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평양에서 쓴 두번째 편지
2011-03-09
정리 : 강병진
정리 : 신두영
사진 : 오계옥
최동훈 감독,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의 양영희 감독을 만나다

일본에 사는 부모님, 평양에 있는 세명의 오빠, 그리고 그 경계에 놓인 한 여자. 지난 2006년 양영희 감독이 내놓은 <디어 평양>은 일본과 북한을 잇는 기구한 가족사를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또한 자신의 가족사, 좁게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딸이 운명과 마주하는 성장담이기도 했다. 5년 만에 내놓은 <굿바이, 평양>에서 양영희 감독은 3대에 걸친 가족구성원 중에 가장 어린 조카 선화와 자신을 동시에 비춘다. 할머니가 보내준 헬로키티 파자마를 입고 미키마우스 양말을 신는 평양의 아이, 그리고 연극과 뮤지컬을 마음껏 즐길 수 있지만 집에서만큼은 이념적 충성을 강요받아야 했던 일본의 여자는 서로에게 가족애를 넘어선 우정과 그리움을 품고 있다. <디어 평양>이 그랬듯이 <굿바이, 평양> 또한 보고 나면 더 많은 이야기와 질문이 생기는 작품이다. <디어 평양>이 개봉한 뒤 “DVD를 많이 사서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다녔다”는 최동훈 감독이 인터뷰어를 자처했다. 작품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해도 최동훈 감독과 양영희 감독의 만남이 조금은 뜬금없는 게 사실이다. 두 사람이 어떻게, 왜 만나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최동훈 | 이 인터뷰를 보는 분들은 제가 양영희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는 걸 의아하게 생각할 거예요. (웃음) 먼저 이 상황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안수현 PD(최동훈 감독의 아내)와 뉴욕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셨죠?

양영희 | 수현씨를 처음 만난 건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어요. 그때 저는 국적이 조선이어서 한국에 갈 수 없었어요. 오히려 뉴욕에 가면 한국과 가까워지지 않을까 했는데, 가자마자 몇몇 한국인 친구들을 만났고, 그중에 수현씨가 있었죠.

최동훈 | 제가 처음 뵌 건 <범죄의 재구성>이 일본에서 개봉했을 때였어요. 그때 안 PD와 함께 시부야에서 술을 마셨던 게 기억나요. 나중에 결혼식 때도 오셨고, 오실 때마다 사케도 사다주시고. (웃음) 예전에 안 PD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양 감독님이 뉴욕에 처음 갔을 때 유학생들이 다들 피했다면서요? 아리따운 여자가 와서 뉴욕을 활개치고 다니는데, 북한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모르니까 가까이 하지 말자고 했다던데.

양영희 | 자기소개를 할 때 농담 삼아 “북한에서 온 간첩입니다”라고 했었어요. (좌중 웃음) 친구들도 나중에는 제가 술도 잘하고 북한 이야기도 해주니까 편하게 대했어요. 수현씨는 정말 친동생 같아서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가족 얘기도 하고 남자친구 얘기도 하고.

최동훈 | 아,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누굴 이야기했을지. (웃음)

양영희 | 술도 없이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싶은데… 남자친구 후보자가 많았는데 최 감독님을 만날 때는 달랐어요. 우리가 처음 본 게 호텔 로비였죠? 최 감독님이 수현이가 쇼핑한 물건을 양손에 들고 있는데, 완전히 부부처럼 보였어요. 그때 두 사람이 정말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최동훈 | 자, 자세한 건 있다가 저녁 드시면서 얘기하시는 게…. (웃음)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볼게요. 일단 <디어 평양>부터 이야기를 하면 저는 양 감독님의 아버님 모습이 정말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아버님이 병원에 입원하시고 나서, 아버지가 매일 앉았던 화단이라며 찍어놓은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디어 평양>은 북한의 모습을 담은 일종의 기록물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념을 담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 가족의 모습이 깊게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꼭 감독님의 아버님 같은 캐릭터를 그려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굿바이, 평양>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어요. 제가 북한에 사는 그 소녀를 사랑하게 될 줄 몰랐던 거죠. 3살짜리 조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의 모습을 담았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전무후무한 다큐멘터리일 거예요. 먼저 <디어 평양>을 끝낸 뒤, <굿바이, 평양>을 다시 만들게 된 계기부터 물어볼게요.

양영희 | 선화는 제가 카메라를 가지고 평양에 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어요. 세 오빠가 낳은 조카들이 다 아들이어서, 선화는 첫 조카딸이었죠. 선화와 오빠가 함께 있는 사진을 봤을 때, 데자뷰라고 할까요. 제가 어렸을 때 오빠들이 같이 놀아줬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선화가 꼭 제 분신 같았죠. 선화가 오빠 곁에 있다는 게 고마우면서, 한편으로는 오빠들과 같이 있는 선화가 부러웠죠. 처음 선화를 찍을 때는 한 20년 뒤에, 선화가 결혼할 때 결혼식장에서 이 영상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굿바이, 평양>의 첫 장면에서 선화가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그게 나와 선화의 첫 만남이었죠. 처음 봤는데도 “고모! 고모!” 하는 게 너무 기뻤어요. 선화를 통해서 많은 상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내가 선화처럼 평양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반대로 선화는 선화대로 고모를 보면서 고모를 따라 여러 나라를 가볼 수 있으면 어떨까 생각하겠죠. 그렇게 서로를 거울처럼 보는 관계인 것 같아요.

<굿바이, 평양>

최동훈 | 선화를 보면서 처음 느낀 건 아이에게 끼가 있다는 거였어요. 어떤 유희적인 모습이랄까, 꼬마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봤어요. 한국 사람들은 북한에 대한 일종의 괴리감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그래서 가끔씩 오해도 생기고 분노도 생기는데, 이 꼬마의 인생은 그냥 너무 보편타당한 거예요. 지팡이를 짚고 노인 흉내를 내거나, 정전이 됐을 때도 “영광스럽게 정전이 됐습니다”라고 하는 걸 보면 일상을 얼마나 즐기는지가 보이는 거죠. 그게 감동적이었어요. 또 한편으로는 미키마우스 양말을 신을 때,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몰라”라고 하는 것처럼 어딘가 일찍 성숙해버린 면도 보였고요.

양영희 | 같이 있을 때는 오히려 선화가 나를 보호해주는 게 있어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에만 몰두하고 찍고 싶은 것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인데, 선화는 그런 저에게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봐 걱정하는 거예요. 특히 평양 거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 선화는 더 많이 “고모! 고모!”라고 저를 불러요. 북한에서는 낯선 사람들을 보면 통보를 해야 하고, 매일 그런 보고를 하는 총화시간이 있어요. 만약 오해가 생기면 저한테도 문제가 생길 수 있죠. 그래서 선화는 항상 주변을 살피면서 제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 자신의 가족이라고 주변에 알리는 거예요. 같이 자도 선화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줘요. 일본에 혼자 남았다고 해서 섭섭해하지 말라는 말도 하고. 그에 비하면 이 고모는 정말 철이 들지 않은 거죠.

최동훈 | 선화가 꿈꾸는 일상이 우리가 꿈꾸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선화가 카메라를 꺼달라고 한 뒤에 나눈 대화가 어땠을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양영희 | 선화도 성장하면서 점점 궁금한 게 많아진 거죠. 인터넷에 대해 알고 싶고,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어떻게 수업을 하는지, 뭘 먹는지, 그들은 어떤 옷을 입는지. 저는 다 해주고 싶은데 시간이 없었어요. 보통 때는 가지 못하는 비싼 ‘외화식당’에 가서 이것저것 다 주문하라고 조금은 히스테릭하게 한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선화가 접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정보나 이미지들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우리에게는 ‘세계’라는 게 평범한 개념이지만, 선화에게는 특별하잖아요. 식사를 하고 나서 평양 대극장 앞에 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카메라를 꺼달라고 했을 때 정말 긴장했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절대 녹음하면 안될 말을 하려는 건가. 그런데 어떤 연극을 봤냐고 물어보니까… 이렇게 평범한 대화에도 카메라를 꺼야 한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왔다는 게 마음이 아팠어요. 그동안 내 카메라에 찍히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잠시 침묵) 카메라를 꺼달라고 하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너무 미안했어요. 내가 정말 어렸구나 싶었어요.

최동훈 | <굿바이, 평양>을 보고서 간절히 원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선화가 <코러스 라인>이나 <시카고> 같은 뮤지컬을 보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거죠. 정말 역사의 수레바퀴가 잘 돌아서 그런 날이 왔으면 해요. 아마도 다른 여자형제가 없는 선화에게는 양 감독님이 유일한 롤모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감독님은 선화의 미래를 어떻게 기대하고 계신가요.

양영희 | 오빠가 말하기를 선화가 영문학을 전공하는 것도 고모의 영향 때문이래요. 제가 외국어를 하라고 했거든요. 통일이 되든 남한과 왕래가 되든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너희를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했어요. 외국어 실력도 있어야 하고 성격도 좋아야 한다고요. 그러면서 북한에 있는 친구 중에서 너희보다 못살고 고생하는 친구들 절대로 얕보지 말라고 했어요. 선화는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대요. 이게 현실적인 꿈이라면 고모랑 같이 다니면서 일을 하고 싶은 다른 꿈도 있어요. 저는 선화가 그런 꿈을 가진 한 그 꿈에 가까워질 거라 믿어요. 저 역시 20대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제 한국 이름을 소개하고 한국어로 말하는 게 편해질 줄 몰랐어요. 제가 영화감독을 지향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죠. 30대 초반까지도 한국에 오지 못했고 가봤으면 좋겠다는 이미지만 가졌는데, 지금은 이렇게 한국에 오고 최 감독님과도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어떤 이미지를 계속 갖고 있으면 나중에는 결국 현실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최동훈

최동훈 | <굿바이, 평양>에서 한 장면이 흥미로웠습니다. 선화와 헤어지고 난 뒤인데, 제 상식으로는 바로 컷을 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맞거든요? 그런데 평양의 길거리를 계속 비추더라고요. 일반적인 편집과는 달라서 눈에 띄었습니다.

양영희 | 원래는 거리를 바라보는 저의 모습이었어요. 제가 나오는 게 별로여서 나중에 빼고 그냥 거리의 모습을 넣었어요. 그냥 거리지만 거리를 보는 제가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거리를 걷는 평양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상상을 했어요. 나는 평양에 있는 내 가족, 친척들, 그외 몇몇 친구들만 아는데, 저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까. 우리 오빠 같은 귀국자를 알까, 혹시 오빠 친구는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거리를 봤어요. 선화가 저에게 만들어준 순간이었죠.

최동훈 | 선화 이야기로 출발해서, 마지막에는 아버님과 함께 찍은 감독님의 사진 위로 성장한 선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국에는 이 작품이 선화의 이야기면서 아버님께 들려드리는 이야기 같았어요.

양영희 | 선화에게는 아빠와 엄마가 있고 영향을 준 고모도 있지만, 우리 조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먹여 키웠던 거나 마찬가지예요. 자식들이 어른이 됐으니, 이제 그런 부모님을 모셔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많아요. <디어 평양>은 아버지께 세뱃돈을 드리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사실 그게 제가 처음으로 드린 세뱃돈이었어요. 온천여행도 시켜드리지 못했고, 종종 작은 선물만 가져가곤 했었어요. 사실 저는 3만엔을 준비했는데, 엄마가 2만엔을 더 넣으라고 그러셔서…. (웃음) 그러더니 엄마가 카메라를 가져오라고 하셨죠. 그게 다 엄마가 연출한 장면이나 마찬가지예요. 아무튼 그렇게 아무런 보답이 없는 자식들과 손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부모님께 선화가 이만큼 컸다는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굿바이, 평양>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해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지금은 보낼 수 없는 선화를 향한 비디오 편지’라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아버지에게 손자들이 이렇게 컸다고 알려드리는 편지이기도 한 거죠. 아버지가 제 카메라를 받아주지 않으셨다면 나올 수 없었던 작품이니까요.

최동훈 |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을 둘 다 놓고 보면 아버님도 기억에 많이 남지만 어머니가 정말 강한 분으로 보였어요. 아버님은 다소 철이 안 드신 면이 있는데, 어머니는 모든 상황을 척척 진행해 가시잖아요. 그래서 <굿바이, 평양>에 와서는 여성 3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이미 여자의 손에 넘어갔고 남자들은 판정패당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머니를 보면 그런 생각이 정말 더 커졌어요. 몇몇 인상적인 장면이 있는데, 선화의 새엄마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었어요. 정말 구슬픈 노래인데 아버님이 우시더라고요. 그에 반해서 아버님과 오빠가 거리를 함께 걸을 때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세요. 우리가 흔히 정치적, 혹은 사회적 현실이라고 하는 이상한 단절이 있는 남자들의 세계인 거겠죠. 그럼에도 이쪽에서 여자들은 노래하고 선화는 까불고 놀고 있어요. 사회를 지켜가는 여성의 힘이 느껴지는데, 그 중심에 어머니가 버티고 계신 거죠.

양영희 | 여러 영화제에서 만난 관객이 어머니에 대한 작품을 만들어야 하지 않냐고 해요. 아버지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사셨어요. 일본에서 태어나셨고, 15살 때 미국의 공습을 피해 제주도에 왔다가 4·3항쟁을 겪으셨고 다시 밀항을 해서 일본에 오셨대요. 이야기도 많지만, 일단 아버지보다 담대하세요. 아버지는 오빠나 손자들 이야기를 하면 금방 우시는데, 어머니는 눈물이 나오려고 하면 ‘자, 반찬 만들자!’ 하세요. 힘드셔도 울기보다는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넘기시려 했고요. <디어 평양>을 만들고 나서 제가 북한에 입국 금지를 당했을 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의외였어요. 조총련에서는 딸한테 사죄문을 쓰게 하라고 했대요. 제가 생각한 어머니는 당연히 ‘사죄문을 쓰면 북한에 들어갈 수 있냐’는 것부터 물었을 것 같았는데, 단번에 ‘우리 딸은 그런 거 안 쓸 거’라고 하셨대요. 어머니도 딸을 잘 아시는 거죠. 결국에는 사죄문 대신 한편 더 만들었으니…. (웃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지만, 이런 대단한 여자를 어떻게 그릴까 고민이에요.

양영희

최동훈 | 보통 다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감정을 몰아가기도 하는데, <굿바이, 평양>은 감정을 방해하지 않아요. 양 감독님 자체가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려고 한 것 같고, 그 덕분에 관객도 더 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배우 김윤석씨도 <디어 평양>을 너무 좋아하고, <굿바이, 평양>이 개봉하면 꼭 보실 거래요. 아내분과 <디어 평양>을 보고 펑펑 우셨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혹시 어떤 질문이 있으신가 물어봤습니다. 다음은 김윤석씨의 말입니다. (웃음) “원래 인간은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을 직면하면 피하거나 덮으려고 하는데, 그에 대해 눈감지 않고 현실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감독의 용기에 무척 감동을 받았습니다. <디어 평양>을 보면서 울고 난 뒤 어떤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제 자신이 구원받은 기분이었습니다. 감독의 용기가 곧 이 작품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묻는 건데, 당신에게 다큐멘터리 혹은 영화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양영희 | 정말 감사합니다. (웃음) 음… 저는 사람들이 제가 입을 수밖에 없었던 옷만 보고 있는 게 불편했어요. 누구나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 어떤 가족을 만나는 건 선택할 수 없는 거잖아요.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왜 조선국적이고, 아버지는 왜 그런 일을 하셨을까. 오빠들은 왜 북한에 갔을까, 그리고 나는 왜 여자일까.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항상 “이런 질문해서 미안한데, 북한에 가봤다면서?”라고 물었어요. 계속 물어보니까 귀찮아서 나중에는 그냥 아무 거나 다 물어봐라, 나한테 하면 안되는 질문은 없다고 했었죠. 그렇게 같이 술을 마시고, 친해지니까 겨우 나를 봐주는 거예요. 거기까지 정말 시간이 많이 걸렸죠. 그때 운명으로부터 해방되려면 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비디오카메라를 통해 아버지와 마주보게 된 거죠. 어렸을 때는 북한에 미친 아버지라고 싫어하기만 했지,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아버지에게 질문을 하면서 다가갔던 것 같아요. 카메라가 없었으면 질문하지 못했을 거예요. 아버지가 그런 건 왜 묻냐고 하면 “아버지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했죠. 카메라에게 책임을 미룬 거예요. (웃음)

최동훈 | 카메라의 권력이 세요. (웃음)

양영희 | 정말 그래요. 또 한편으로는 제가 살아오면서 마음에 삭인 말들이 정말 많았던 거죠. 사람들은 영희는 이런 집안에서 자랐으니, 북한에 충성해야 하고 나중에 크면 조총련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강요했어요. 왜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아무런 선택권이 없나. 그런 처지에서 해방되고 싶었죠. 그런데 부모님을 미워할 수도 없는 게 더 화가 났어요.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였다면 마음껏 화를 낼 수 있었을 텐데, 또 너무 많은 사랑을 주셨으니까. 그렇게 10대에서 20대 동안 하지 못한 말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30대에 와서 토해내는 거죠. 그처럼 영화를 통해 제가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운명과 마주하는 것 같아요.

최동훈 | 김윤석씨의 질문에 공감하는 게 단순한 르포였다면 이런 공감을 주지 못했을 거예요. 좋은 소설은 다 풍문을 전달하고, 좋은 영화는 남의 삶을 엿보는 거고, 독자나 관객은 구원을 받으니까요. 삶이 원래 어려운데,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나의 삶을 뒤돌아보게 되기도 하고요. 그리고 김윤석씨의 두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너무 아름다우신데, 결혼은 안 하시나요?” (웃음)

양영희 | 예전에 한번 했었는데… 김윤석씨한테 사람을 찾아달라고 해야 할까요? (웃음) 결혼이 좋긴 한데, 이제 하도 오랫동안 혼자 살다보니 남과 같이 못 사는 체질이 된 건 아닐까 싶어요. 한번은 우리 오빠랑 저의 재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기회가 있으면 하라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북한에 이렇게 가족이 많다고 하면 남자들이 싫어하지 않나”고 했어요. (웃음) 그런 게 좀 있겠죠.

최동훈 |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할까요? 다음 영화는 어떤 작품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우리는 이런 거 꼭 물어봐야 하거든요.

양영희 | 제 자신에게 스스로 압박을 줘야 할 것 같아요. 처음으로 만드는 극영화이고, 시나리오 완성단계에 있어요. 다음주에 들어가면 캐스팅을 시작할 거예요. 완전히 재연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 가족 이야기가 토대예요. 최근에 재일동포 가족을 그린 작품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박치기!> <피와 뼈>, 유미리씨 소설도 있고요. 여러 경우들이 있는데, 조선학교를 다니는 모습이 나오거나 잠깐 초상화가 등장하기는 해도 맹렬하게 조총련 활동을 하는 아버지와 사는 가족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은 없을 거예요. 제 욕심으로는 남들이 모르는 걸 하고 싶은 게 있죠. 배경은 60년대고, 오빠와 여동생의 이야기예요. 제 오빠처럼 북한에 갔다가 허락을 맡고 잠깐 일본에 돌아온 오빠와 여동생이 일주일을 보내는 이야기예요.

최동훈 | 새로운 작품에서도 관객은 자기 가족을 많이 떠올리지 않을까 싶어요. <굿바이, 평양>도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만드는 작품이니까요.

양영희 | 저의 작품, 그리고 저의 존재가 일종의 촉매가 됐으면 해요. 감독으로서의 재능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어요. 하지만 남이 못하는 이야기를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이 안 가진 이야기를 갖고 있고, 거꾸로 말하면 그것밖에 무기가 없는 거죠. 우리 가족을 알아달라는 게 아니라, 우리 가족을 보고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더 많은, 또 다른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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