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최양일] 피 끓는 60년대의 공기를 전하고 싶었지
2011-03-18
글 : 김도훈
사진 : 오계옥
만화 원작 닌자활극 <카무이 외전> 만든 최양일 감독

하드보일드. 최양일은 피끓는 남자다. <피와 뼈>(2004)와 <수>(2006)는, 이 남자는 나이가 들어도 변한 게 없다는 선지처럼 질퍽질퍽한 증거였다. 그런데 3월17일 개봉하는 <카무이 외전>(カムイ外伝)은 거대 제작사 쇼치쿠가 참여한 만화 원작의 블록버스터 닌자활극이다. 닌자들이 CG의 도움을 받아 계곡을 튀어오르고 CG 바다 위에서는 CG로 만든 상어들이 득시글거린다. 최양일은 타협했는가? 대답부터 내놓자면, 아니다. 시라토 산페이가 60년대 내놓은 <카무이전>과 <카무이 외전>은 특유의 유물론적인 사관으로 인해 전공투 세대의 바이블처럼 여겨졌던 만화다. <허리케인 조>를 읽은 60년대 일본 젊은이들이 “하얗게 불태웠어”라는 야부키 조의 마지막 대사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권력에 반기를 들었던 것처럼 그들은 <카무이전>에서 에도시대의 권력과 투쟁하던 천민계급을 자신들과 동일시했다. 이쯤 되면 최양일이 왜 <카무이 외전>을 만들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최양일 감독은 일본 개봉으로부터 3여년 만에 개봉하는 <카무이 외전>과 3월10일부터 16일까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리는 ‘와레와레 한·일영화축제’의 ‘최양일 특별전’을 위해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2006년 지진희를 주연으로 만든 한국영화 <수> 이후 첫 방문이다.

-일본 개봉 당시 반응은 어땠나.
=찬반양론! (웃음) 대성공이라고 할 순 없었다. 크게 손해는 안 봤지만 큰 성공도 아니었다. 아쉽게도 말이지. (웃음)

-원작은 한국에서 정식으로 출간된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 만화였나.
=나도 젊은 날엔 <카무이전>의 영향을 받았다. 에도시대 계급투쟁을 묘사한 <카무이전>은 60년대 일본 전공투와 전세계적인 청년 혁명의 시기에 나와서 큰 호응을 얻은 대하 서사만화다. 이번 영화의 원작인 <카무이 외전>은 <카무이전>의 스핀오프 만화였다. <카무이전>이 권력자, 민초, 부흥하는 상인들의 사상이 맞물려 있는 시대의 변화를 그렸다면 <카무이 외전>은 닌자 전술과 액션에 비중을 둔 좀더 오락적인 만화다.

-그렇다면 외전을 먼저 영화화한 이유는 뭔가.
=처음 구상은 <카무이 외전>을 3부작으로 찍어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은 뒤 <카무이전>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진지한 <카무이전>을 하겠다고 하면 영화사가 반대했을 테니까. <카무이전>은 피지배 계급을 주인공으로 한 시대극이어서 일본에서는 조금 민감해하는 소재다. 대신 <카무이 외전>은 오락적인 데가 있는 작품이니까 이걸 성공시키면 계획대로 <카무이전>도 영화화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영화사도 동참을 안 해줘서…. (웃음)

-최근 일본 영화계가 <허리케인 조>나 <카무이 외전> 같은 60년대 망가 걸작들을 줄줄이 영화화한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요즘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피가 끓는 듯한 시대의 걸작을 왜 지금 영화화하는 걸까.
=지금 젊은이들이 내적으로 요구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60년대 카운터 컬처에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지금 영화를 만드는 어른들이 그 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피 끓는’ 문화와 인간과 인간이 주체로서 감정을 드러내고 살았던 시대의 공기를, 감정이 희박한 지금 일본의 시대에 다시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뜨거웠던 어른들의 젊은 시대를 지금 젊은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분석할 수 있겠다.

-‘피 끓는’ 세대 출신인 감독님이 이렇게 거대 예산의 상업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을 땐, 뭔가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했을 것 같다. 제작사와 감독 사이에 부딪히는 부분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내가 수락한 이상 만드는 주도권은 내가 잡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근데 개봉으로 넘어가면 어차피 영화사에 주도권이 넘어가게 마련이다. 역학관계가 왔다갔다한달까. (웃음) 그런데 사건사고가 많은 현장이었다. 처음엔 주인공인 마쓰야마 겐이치가 부상을 당했고, 여주인공이던 기쿠치 린코는 부상으로 아예 고유키로 바꿔야 했다. 또 투자사의 경영 악화로 6개월 이상 촬영이 중단됐다. 제작비가 거의 떨어진 상태라서 시나리오의 세계관 규모를 절반으로 축소해야만 했다. 현장의 그런 고난이 어떤 모순을 가지고 영화에 반영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부분들이 애초 기획에서 많이 사라진 건가.
=당시 시대적 배경을 표현하는 부분을 다 덜어내야 했다. 이야기를 지탱할 수 있는 디테일이 사라져서 괴로웠다. 개봉일이 촉박하게 잡히면서 후반작업에 3개월 더 공을 들이지 못한 것도 아쉽다. 어쩌겠나. 그게 영화의 숙명이다.

-그 후반작업에 대한 이야긴데, 바다장면을 모두 블루 스크린 앞에서 찍어서 합성했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는 그게 묘한 기운을 영화에 부여한다. 바다가 민초의 이상향 같은 느낌을 준달까.
=예리한 지적이다. (웃음) 영화의 주요 무대인 섬이라는 공간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건 섬 사회의 붕괴를 코뮌의 붕괴처럼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적인 세계의 붕괴를 결말에서 그리고 싶었다. 물론 디지털 후반작업 과정에서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만(웃음), 완벽하지는 못한 CG가 현실인지 허구인지 모호한 경계의 분위기를 만들어준 것 같기도 하다.

-CG가 대량으로 투입한 영화는 처음 아닌가. 영화 만들기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얻었을 것도 같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의 영화 만들기를 계속할 테지만…. (<카무이 외전> 이후에는) 작은 이야기인데도 돈이 많이 드는 기획만 신기하게도 계속 내놓게 된다. (웃음)

-카무이를 연기한 마쓰야마 겐이치가 아주 마음에 든다. 사실 캐스팅이 참 곤란했을 것 같은데, 원작의 카무이는 먹물로 슥슥 그려낸 듯한 남성적인 소년인데 솔직히 요즘 젊은 일본 남자배우들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여성적이잖나. 직접 캐스팅을 한 건가.
=그렇다! 마쓰야마 겐이치여야만 했다. 내가 선택했다.

-어떤 부분에서 그여야만 했던 건가.
=얼굴. 겐이치는 요즘 일본 배우들이 지닌 중성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흙냄새가 나는 얼굴을 갖고 있다. 그 시대가 갖는 힘을 표현하려면 겐이치밖에 없었다. 시라토 산페이와 함께 만났을 때도 “아! 카무이다!”라고 말하더라.

-<카무이 외전>은 시라토 산페이의 영화이기도 하고 상업 블록버스터이기도 한데, 어쩔 도리 없이 최양일의 영화라는 느낌이 있다. 패배를 알면서도 끝까지 해야 할 일을 밀어붙이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인터뷰라기보다는 응원을 받는 기분이다. (웃음) 다른 감독이 찍었다면 다른 세계관이 표현되었을 텐데, 신기하게도 내가 만들면 그런 부분이 나오는 것 같다. 2월 말 로테르담영화제에서 내 영화 13편을 모두 트는 회고전이 있었다. 거기서 13편을 전부 다시 봤는데, 만들 당시에는 의식을 못했지만 내 영화 속 주인공 중에 주류는 없구나 싶더라. 소수자, 이단아,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편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는 감회가 있었다.

-최양일다운 부분은 뒤로 갈수록 짙어진다. 이를테면 시작하면 특수효과로 범벅된 닌자 액션장면이 가득하다. 그런데 특수효과는 점점 지워지고 또 지워진다. 클라이맥스 액션은 거의 전통적인 몸싸움이고 칼싸움이다. 이건 애초에 의도한 건가.
=사람과 사람의 싸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에게 CG는 실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젊은 감독들이라면 와이어 액션과 CG를 훨씬 잘할 수 있잖나. 나로서는 사람과 사람이 몸으로 부딪히는 걸 보고 싶었다.

-대부분의 촬영이 섬에서 이루어졌다. 로케이션 장소는 어디였나.
=겨울철에 찍으려고 오키나와에 오픈세트를 지었다. 그런데 주인공의 부상으로 촬영이 중단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고통스럽게도 한여름에 찍어야 했다. 사실 처음에는 뉴질랜드에서 찍을 생각이었다. 피터 잭슨의 영화사와 협조해서 찍는다는 기획이었다. 그런데 제작비가 2배로 치솟게 되더라. 인건비가 문제였다. 일본과 한국의 현장에서는 당연한 밤샘 작업도 거기서는 불가능하다. 물론 우리가 비정상이고 그 동네가 정상이다. (웃음)

-한국이 특히 비정상이다.
=일본도 한국도, 우리는 정상이 아니다. (웃음) 사람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는 게 적당하다. 야간 촬영을 하면 다음날은 쉬어야 하고. 물론 그렇게 작업하면 한국영화와 일본영화는 존재할 수가 없다. (웃음)

-한국과 일본 사이에도 차이는 있을 거다. <수> 촬영 때는 어땠나.
=전부 달랐다.

-어떤 점이 달랐나.
=말하자면 엄청 긴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현장 시스템에서 문화적인 차이를 경험하게 됐다. 물론 그게 영화를 만드는 에너지가 되기도 했지만 가까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어쩜 제작 시스템이 이렇게 다를까 싶었다. 물론 알고 오긴 했지만…. 여하튼 거기에 대해서는 복잡한 심경을 갖고 있다. 잘도 완성했네 싶다. (웃음) 물론 한국에도 노련하고 젊은 스탭이 많지만 조금 나이가 있는 스탭들과는 가치관의 공유가 가능했는데 젊은 스탭들과는 그게 어려웠다. 실은… 지난해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분에게서 우스갯소리를 하나 들었는데, 한국에서는 최양일을 미친 바보? 또라이? 미친놈? 술자리에서 안주 삼아 그렇게 부른다더라. 그건 좀 강하게 부인하고 싶다. (웃음)

-하드보일드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 대해서는 항상 그런 뒷이야기가 떠도는 법이니까.
=그게 다른 감독 이야기였다면 나도 아주 재미있어했겠지. 술자리에서 남 씹는 거 재미있잖나. (웃음)

-이젠 걱정 안 해도 된다. 지난해 한국의 아주 하드보일드한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해서 비슷한 소문이 돌고, 그게 지금은 더 큰 화제가 되었기 때문에 감독님 이야기는 더이상 없을 거다.
=(박수를 치며) 그것 참 잘됐다. 그 감독님에게 감사해야겠다. (웃음)

-어떤 면에서 일본의 하드보일드 장르는 지금 한국으로 훌륭하게 이식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최근 한국 장르영화들은 좀 봤는가. 박찬욱, 김지운, 나홍진 같은 감독의 영화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런 생각이 문득 든다. 허우샤오시엔은 오즈 야스지로 영화를 본 적이 없던 시절에도 정적이고 관조적인, 오즈적인 세계관을 지닌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70년대 일본영화가 가졌던 것이 지금 한국 감독들에게 어떤 영향을 줬다기보다는… 70년대 일본영화의 승리라기보다는 그저 영화라는 존재 자체의 승리가 아닌가 싶다. ‘이식’이 아니라 영화가 (시대와 국경의) 경계를 뛰어넘는 힘을 가진 게 아닐까. <추격자>와 <악마를 보았다>는 정말 잘 봤고 일본 신문에 직접 영화평도 썼다. <똥파리>도 훌륭하다. 이런 일련의 영화를 보다보면 시대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이 처한 상황에 어떻게 개인이 맞서는가’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는 감독이 한국에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지금이 바로 감독님이 한국에서 영화를 더 찍을 법한 아주 좋은 시기 아니겠나.
=물론 <수>로 힘든 경험을 했지만(웃음), 공동작업을 제안하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잡을 생각은 얼마든지 있다.

-차기작은 뭔가.
=세개다. 하나는 2002년작인 <형무소 안에서>(刑務所の中)의 속편이다. 전편의 원작자인 하나와 가즈이치의 만화 중에 프리퀄 격인 <형무소 전에>가 있다. 그걸 영화화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영화에서 큰 자극을 받은 PD가 제안한 기획인데 일본과 한국의 영화들이 서로 순환을 하는구나 싶은 인상이 있다. 세 번째는 상하이필름에서 제안받은 영화로 중일전쟁 시대 일본 군인과 만주인 소녀가 바둑을 매개로 엮이는 러브 스토리다. 15살에 파리로 이주한 여류작가 ‘샨사’의 프랑스어 원작 <바둑 두는 여자>를 토대로 한다(<바둑 두는 여자>는 한국에도 출간됐다.-편집자). 요즘 일본영화들은 대부분 방송국이 주축이 되어 제작된다. 그래서 나 같은 감독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어디 하소연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고, 어찌되었건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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