 과정에서 배우와 서로 다 털어놓고 견해를 나누고 쉼없이 얘기하고 들으면서 영화를 만들어가는 방식은 사실 나도 처음이었어요. 지금껏 나는 지나치게 틀을 만들어놓고 시작하는 편인데 기왕 이런 배우와 만났을 때 머물러서 생각하지 말자, 어제 생각이 오늘 또 다를 수 있다, 라는 생각으로 작업했어요.

(박중훈) 그리고 <달빛 길어올리기>는 제 영화 인생에서 최다 회식 영화예요. (웃음)

(임권택) 나도 그래요. (웃음)

(박중훈) 임권택 감독님이 영화를 찍는다고 하니까 왜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와서 밥을 사겠다고 하는 건지. 나중에는 이제 제발 사람들 좀 그만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니까요. (웃음) 오죽하면 대접하겠다는 사람들이 번호표 뽑아서 대기할 정도니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위원장님도 밥 살 순번이 한참 뒤였죠.

콘티 없는 현장

(씨네21) 필용에게는 몸이 불편한 아내(예지원)가 있는데, 또 은근히 마음이 끌리는 또 다른 다큐멘터리 감독(강수연)이 있습니다. 한지에 대한 얘기와 별개로 영화의 또 다른 중심축이 바로 멜로입니다.

(박중훈) 그러고 보니 감독님하고 옛날 연애 얘기도 다 했어요. (웃음) 서로 결혼 전에 누구를 만났고 또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각자의 여성관도 다 얘기했고요. 영화에 대사로도 나오는데 감독님과 제가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이상형이 바로 ‘편안한 여자’예요. (웃음) 그 얘기 듣고 사모님이 막 웃으시더라고요.

(임권택) 스스럼없이 다 털어내놓고 매번 의견을 냈어요. 어떻게 하면 더 좋겠다, 그런 식으로. 그러다보니 정말 편안해지더라고요. 그리고 이런 영화를 더 재밌게 따라올 수 있게 하려면 아내와 별개로 강수연에게 쏠리는 이성으로서의 감정들을 더 깊이 따라가고 감정의 추이를 좀더 봤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 영화가 아니니까 적당하게.

(박중훈) <길소뜸>(1985)에서 동진(신성일)이 화영(김지미)을 만나고 와서 그날 밤 아내에게 추궁당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 똑같은 장면이 <달빛 길어올리기>에도 나오거든요. 그래서 그땐 신성일이라는 느낌으로 연기를 했죠. 그런 장면들만 봐도 그래요. 인생을 아무런 갈등도 없이 아름답게만 그리는 것도 현실감이 없지만 너무 고통스럽게 바라보는 것도 척박하거든요.

(임권택) 응, 척박하지. 그럴 때 생각하는 건 인간의 감정이에요. 한때는 다들 별탈없이 사는데 나만 별나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던 때도 있었어요. 너무 고통스럽기만 한 거죠. 그럴 때 인간을 너무 밑바닥으로만 몰고 가고 싶진 않아요.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기는 하더라도 한 사람의 감정을 함부로 다루기 싫은 마음이랄까. 그런 고통도 더러 드러나는 거였으면 좋겠고요.

(씨네21) 실제 작업현장에서 느낀 연출자로서의 임권택 감독님은 어떠셨나요?

(박중훈) 정말 대단한 ‘감’을 가지고 계시죠. 감성도 대단하시고요. 현장에 콘티가 없어서 왜 그런가 여쭤보니 ‘예전에는 그런 식으로 했었는데, 현장에서 늘 다 바뀌니 있으면 뭐 하나’ 그런 생각이 드셨대요. 실제로 현장에서도 그러시고요.

(임권택) 너무 오랫동안 영화를 한 데서 길러진 면역성도 있죠. 가령 <증언>(1973)을 할 때는 시나리오가 없었어요. 물론 있긴 했지만 도저히 그렇게 못 찍겠더라고. 그런데도 전쟁장면을 찍어야 하니 군 병력을 동원해야 하는데 ‘내일 뭐 찍나?’라고 물어보면 준비가 안돼 있단 말은 할 수가 없는 거요. 어떻게든 내 방식대로 해야 하니까 뭘 찍을지 몰라도 “내일 1개 대대병력을 준비해주십시오”라고 하는 거죠. 그러고 보니 나도 참 배짱 좋았어. (웃음) 그렇게 아침에 병력이 다 동원돼 있는데도 찍을 내용이 없을 때가 많았지. 근데 그것도 초반에만 스트레스지 여러 번 그러니까 나중에는 잠도 잘 와. (일동 웃음)

(박중훈) 어른에게 적합한 표현은 아닐지 모르지만, 감독님은 정말 ‘총기’가 있으세요. 체력이나 속도가 떨어지셨을지 모르지만 얼마든지 무전기 하나로도 영화 찍으실 수 있어요. 몇달 전에 정지영 감독님을 만나서 임 감독님 얘기를 했는데 전설의 일화를 하나 들려주시더라고요. 진유영 주연의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에서 정 감독님이 조감독을 하셨는데, 타이밍을 잘 못 맞춰서 진유영 선배가 탱크에 깔리게 생겼대요. 다들 너무 놀라서 ‘동작 그만’ 상태가 됐는데 그걸 임 감독님이 뛰어들어 구하셨대요.

이제 반환점을 돌았을 뿐

(씨네21) 영화 속 주요 소재인 한지에 대해 얘기해주신다면요?

(임권택) 취재나 공부를 많이 했죠. 그런데 문제는 촬영이 다 끝나가고 있는데도 한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웃음) 영화는 끝나가는데 처음 듣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니 원.

(박중훈) 정말 공부 많이 하셨어요. 한지에 대해 이만큼 읽고 조사하시고 실제 한지를 만드는 사람들보다 아마 더 많이 아실 거예요. 그리고 감독님의 삶이 딱 한지 같아요. (웃음)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단호한.

(씨네21) 마지막으로 한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박중훈) 좀 지나친 얘기지만 정말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한 적 있어요. 감독님은 살인을 하셔도 된다고. 오히려 사람들이 ‘정말로 죽을 놈이 죽을 짓 했구나’라고 생각할 거라고. 그만큼 임권택이라는 사람이 걸어온 길이 있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150편 정도까지 만드셨으면 좋겠어요. 무리시면 단편들로 그 편수를 채워서라도. (웃음) 신체적인 건강만 챙기신다면 현실적으로 충분히 5편 이상 만드실 겁니다. 힘 없어서 못한다고는 하셨는데 정말 임 감독님이 연출하는 액션영화 주연 한번 하고 싶어요. (웃음)

(임권택)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를 찍으면서 100번째에 보태서 더 무엇을 쌓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어요. 뭔가 다른 인상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게 유일한 소원이었죠. 그런데 딱 박중훈이라는 배우와 만나게 된 게 내 영화인생의 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 복에는 내 영화를 지지해준 수많은 관객과 스탭들의 힘이 있고, 부끄럽지만 용케 그 덕분으로 좋은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감사가 있어요.

(박중훈) 인생이 길이라면 이정표가 가장 큰 힘이 돼요. 한국 영화인들에게 살아온 그 길 자체가 무한한 감동이고 존재 자체가 축복인 사람이 바로 임권택 감독님이시죠. 드디어 감독님 영화에 출연하면서 뭔가 적통을 이어받은 것 같은 뿌듯한 느낌이 들었고, 나의 길이 마라톤의 42.195m라면 이제 반환점을 확실히 돈 것 같아요. 힘에 부치는 반환점이 아니라 힘이 솟는 행복한 반환점이라고 할까. 다시 한번 저를 캐스팅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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