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내내 <씨네21> 793권의 표지를 다시 일람했다. 그건 영화와 더불어 청춘과 중년을 통과해 간 많은 한국 배우들의 얼굴로 이루어진 장려한 플래시백이기도 했다. 그중 스무권에 가까운 표지에 등장한 배우 정우성, <본투킬>에서 <검우강호>까지.
2월23일
머피의 법칙 하나. 드물게 내가 극장 앞좌석에 앉을 때마다, 왜 하필 그 영화들의 감독님은 (별칭 핸드헬드 촬영 종결자인) 다르덴 형제의 팬인 것일까? 첫 장면부터 흐린 초점 속에 흔들리며 다가오는 소년들의 모습에 내심 걱정하며 시작한 관람이었으나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은 두 시간 내내 나를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맙소사! 멱살 잡힌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인정하자. 극장 안에서 우리는 다 변태다). <파수꾼>이 부여한 예외적인 긴장감은, 인물과 배경을 제시한 다음 사건이 터지는 순서로 영화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성격과 관계를 관객이 하나씩 발견하고 머릿속에서 짜 맞추는 과정 자체가 곧 영화가 다루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도입부에 등장하는 남자(조성하)와 소년들이 무슨 관계인지, 죽은 소년이 누구인지와 같은 서사의 기본적 정보도 제시의 형태로 턱하니 주어지는 게 아니라 몇신에 분산된 암시를 통해 관객이 발견하는 수순을 거친다. <파수꾼>의 영화적 시간은 소년 기태(이제훈)의 죽음 전후를 특정한 축- 이를테면 누군가의 추억담에 이어지는 플래시백 같은- 없이 오락가락하는데도 혼란없이 명쾌한 흐름을 유지한다.
넓은 의미의 청춘영화로서 <파수꾼>의 첫 번째 독창성은, 사춘기를 전체 인생에서 그 시기가 차지하는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그렸다는 데에 있다. “앞으로 우리는 뭐가 될까?”, “지금부터 시작이잖아” 같은 거시적 대사는 <파수꾼>에 없다. 기태, 동윤(서준영), 희준(박정민)의 열여덟살은 다음에 무엇이 올 것인가의 문제와 별도로, 그것이 세계의 전부인 양 현미경 아래 프레파라트처럼 카메라 앞에 놓여 있다. 하루가 다르게 자신의 몸이 낯설어지는 남자아이들의 현실에 바짝 다가듦으로써 <파수꾼>은 통상 소년에서 어른남자가 될 때에나 일어난다고 여겨지는 타락을 포함한 변화가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는 몇해 사이에도 엄연히 일어남을 적시한다. 또한 <파수꾼>이 보여주는 소년이라는 인류에 대한 거의 ‘민족지적인’ 관찰력은, 지금까지 우리가 사랑한 청춘영화 속 소년상이 혹시 소녀 관객이나 성인 평자의 눈에 어여쁘도록 소독된 판본은 아니었는지 느닷없는 의혹을 부추긴다. 기태와 친구들은 땀내나고 때로는 야비하고 시시각각 변덕스럽다. 자기들끼리는 숫염소 같고 소녀들과 어울리면 양순하고 친구의 부모 앞에서는 정중하다.
표현이 정확하진 않으나, 여기서 잠깐 <파수꾼>에서 오가는 대화의 샘플을 보자. “너, 왜 그러냐?” “개새끼 존나 오바하네.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 아냐.” “이 씨발놈아. 애새끼가 존나 가식적이잖아. 마음에 안 든다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내가 웬만하면 얘기하잖아. 이번엔 그냥 좀 넘어가. 설명 못하는 것도 있잖아.” 이건, 마치 공용어가 통일되지 않은 나라의 의사소통을 구경하는 기분이다. 그러고도 지탱되는 커뮤니케이션이 신통한 나머지 끝내 그것이 파탄나는 광경에 약간 서운할 지경이었다. 기태는 친구를 향한 감정의 화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주먹질을 하는데, 주먹에 담긴 감정이 상대에게 가 닿을지도 모른다는 가당치 않은 소망을 품는다. <파수꾼>의 비극은 소년들이 그들의 세계가 물리력의 서열과 감정의 서열이라는 이중 기준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발생한다. 사랑의 언어가 권력의 언어로 무시로 변질되고 칼을 쥔 자는 손에 쥔 것이 칼인 줄 모르고 휘두른다. 어떤 말이 협박인 동시에 구애일 수도 있는 세계.
2월24일
10대들에 관한 영화를 본 연후 실제 배우를 만날 때 덤으로 주어지는 즐거운 놀라움은, 영화가 편집되고 개봉하는 사이에도 그들이 자라고 변했음을 목격하는 것이다. 어젯밤 시사회가 끝나고 무대인사에 나선 네명의 배우는 부쩍 어른스럽고 말끔했다. 혹시 리얼리즘을 위해 감독이 배우의 피부에 여드름을 일부러 배양했던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편집 데스크에서 김용언 기자가 진행한 대담 기사를 읽었다. 영화를 마친 세 배우가 모두 극중 비극이 “나 때문에, 내 캐릭터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한다는 점에 눈길이 갔다. 당연하다. 기태의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원흉을 추적했으나 실패한 것도 당연하다. 가해자는 그들 사이의 공기 중에 있었으니까. <파수꾼>은 여러 줄기의 단순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다음 “그러니까 복잡한 거야”라고 선언하는 대신, 복잡한 덩어리 자체를 말없이 보여주기에 마음을 끄는, 그런 부류의 영화다.
2월28일
제83회 오스카상 중계를 시청했다. 영화상 시상식에서 내가 싫어하는 두 가지는 레드카펫과 수상 소감을 둘러싼 조바심이다. 전자는 단순히, 배우들이 극중 의상과 평상복을 통틀어 자신에게 가장 안 어울리는 옷일 확률이 높은 의상을 지나치게 공들여 차려입은 인상이 안쓰러워서다. 후자는 정 많은 수상자들이 감사한 이름을 열거하고 있는데 연출자의 재촉에 따라 오케스트라 음악은 고조되고 마이크는 내려가버리는 상황에 식은땀이 나서다. 레드카펫 이벤트는 패션산업과 연관된 만큼 해결책을 떠올릴 수 없지만 수상 소감 신경전은 방도가 있지 않을까, 아무도 의뢰하지 않았지만 궁리해 보았다. 주최쪽에서 아예 모든 종류의 감사 인사를 제도적으로 금지하고 소감은 그 밖의 언급에만 허락하는 것으로 규정해 수상자의 심적 부담을 더는 건 어떨까. 그렇다고 배은망덕은 안될 일이니 후보들에게 감사할 분들의 명단과 정다운 인사말을 미리 받아놓았다가 수상 소감 발표 시 자막으로 흘려보내고 SNS로도 발송해주는 것이다.
제임스 프랑코와 앤 해서웨이를 MC로 영입한 올해의 오스카는 어느 해보다 변신 결의가 노골적이었다. 관객을 압도하는 지상 최대의 쇼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는 한편, N세대의 관심을 잡는 동시에 전통과 휴머니즘적 감동을 부각해- 커크 더글러스, 그리고 어린이 합창단!- 연령층이 올라간 영화 주 소비층을 만족시키려 한 것 같다. 웹을 통한 오스카 사전 프로모션에 공헌한 앤 해서웨이와 제임스 프랑코는 그러나 오스카 호스트는 잘해봤자 본전이라는 금언을 확인시킨 데 그쳤다. 오프닝에서 엄마와 할머니를 불러내는 진행자라니 정말 사랑스러웠지만, 앤 해서웨이는 지나치게 모범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었고, 옆에서 오묘한 표정으로 일관한 제임스 프랑코는 졸리고 산만해 보였다. 하긴 프랑코는 학위 논문 마감도 해야 하는 처지이니 피곤할 만도 하고 무대에서도 아이폰을 손에서 뗄 수 없었으니 산만할 만도 했다. 회식자리에서 트윗하는 친구들한테는 익숙해졌지만 오스카 시상식 진행 중에 트윗하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지난 한해 제임스 프랑코가 겪은 고역은 이제 127시간에 오스카 4시간을 더해 총 131시간으로 결산해야 옳을 것 같다.
3월1일
권투의 최현미 선수, 종합격투기의 서두원 선수를 비롯한 ‘파이터’들이 관객으로 초청된 시사회에 끼어들어 <파이터>를 보았다. 선수들이 나와는 다른 장면에서 술렁이고 상체를 기울여 스크린을 주시할 때 약간 샘이 났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중요한 일이 지금 영화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니까.
거칠게 말하면 <파이터>에는 두 가지 유형의 연기가 들어 있다. 크리스천 베일과 멜리사 레오가 보여주는 명인적 연기, 그리고 마크 월버그와 에이미 애덤스의 낮게 조율된 연기다. 특히 마약 복용에 대한 명시 없이도 영화 시작 30초 만에 중독자의 육체적 정신적 특징을 완벽히 설득하는 크리스천 베일은, 자신이 타이틀 롤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나지막하게 연기하는 ‘파이터’ 역의 마크 월버그와 선연한 대조를 이룬다. 결과물로 미루어볼 때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은 베일과 레오의 연기에 훨씬 매료된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용과 틀이 비스듬히 엇나가는 인상을 남긴다. 오, 물론 아카데미는 베일과 레오에게 트로피를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